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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장 인연
나파 강점 1년 후.
대선 왕국의 왕도 금미달.
마루는 부모가 누구인지 또 자신이 왜 고아가 됐는지 모른다. 그래서 성도 없이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 모를 마루라는 이름만 있다.
고아인데다 의지할 곳도 없으니 자연 먹고사는 게 힘겹기만 했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왕도의 뒷골목에서 부랑자들과 유리걸식을 했다.
날마다 구걸을 하고 좀도둑질을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에게도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남들보다 빠른 손재주였다.
그 손재주를 연구하고 개발한 끝에 마침내 남의 주머니를 터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루가 항상 모든 작업을 하면서 실수가 없고 완벽하게 성공을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재수가 없거나 일진이 안 좋을 때를 빼고는 대체적으로 그의 작업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날들이 재수가 없거나 일진이 안 좋다는 것.
그럼에도 아직까지 마루는 크게 화를 입은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날의 작업은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직업적인 감은 분명히 괜찮았고, 또 작업 대상에 대한 느낌도 좋았다.
하지만 실패했다.
소기의 목적과는 다르지만, 소득을 올리기는 했다.
그 소득이란 것이 유형의 물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그가 시도한 작업 중에 가장 크고 만족할 만한 소득이었다.
그날은 마루에게 운명처럼 인연이 찾아왔다.
상점들이 밀집한 대로상.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경과 흥정을 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왕도 금미달에서 가장 번화한 햇빛대로의 상점 거리는 서역의 신기한 물건들, 나파에서 들어온 공예품, 각 지방의 특산물들과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이 거리는 귀족과 부유층들이 즐겨 찾았다.
그런 탓에 제대로 한 건만 성공한다면 1년이 행복할 수도 있는 노다지 광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만큼 매우 위험했다.
왕도 금미달은 치안을 위해 경비대원과 헌병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반란군이라 불리는 저항군을 색출하기 위하여 민간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방첩대원들도 곳곳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에 도둑 패거리인 도방(盜幇)의 도둑놈들이 자기 구역을 침범하는 다른 도둑놈들을 찾아내느라 눈을 뻘겋게 뜨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중 한곳에라도 걸리는 날이면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가 최소한 반병신이 되거나 죽게 된다.
그러나 작업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극복하고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직업적인 감이란 게 생기나 보다.
물론 개나 소나 다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직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만이 가지는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우선은 작업 대상의 인상이 좋아야 한다.
작업에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비교적 선량해 보이는 사람에게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걸리거나 붙잡혀도 동정심으로 호소하면 열에 두세 번은 무사히 풀려날 수가 있다.
그러나 선량해 보인다고 다 선량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악독한 놈들은 대부분이 선량한 얼굴을 한 놈들이었다.
마루는 그 점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허술하면서도 금전 냄새를 풀풀 풍겨야 한다. 하지만 괴이한 능력을 가진 술법사나 기사 비슷한 종자들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라서 그들의 주머니의 물건엔 절대 손댈 수가 없다.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거나 손이 잘려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업할 대상이 주위의 물건이나 사람들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산만해야 한다.
그것이 일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마루는 동료이자 친구인 석대와 오전 내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상점과 상점이 접해 있는, 사람 하나가 겨우 들락거릴 수 있는 작은 골목.
이곳은 햇빛이 들지 않아 벽에 기대고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엔 그만이었다.
“마루야, 오늘도 공치면 어떻게 하냐?”
벌써 정오가 지났다.
아침에 먹은 빵 한 조각은 진즉 효능을 다했다. 간간이 먹은 물로 인해 뱃속에서 천둥이 치고 있었다.
“그러게…….”
허기가 져 기운이 없는 마루는 힘없이 대답했다.
소득이 없는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일까마는 요 근래는 심하다 할 정도로 작업이 수월하지 않았다.
이게 다 모두가 신경이 곤두선 탓이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이래저래 나파놈들 때문에 먹고사는 데 지장이 많다.
마루는 옆에 쭈그려 앉은 석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루가 바라보자 석대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아아,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석대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리고 콧물 좀 닦아라.”
“작업하려면 콧물을 되도록 많이 흘려야 한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마루가 손을 들어 석대의 입을 가리켰다.
“콧물을 흘리는 건 좋은데…… 입으로 다 들어가잖아.”
석대의 코 아래는 온통 누런 콧물로 인하여 참으로 지저분했다. 돌봐 주는 이가 없는 그 나이 아이들의 모습이 대부분 이러했지만, 석대의 모습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흘러내린 콧물이 굳어 갈색으로 덕지덕지 딱지가 굳었다. 그런 딱지 위로 다시 누런 콧물이 흘러 윗입술에 뭉쳐 있다가 닦아낸 탓인지, 석대의 뺨에는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흉터처럼 딱지가 굳어 있었다.
마루의 말에 석대가 팔을 들어 콧물을 훔쳐 내었다.
스윽!
콧물이 묻은 낡은 소매가 빤질빤질 빛이 났다.
사실 석대의 더러운 콧물은 마루가 작업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거들먹거리는 부유한 사람들은 질 좋은 옷에 콧물이 묻으며 난리라도 난 것처럼 화를 내고 흥분을 하기 마련이다.
정신없는 그때가 바로 마루가 수월하게 작업을 하는 순간이었다.
한 시간이 더 지나자 마루와 석대는 점점 지쳐 갔다.
허기가 지고 다리도 저려 와서 오늘 작업을 포기할까 갈등하던 마루가 어느 순간 눈을 반짝였다.
‘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작업 대상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질 좋은 의복을 입은 목표는 상점들의 물건을 들여다보며 연신 눈을 크게 뜨고 감탄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게, 마치 촌놈이 도시에 처음 온 것처럼 정신없고 산만해 보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기다리던 호구다.
중후한 인상과 반듯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시골 영지의 집사쯤 되는 것 같았다.
연신 눈을 크게 뜨는 표정하며 웃는 모습이, 만약 작업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건 대어다!’
목표가 좌우로 펼쳐진 상점의 진열된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자 마루는 재빨리 석대에게 신호를 보냈다.
“석대야.”
“알았어.”
어느새 생기 가득해진 석대가 눈빛을 반짝이며 일어섰다. 작업에 성공하면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아는 것이다.
석대는 잽싸게 목표의 뒤를 따랐다.
마루는 구경나온 것처럼 여기저기 쳐다보며 그런 석대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시선은 목표와 석대의 모습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석대가 엉덩이가 펑퍼짐한 아줌마의 뒤를 거의 붙다시피 하여 따른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일행으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채 준비도 하기 전에 아줌마가 목표를 지나치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혀를 찬 마루는 석대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2단계 작전.
사실 2단계의 작전이라고 별반 특별할 것도 없었다. 목표와 바로 부딪치는 것이었으니.
마루의 신호를 받은 석대는 목표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며 결정적인 기회를 노렸다.
남조문웅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굳이 대로의 상점가로 발길을 향한 것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나파 치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점가는 활기가 넘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한참을 사람들과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그런 와중에 웬 꼬마 하나가 부딪쳐 왔다.
단지 부딪친 게 아니다.
꼬마는 자신의 옷에 지저분한 누런 코를 묻히고, 좀 모자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었다.
“헤헤!”
전쟁으로 인해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
어딜 가나 눈에 띄는, 평범한 아이였다.
남조문웅은 측은한 마음에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코를 닦아 주려 했다. 하지만 아이가 겁을 먹은 듯 몸을 사렸다.
아마도 아이는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았나 보다.
‘엉?’
그때, 혼잡한 틈을 이용하여 겁도 없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려고 손을 집어넣는 소매치기가 있었다.
남조문웅은 순식간에 그 손을 잡아채었다.
“아아!”
“요놈 봐라?”
소매치기는 아이였다. 자신의 옷에 코를 묻힌 아이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남조문웅이 고개를 돌려 콧물이 흐르는 아이를 찾았지만, 그 아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요 쥐방울만 한 것이 벌써부터 남의 주머니를 털어?”
남조문웅이 화난 듯 눈을 부라렸다.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금방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이놈, 너 도방 소속이지?”
“아, 아저씨,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 꼬맹아!”
도방을 묻는다는 것은 상대가 도방 소속인 진짜 도둑놈이거나 아니면 경비대 사복 형사인 경우, 혹은 도방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 어느 쪽이라도 재수 옴 붙은 것이다.
일단은 원하는 대답을 해 주다가 기회를 봐야만 했다.
“아, 아니요. 저는…… 집에 병이 들어 누워 있는 엄마와…… 굶고 있는 동생들 때문에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이럴 때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그 효과는 기막히겠지만, 아쉽게도 염병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심금을 울리는 호소의 위력을 마루는 잘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호소에 동요를 일으키고 놓아준다. 성격이 좋지 않은 이라도 가볍게 귀싸대기나 한차례 때려붙인 다음에 돌아서기 마련이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도방 소속이 아니라고? 그럼 독고다이란 말이군?”
독고다이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부정해야 할 것 같다.
“독고…… 도 아닌데요.”
“그래? 어쨌든 경비대에 가면 알 수 있겠지?”
“예? 아, 아저씨,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집에서 병든 엄마와 굶고 있는 동생들이…… 저만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용서를…….”
경비대란 말에 마루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 눈물이 나왔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