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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새벽 1권
2화
직업적인 특성상 한 번쯤은 각오했지만, 막상 눈앞에 그런 상황이 닥치자 진짜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꼬마야, 네가 사실대로 말을 안 하니 경비대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
“아, 아저씨! 저 정말 도방 소속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건 경비대에 가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남조문웅은 어린 꼬마가 하는 짓이 너무도 재밌었다.
아주 오래전에 자기가 했던 행동과 말을 꼬마가 그대로 재연하니 우습기도 하고, 또 옛날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꼬마의 나이도 그때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사,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해 주나요?”
“들어 보고 나서…….”
“전 정말 도방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또 독고…… 뭔가도 아니에요. 그저…… 가끔 배가 고프면 한 번씩 하는…… 좀도둑에 불과하다고요.”
“배가 고플 때만 한다고? 안 고플 때는 뭐 하고?”
“네? 안 고플 때는 안 해요.”
“그러면 너는 배가 안 고픈 적이 있었느냐?”
“아니요. 언제나 배가 고파…… 헉! 불…… 렀어요.”
정신없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다가 그만 말이 잘못 나와 버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눈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족은 있느냐?”
그 순간, 왜 그 웃음이 그리도 다정하게 느껴졌는지, 마루는 그만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아니…… 저 혼자입니다.”
“그래? 그럼 너 이 아저씨를 따라갈 테냐?”
“어, 어디로요?”
“경비대는 아니니 안심해라. 물론 도방도 아니다. 너, 나를 따라가지 않을 테냐? 나를 따라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또 한 달이 지나면 월급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떠냐?”
남조문웅이 얼굴을 숙여 마루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루는 그의 눈을 보며 믿을 수 없는 제의에 불신감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남조문웅의 눈은 도방의 도둑놈들처럼 번들거리지 않았다.
“정말인가요? 왜 저 같은 꼬마를 데려가려 하나요?”
“마침 심부름시킬 아이가 하나 필요한 참이었다. 그래서 너에게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이다. 후후후, 만약 네가 가지 않는다 하여도 너를 경비대나 도방에 알리지는 않겠다. 네가 거절해도 그냥 보내 주겠다는 말이다. 어떠냐, 이 아저씨의 말이?”
파격적인 제의에 진의를 의심하며 망설이던 마루가 남조문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남조문웅에게 물었다.
“글도 가르쳐 주나요?”
남조문웅이 빙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렇게 해서 마루는 남조문웅을 따라가 그가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마루는 굶지도 않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많지는 않지만 월급을 받았다.
게다가 남조문웅은 글만 가르쳐 준 게 아니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 중에서 아마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가끔 회상하곤 했다.
적어도 그때 당시의 생각은 그러했다.
*
*
*
나파 강점 11년 후.
대선 왕국의 왕도, 금미달의 귀족 저택가.
사방이 고요한 밤중이다.
줄지어 있는 귀족가의 담을 소리없이 넘는 그림자가 있었다.
담을 넘은 복면인은 그 자세로 잠시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그의 앞에는 시커먼 물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바로 저택에서 풀어놓은 경비견이었다.
독이 섞인 육포를 먹은 경비견은 미동도 하지 않은 게, 완전히 죽은 모양이었다.
복면인은 죽은 경비견을 나무 밑으로 끌어다 숨겨 놓고는 잠시 기다렸다.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저택의 사병들은 1시간 간격으로 순찰을 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리자 두 명의 사병이 나타났다.
“이놈이 또 어딜 간 게야?”
“또 정문의 암캐에게 간 모양이지.”
“그것도 수컷이라고…….”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사병들이 멀어졌다.
스윽!
복면인은 은밀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저택 건물로 접근한 다음, 며칠 전 정찰을 통해 미리 정해 놓은 부분의 벽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벽돌로 이루어진 벽은 아주 매끄러워 잡기도 쉽지 않거니와 타고 오르기는 더욱더 어려웠지만, 복면인은 손에 빨판이라도 달린 것처럼 거침없이 올라갔다.
3층으로 오른 복면인은 창가를 유심히 살폈다.
‘음, 전격 술법과 경보 술법. 다행히 바뀌지는 않았군.’
창문에는 규칙적이고 일정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예술적인 문양으로 보았으리라.
하지만 이 문양은 침입자를 막기 위한 술법진으로,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는 전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고 만다.
복면인은 품에서 손바닥 정도 크기의 빛이 나는 얇은 판을 꺼냈다.
누런빛으로 보아 금 성분이 함유되어 있거나 금 자체이리라.
금판에는 창가에 새겨진 문양과는 형태는 달라도 비슷해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복면인은 금판을 양손으로 잡고 구부렸다.
똑!
미세한 소음과 함께 금판이 부러졌다. 동시에 금판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나와 창가에 가해졌다.
그러자 창가의 문양에서 빛이 솟아나는 듯하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중화되었군.’
금판은 창가의 술법을 잠시 동안 묶어 두는 효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할을 다한 금판은 회색으로 변해 기능을 다했다.
손쉽게 술법진을 해제한 복면인은 도구를 이용하여 창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선 복면인은 잠시 주변의 기척을 살피고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 위엔 두 명의 남녀가 잠들어 있었다.
복면인은 검을 뽑아 들고는 잠든 사내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힘을 주어 살짝 찌르자 사내가 인상을 쓰더니 눈을 떴다.
“누구…….”
“쉿!”
복면인이 입 부근에 손가락을 세우자 놀란 사내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경비대 형사부장 광산석태. 맞나?”
광산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락귀족이었지만 총독부의 경비대 형사부장이 된 뒤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 그 누구보다 저항군을 많이 체포한 공로로 말이야.”
“…….”
광산석태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이제야 복면인의 정체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저항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죄없는 사람들이었지.”
“…….”
“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저항군을 체포한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죄없는 국민들까지 저항군으로 몰아 고문하고 사형시킨 것도 모자라 그 처자식까지 노예로 삼는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사, 살려 주시오.”
“네가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사람들도 그렇게 애원하지 않았나?”
“도,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주겠소.”
“다른 할 말은 없나?”
“…….”
“이를테면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든지 하는 말 같은 거 말이야.”
“미,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광산석태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했다.
갑작스런 소동에 잠이 깨었는지 그의 가슴에 올려진 여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의 옆모습은 50대의 광산석태와는 어울리지 않게 앳된 얼굴이었다.
“스스로 용서를 빌고 목숨을 끊어 속죄를 할 생각은 없는가?”
“예?”
“너는 오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는 그동안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용서를 받을 기회를 주려는 것이야.”
광산석태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알았으니 옷이나 입게 해 주시오.”
복면인이 검을 치우자 광산석태는 여자의 팔을 치우고 천천히 일어났다. 경직된 그 행동에 복면인이 차갑게 내뱉었다.
“광산석태, 경고하는데 내 검은 네 입보다 더 빠르다.”
그 말에 광산석태가 흠칫하더니 이내 자포자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광산석태가 일어나자 누워 있던 여자도 몸을 일으켰다.
복면인은 광산석태를 주시하며 침상으로 다가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여자의 팔뚝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흐음, 귀속술법을 걸어 놓았군.”
복면인의 음성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악독한 놈이다.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심보.
“광산석태, 귀속술법을 걸어 놓은 노예는 몇 명이나 되나?”
“여, 열 명쯤 되오.”
옷을 입던 광산석태가 희망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죽으면 귀속술법을 걸어 놓은 열 명 모두가 죽는다. 복면인의 말대로 아무런 죄 없는 열 명을 죽이지 않으려면 자신을 살려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잔인한 놈! 반반한 여자 노예는 모두 귀속술법을 걸어 놓았구나.”
귀족가의 노예는 구속술법을 걸어 놓지 웬만해서는 귀속술법을 걸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구속술법은 신체를 구속하는 데 반해 귀속술법은 정신을 예속하기 때문이다.
구속술법은 시전자가 일방적으로 속박할 뿐이지만, 귀속술법은 거는 자나 걸리는 자 모두가 정신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런 탓에 자칫하다가는 쌍방의 정신이 뒤섞여 미치거나 백치가 된다. 따라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귀속술법으로 노예를 예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 명도 아닌 열 명이나 되는 노예를 귀속술법으로 예속했다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복면인이 허리춤을 더듬더니 비수를 꺼내 광산석태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비수를 받아 든 광산석태가 눈을 크게 떴다.
“노, 노예들이 모두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오?”
“너를 살려 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복면인의 차가운 말에 광산석태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결심을 했는지 비수를 들었다.
복면인은 그런 광산석태를 냉정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광산석태는 천천히 비수를 목에 가져갔다.
침상에 앉아 있는 알몸의 소녀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비록 귀속술법으로 인해 광산석태에 대한 증오심은 사라졌다지만, 지금까지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 광산석태는 자신의 부친을 해치고 집안을 파멸시킨 원수였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동안 광산석태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자신의 마음이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자신 스스로 광산석태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 타인의 손을 빌어서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게 소녀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슬픈 얼굴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소녀의 행동이 안타까웠는지 복면인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광산석태가 소리쳤다.
“그자를 안아라!”
순간, 알몸의 소녀가 돌변하여 복면인을 끌어안았다.
“엇!”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복면인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2화
직업적인 특성상 한 번쯤은 각오했지만, 막상 눈앞에 그런 상황이 닥치자 진짜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꼬마야, 네가 사실대로 말을 안 하니 경비대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
“아, 아저씨! 저 정말 도방 소속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건 경비대에 가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남조문웅은 어린 꼬마가 하는 짓이 너무도 재밌었다.
아주 오래전에 자기가 했던 행동과 말을 꼬마가 그대로 재연하니 우습기도 하고, 또 옛날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꼬마의 나이도 그때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사,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해 주나요?”
“들어 보고 나서…….”
“전 정말 도방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또 독고…… 뭔가도 아니에요. 그저…… 가끔 배가 고프면 한 번씩 하는…… 좀도둑에 불과하다고요.”
“배가 고플 때만 한다고? 안 고플 때는 뭐 하고?”
“네? 안 고플 때는 안 해요.”
“그러면 너는 배가 안 고픈 적이 있었느냐?”
“아니요. 언제나 배가 고파…… 헉! 불…… 렀어요.”
정신없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다가 그만 말이 잘못 나와 버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눈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족은 있느냐?”
그 순간, 왜 그 웃음이 그리도 다정하게 느껴졌는지, 마루는 그만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아니…… 저 혼자입니다.”
“그래? 그럼 너 이 아저씨를 따라갈 테냐?”
“어, 어디로요?”
“경비대는 아니니 안심해라. 물론 도방도 아니다. 너, 나를 따라가지 않을 테냐? 나를 따라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또 한 달이 지나면 월급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떠냐?”
남조문웅이 얼굴을 숙여 마루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루는 그의 눈을 보며 믿을 수 없는 제의에 불신감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남조문웅의 눈은 도방의 도둑놈들처럼 번들거리지 않았다.
“정말인가요? 왜 저 같은 꼬마를 데려가려 하나요?”
“마침 심부름시킬 아이가 하나 필요한 참이었다. 그래서 너에게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이다. 후후후, 만약 네가 가지 않는다 하여도 너를 경비대나 도방에 알리지는 않겠다. 네가 거절해도 그냥 보내 주겠다는 말이다. 어떠냐, 이 아저씨의 말이?”
파격적인 제의에 진의를 의심하며 망설이던 마루가 남조문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남조문웅에게 물었다.
“글도 가르쳐 주나요?”
남조문웅이 빙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렇게 해서 마루는 남조문웅을 따라가 그가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마루는 굶지도 않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많지는 않지만 월급을 받았다.
게다가 남조문웅은 글만 가르쳐 준 게 아니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 중에서 아마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가끔 회상하곤 했다.
적어도 그때 당시의 생각은 그러했다.
*
*
*
나파 강점 11년 후.
대선 왕국의 왕도, 금미달의 귀족 저택가.
사방이 고요한 밤중이다.
줄지어 있는 귀족가의 담을 소리없이 넘는 그림자가 있었다.
담을 넘은 복면인은 그 자세로 잠시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그의 앞에는 시커먼 물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바로 저택에서 풀어놓은 경비견이었다.
독이 섞인 육포를 먹은 경비견은 미동도 하지 않은 게, 완전히 죽은 모양이었다.
복면인은 죽은 경비견을 나무 밑으로 끌어다 숨겨 놓고는 잠시 기다렸다.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저택의 사병들은 1시간 간격으로 순찰을 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리자 두 명의 사병이 나타났다.
“이놈이 또 어딜 간 게야?”
“또 정문의 암캐에게 간 모양이지.”
“그것도 수컷이라고…….”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사병들이 멀어졌다.
스윽!
복면인은 은밀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저택 건물로 접근한 다음, 며칠 전 정찰을 통해 미리 정해 놓은 부분의 벽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벽돌로 이루어진 벽은 아주 매끄러워 잡기도 쉽지 않거니와 타고 오르기는 더욱더 어려웠지만, 복면인은 손에 빨판이라도 달린 것처럼 거침없이 올라갔다.
3층으로 오른 복면인은 창가를 유심히 살폈다.
‘음, 전격 술법과 경보 술법. 다행히 바뀌지는 않았군.’
창문에는 규칙적이고 일정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예술적인 문양으로 보았으리라.
하지만 이 문양은 침입자를 막기 위한 술법진으로,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는 전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고 만다.
복면인은 품에서 손바닥 정도 크기의 빛이 나는 얇은 판을 꺼냈다.
누런빛으로 보아 금 성분이 함유되어 있거나 금 자체이리라.
금판에는 창가에 새겨진 문양과는 형태는 달라도 비슷해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복면인은 금판을 양손으로 잡고 구부렸다.
똑!
미세한 소음과 함께 금판이 부러졌다. 동시에 금판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나와 창가에 가해졌다.
그러자 창가의 문양에서 빛이 솟아나는 듯하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중화되었군.’
금판은 창가의 술법을 잠시 동안 묶어 두는 효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할을 다한 금판은 회색으로 변해 기능을 다했다.
손쉽게 술법진을 해제한 복면인은 도구를 이용하여 창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선 복면인은 잠시 주변의 기척을 살피고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 위엔 두 명의 남녀가 잠들어 있었다.
복면인은 검을 뽑아 들고는 잠든 사내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힘을 주어 살짝 찌르자 사내가 인상을 쓰더니 눈을 떴다.
“누구…….”
“쉿!”
복면인이 입 부근에 손가락을 세우자 놀란 사내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경비대 형사부장 광산석태. 맞나?”
광산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락귀족이었지만 총독부의 경비대 형사부장이 된 뒤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 그 누구보다 저항군을 많이 체포한 공로로 말이야.”
“…….”
광산석태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이제야 복면인의 정체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저항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죄없는 사람들이었지.”
“…….”
“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저항군을 체포한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죄없는 국민들까지 저항군으로 몰아 고문하고 사형시킨 것도 모자라 그 처자식까지 노예로 삼는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사, 살려 주시오.”
“네가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사람들도 그렇게 애원하지 않았나?”
“도,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주겠소.”
“다른 할 말은 없나?”
“…….”
“이를테면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든지 하는 말 같은 거 말이야.”
“미,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광산석태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했다.
갑작스런 소동에 잠이 깨었는지 그의 가슴에 올려진 여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의 옆모습은 50대의 광산석태와는 어울리지 않게 앳된 얼굴이었다.
“스스로 용서를 빌고 목숨을 끊어 속죄를 할 생각은 없는가?”
“예?”
“너는 오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는 그동안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용서를 받을 기회를 주려는 것이야.”
광산석태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알았으니 옷이나 입게 해 주시오.”
복면인이 검을 치우자 광산석태는 여자의 팔을 치우고 천천히 일어났다. 경직된 그 행동에 복면인이 차갑게 내뱉었다.
“광산석태, 경고하는데 내 검은 네 입보다 더 빠르다.”
그 말에 광산석태가 흠칫하더니 이내 자포자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광산석태가 일어나자 누워 있던 여자도 몸을 일으켰다.
복면인은 광산석태를 주시하며 침상으로 다가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여자의 팔뚝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흐음, 귀속술법을 걸어 놓았군.”
복면인의 음성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악독한 놈이다.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심보.
“광산석태, 귀속술법을 걸어 놓은 노예는 몇 명이나 되나?”
“여, 열 명쯤 되오.”
옷을 입던 광산석태가 희망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죽으면 귀속술법을 걸어 놓은 열 명 모두가 죽는다. 복면인의 말대로 아무런 죄 없는 열 명을 죽이지 않으려면 자신을 살려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잔인한 놈! 반반한 여자 노예는 모두 귀속술법을 걸어 놓았구나.”
귀족가의 노예는 구속술법을 걸어 놓지 웬만해서는 귀속술법을 걸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구속술법은 신체를 구속하는 데 반해 귀속술법은 정신을 예속하기 때문이다.
구속술법은 시전자가 일방적으로 속박할 뿐이지만, 귀속술법은 거는 자나 걸리는 자 모두가 정신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런 탓에 자칫하다가는 쌍방의 정신이 뒤섞여 미치거나 백치가 된다. 따라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귀속술법으로 노예를 예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 명도 아닌 열 명이나 되는 노예를 귀속술법으로 예속했다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복면인이 허리춤을 더듬더니 비수를 꺼내 광산석태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비수를 받아 든 광산석태가 눈을 크게 떴다.
“노, 노예들이 모두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오?”
“너를 살려 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복면인의 차가운 말에 광산석태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결심을 했는지 비수를 들었다.
복면인은 그런 광산석태를 냉정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광산석태는 천천히 비수를 목에 가져갔다.
침상에 앉아 있는 알몸의 소녀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비록 귀속술법으로 인해 광산석태에 대한 증오심은 사라졌다지만, 지금까지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 광산석태는 자신의 부친을 해치고 집안을 파멸시킨 원수였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동안 광산석태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자신의 마음이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자신 스스로 광산석태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 타인의 손을 빌어서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게 소녀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슬픈 얼굴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소녀의 행동이 안타까웠는지 복면인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광산석태가 소리쳤다.
“그자를 안아라!”
순간, 알몸의 소녀가 돌변하여 복면인을 끌어안았다.
“엇!”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복면인의 경계가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