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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사이, 광산석태가 비수를 복면인에게 던졌다. 그러면서 재빨리 품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때, 번쩍이는 하얀 빛줄기가 일며 빨간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광산석태의 손은 어느새 잘려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려진 손의 단면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쥐새끼 같은 놈!”
광산석태는 손이 잘린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손이 잘리기 전에 비수가 뺨을 뚫고 들어와 혀를 잘라 냈기 때문이다.
“어어엉!”
광산석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쳤다.
복면인이 잘려진 광산석태의 팔을 집어 들더니 그 손에 들린 금판을 꺼냈다. 반으로 접혀진 금판을 펼치자 보기에도 복잡한 문양이 드러났다.
“급속 이동 술법구로군.”
급속 이동 술법구(術法具)는 단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하게 해 주는 법구다. 다만 불특정 이동 술법구라 일단 발동되면 어디로 이동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디로 이동이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안전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한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아주 유용한 술법구라 할 수 있었다.
복면인은 금판을 품에 집어넣었다.
소녀를 바라보니 광산석태의 영향으로 인해서인지 어느새 혼절해 있었다.
복면인은 혼절한 소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복면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광산석태를 살려 두면 10명이 아니라 100명이 피해를 입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앞으로 고통을 당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죽어야 할 자다.
그러나 당장 광산석태를 죽였다가는 소녀를 비롯한 10명이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죽게 될 것이다.
복면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어린 소녀 10명이 죽게 된다고 생각하자 갈등이 일었다.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복면인이 광산석태에게 다가갔다.
“으으으흐!”
발버둥 치는 광산석태의 행동으로 인해 주변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복면인이 다가가자 광산석태가 남은 손을 흔들며 힘껏 도리질을 했다.
“앙, 앙 되…….”
혀가 잘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광산석태의 입이 벌어질 때마다 뜨겁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어흐흐흐…….”
그런 광산석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복면인이 주저없이 검을 휘둘렸다.
“크윽!”
광산석태의 눈에서 핏물이 뿌려졌다.
두 눈이 터진 광산석태가 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몸부림을 쳤다.
복면인은 이어서 광산석태의 사타구니를 찔러 양물을 잘라 내었다.
고심하던 복면인은 광산석태를 살려 두기로 결정했다.
‘두 눈과 입을 봉하고 양물과 한 손을 제거했으니 더 이상 제 욕심대로 행하고 탐하지 못하리라.’
복면인은 광산석태를 지혈시킨 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실 저항군 어쩌고 한 것은 다 헛소리다.
저항군의 소행으로 보이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복면인의 진실한 정체는 도둑이며 강도였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행동이 복면인의 진짜 목적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복면인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을 잠시 주시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가갔다.
“침실과 말그림은 그다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야.”
확실히 침실 안에 있기에는 여섯 마리의 말이 역동적으로 달리는 그림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도 벽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그림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복면인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앞으로 잡아 당겨 보기도 하고 옆으로 밀어 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림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밑으로 내리면서 앞으로 잡아당기자 그림이 거짓말처럼 앞으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매우 공을 들여 설치한 것 같았다.
그림과 연결된 벽이 통째로 떨어져 나오며 안쪽으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앞에 선 복면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청나군.”
웬만한 방 크기의 공간엔 삼면이 선반으로 만들어져 상자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열려진 상자마다 온갖 보석들이 반짝였다.
다른 상자를 열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금화를 비롯한 은화가 가득했고, 어떤 상자엔 금막대가 가지런히 쌓여 있기도 했다. 이 정도의 양이면 지방의 작은 성 정도는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많이도 모아 놨군.”
중얼거리듯 말한 복면인은 이내 등의 배낭을 내려놓았다.
“근데 다 들어갈지 모르겠군.”
복면인은 다소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면서 배낭에 금막대와 보석이 든 상자를 통째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내부의 공간이 술법진으로 확장된 술법 배낭이다. 극히 희귀한 물건이라 배낭 자체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일 정도.
과연 술법 배낭이라 그런지 아무리 집어넣어도 배가 나오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선반 안의 상자가 모두 배낭 안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다 들어가는군.”
복면인은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와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알몸의 소녀를 이불로 감싸 복도로 내다 놓았다.
귀속술법을 건 광산석태가 살아 있는 한 소녀는 어딜 가더라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귀속 문양에는 특정 술법 암호가 새겨져 있어 죽이고자 하면 얼마든지 원거리에서 술법으로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광산석태는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광산석태가 불구가 되었다고 소녀의 형편이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소녀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복면인은 문득 제 말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이가 어찌 이 소녀 하나뿐일까.
나파 치하라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다고 여기던 복면인이다. 그러나 이처럼 노예가 되어 노리개로, 혹은 짐승처럼 살고 있는 동족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무겁고 답답했다.
복면인은 혼절한 광산석태마저 질질 끌어서 복도에 데려다 놓았다.
그런 후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대번에 우당탕! 하는 소음이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복면인이 금판을 던지며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떨어지던 금판이 반으로 잘라졌다.
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염이 일더니, 순식간에 방 안을 뒤덮었다.
그 순간, 목적을 달성한 복면인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제2장 제과점의 지배인
나파의 대군이 국토를 유린하고 파죽지세로 대선의 왕도인 금미달로 진격할 때, 내무관 박영효는 전세가 불리하니 일단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국왕에게 주청했다.
이에 여병무도 편승하여 국왕을 압박했다.
그 일로 내무관 박영효는 나파의 성(姓)인 신정을 하사받아 내무대신이 되었다.
여병무도 나파식의 성인 궁본을 받았고, 상공부 차관이 되었다.
말이 상공부 차관이지 그가 하는 일은 대륙의 태호 제국과 전쟁 중인 나파군의 군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비롯하여 대선의 곡물과 광물을 나파로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관리들 중 제일 업무가 많고 바쁜 사람이 다름 아닌 상공부 차관인 궁본병무다.
다소 힘들고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들어 불만이긴 했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와 착복하는 재물이 적지 않아 궁본병무는 한시도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궁본 백작은 지금 매우 들뜬 상태였다.
요즘 들어 새로 들인 정부에게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린 정부를 생각하면 몸이 금세 달아올라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으음, 요즘 들어 배가 더 나온 것 같군.’
궁본병무는 임신한 것처럼 부푼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배가 나오면 나올수록 권력은 비례해져 커져 갔다.
그러나 정부와 그짓을 하기엔 튀어나온 배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어린 정부를 왕도 외곽의 별장에 숨겨 두고 가끔씩 찾아가 몸을 풀고 올 때면 어느새 잃었던 기력도 회복되고 생활의 활력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저항군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불구하고 궁본병무는 이 비밀스러운 방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궁본병무 같은 권력자에게 한둘의 정부는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지방의 영주들이 영지 안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면서 수십 명의 처첩을 두는 것에 비하자면 궁본병무의 여자에 대한 욕심은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정부가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의 어린 정부는 국왕과 혈연관계다.
아무리 국왕이 유명무실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왕은 왕이다.
나파에 정복당해 식민지가 된 지 11년이 지났지만, 국민들에게 국왕의 존재는 여전히 맹목적이다.
우매하고 어리석은 국민들이지만 그 우매함이 뭉치고, 국민 전체의 원성이 된다면 식민지를 통치하는 제국도 무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한때 신하였던 자가 국왕의 조카인 공녀를 납치하여 노리개 삼았다면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제국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제국도 식민지의 노예 같은 국민들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정신에 수백 년 동안 영향을 끼친 정서까지 지워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잡음이 나지 않도록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정책이야말로 노예 근성의 식민지인들을 회유하는 길임은 제국은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당근 정책의 일환 중 하나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대선의 호국가문인 연가의 핏줄을 보존하게 한 일임은 궁본병무는 잘 알고 있었다.
꼬리가 길면 들통이 날 수가 있다.
그때는 아무리 제국의 신임을 받았다 해도 목이 남아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이쯤에서 정리해야 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공녀를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공녀는 없애기엔 너무나 아깝고 사랑스러웠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암살의 위험과 발각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지낼 수는 없다. 아직은, 아직은 하며 주저하고 있지만, 곧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휴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의 상황이 저절로 한숨을 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어서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쥔 궁본병무의 상기된 표정은 고민보다는 다가올 기대에 들뜬 기색이었다.
궁본병무가 창문을 열었다.
“송산 경, 서두르게.”
“예, 백작님.”
강직한 얼굴을 한 기사가 달리는 마상 위에서 절도있게 대답했다.
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송산지구는 궁본병무가 매우 신임하고 든든하게 생각하는 충성스러운 기사다.
견습 기사도 거치지 않은 그를 기사로 서품받게 해 주고, 이어 준남작으로 작위를 내린 사람이 다른 아닌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