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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마코토 씨와 마야 씨가 병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휴식을 취했다. 나 역시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아까의 난투극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정신을 수습했다.
이윽고 한 시간쯤 지나 마코토 씨와 마야 씨가 돌아오자, 지로를 제외한 나머지 SP 회원들은 사후 처리에 대한 상의를 위해 2층 안쪽 방에 모였다.
“지로의 의견은 듣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나이는 어려도 SP 회원인데…….”
“지로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서 SP 회원으로 정식 등록하지는 않았어요. 일본 지부의 피보호자 같은 거죠.”
“음…….”
2층 안쪽 방의 구석 소파에는 미카 사에지마가 누워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마코토 씨가 다시 미카 사에지마의 손을 잡고 수면 시간을 더 추가시켜 놓았다.
“이렇게 해 놓으면 문제없지요. 반대로 수면 시간을 줄여서 깨울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손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피는 좀 났지만 깊이 베이진 않았으니까요.”
마코토 씨는 인상답게 역시 터프했다. 치료를 하고 붕대를 감아 뒀다고는 하나, 분명 상처가 그리 가볍지는 않아보였는데…….
아무튼 우리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서 둘러앉았다. 그리고 마야 씨가 1층에서 커피를 가져와 모두에게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 윤은 아직 제 SP를 모르시죠?”
“아…… 예.”
마야 씨는 살며시 웃더니 내 커피 잔에 잠시 손을 갖다 댄다. 그러고 다시 살며시 웃는다. 나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 커피 잔을 쳐다 보기에 뭔가 눈치를 채고 커피 잔을 들어 마셔 보았다…… 심히 달다.
“어……?!”
“호호호, 그게 마야의 SP예요, 미스터 윤.”
[스위트 핑거]라고 하는데, 마야는 자신이 손을 댄 음식물을 달게 만들 수 있어요.
료코 씨의 설명에 나는 다시 할 말을 잃고 만다.
“물론 실제로 음식물의 당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고, 그저 먹는 사람이 그 음식물을 달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요.”
“…….”
“그것까진 좋은데 역으로 달지 않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그래서 마야는 일부러 음식이나 커피를 조금 달지 않게 만들죠.”
“하아…….”
“왜 그러시죠, 미스터 윤?”
“다른 회원의 SP에 놀라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네요. 실례지만 잠시 놀라겠습니다.”
“호호호호호.”
내 농담 아닌 농담에, 료코 씨나 마야 씨를 비롯하여 테이블에 모인 모두가 함께 웃었다.
“제 SP가 이렇다 보니, 아까 같은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네요. 조금은 힘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뭘, 우리가 무슨 매일 사람들과 싸우는 건 아니잖니. 게다가 네가 있어 준 덕분에 우리 카페는 설탕 값이 굳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사실 일본 지부를 운영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SP야. 다른 SP는 도움이 안 돼.”
“그런가요…… 후후후.”
마야 씨와 료코 씨의 대화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렇게 잡담을 하고 있자니, 아까의 난투극이 약간 꿈처럼 느껴졌다.

“그럼 이제부터 미즈 사에지마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겠군요.”
료코 씨는 잡담을 끝내고, 약간 분위기를 바꿔 지금 우리가 처리해야 할 문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본인의 정신 상태가 불안한 것도 있고, SP도 너무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미즈 그로닝이 나서서 기억을 지우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그렇게 맨 처음 운을 뗀 것은 혜은 씨였다.
“하지만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SP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SP를 발현할 당시의 기억을 지우면, 적어도 한동안은 다시 발동할 수 없게 돼요. 발동 방법을 모르게 되니까. 그리고 그 뒤는 SP 총본부 및 일본 지부에서 그녀를 감시하게 되죠.”
“음…….”
“아니면 SP에 대한 기억은 남겨 두되, 아까의 난투극이나 치한과 만났던 일에 대해서만 지울 수도 있어요. 그러면 불안한 정신 상태가 조금은 괜찮아지겠죠.”
“확실히 지금 미즈 사에지마의 상태는 굉장히 불안해서…… 또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건 위험할 것 같네요. 저도 혜은의 말처럼 기억을 일부 지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료코 씨는 혜은 씨의 의견에 찬성했다.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여기서는 할 수 없겠네요. 또 누가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헬렌 씨는, 자신의 SP로 남의 기억을 지우는 것에 대해 별로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헬렌 씨도 지금 상황에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6명 중에 3명이 같은 의견을 제시하자, 사실상 토론의 대세는 기울어 버렸다. 이대로 누군가가 아무 말도 안 한다면, 결국 미카 사에지마의 기억을 지우는 쪽으로 결정 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난 예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혜은 씨에게 했던 말도.
“미즈 사에지마 본인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본인의 기억을 지울지 말지…….”
“미스터 윤, 미즈 사에지마는 원래부터도 혼란스런 상태였지만…… 방금 전의 일 때문에 더 심해졌어요. 지금 그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미즈 사에지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또 말이 안 통한다면 그때 가서 기억을 지워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대화를 시도하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가 이번에는 반드시 막아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렇게 말했다. 난 육체적인 위협은 전혀 무섭지 않지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내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은 조금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 갑자기 평소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용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왠지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삶을 억지로 바꾸지 않고, 서로 돕는 것이 우리 SP의 할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견만으로 미즈 사에지마에 대해 정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내 생각을 조금 더 확실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잠깐의 실수로 일탈하려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언젠가 분명히 말했었다.
“……저도 미스터 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무엇보다, 아까 마야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미즈 사에지마가 이상한 태도를 취한 것은 제가 카페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군요. 아무래도 저의 미행이 실패했나 봅니다. 이번에는 미즈 사에지마가 놀라지 않도록 그런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해서…….”
그때 마코토 씨가 나서서 나의 편을 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마코토 씨는 미카 사에지마의 폭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 실수 때문에 제가 다친 거야 괜찮지만, 미즈 사에지마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미스터 윤이 도와준다면, 이번에는 설령 무슨 일이 벌어져도 피해 없이 막아 보겠습니다.”
“마코토…….”
“너무 걱정하지 마, 마야. 아까 같은 실수는 없을 테니까.”
마야 씨는 마코토 씨가 또다시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말과 태도에서, 순간 나는 또다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내가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섭섭하게 생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헷갈린다.
어쨌든, 미카 사에지마가 또 폭주할 경우 직접 나서야 하는 것은 나와 마코토 씨이다. 직접 나서야 하는 남자들이 괜찮다고 나오자, 료코 씨도 조금 물러서는 분위기다.
“흐음…… 그러면 마야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는…….”
료코 씨는 나와 마코토 씨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을 회피하고, 마야 씨에게 의견을 물었다. 마야 씨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저도 미스터 윤과 마코토의 주장에 동의해요. 두 사람이 다치지만 않는다면……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해 봐도 될 것 같아요.”
일단 마야 씨만은 내가 다치지 않을지 걱정해 주는 모양이었다. 혜은 씨 같으면 전혀 걱정해 주지 않을 텐데, 좋은 분이다.
아무튼 이로써 우리의 의견은 3:3으로 갈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그리 쉽게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시간이 시간이니, 점심 식사라도 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죠.”
그러고 보니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있었다. 료코 씨의 판단에 따라 우리는 일단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 여섯 명은 1층 카페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이번에는 지로도 우리와 함께 자리를 같이했다. 카페 테이블이 작았으므로, 3개를 붙여서 함께 앉았다. 점심 식사는 조용한 가운데서 편안하게 진행됐으며, 식사 도중에는 아무도 미카 사에지마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다시 커피를 한잔씩 하게 됐다. 여전히 지로는 우리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로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네?”
“아, 그게…….”
“아마 미스터 윤의 말은, 아까 우리가 토론했던 문제에 대해 지로의 의견도 들어 보자는 것이겠죠.”
내 의도를 혜은 씨가 친절히 해설해 주었다. 지로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놀란 것 같았다.
“아직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지로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무슨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풀이 죽어 있는 지로를 보자, 왠지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고민하게 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지로에게 의견을 구한다는 것은 잘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저에게도 설명해 주세요.”
“아…… 그게…….”
순간 나는 료코 씨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주제넘게 나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의외로 료코 씨는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지로에게 전후 사정을 천천히 설명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로는 아직 영어가 서툴기에, 중간 중간에 마야 씨가 일본어로 내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생각을 말해 봐.”
“음…… 그게…….”
지로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우리는 조용히 지로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