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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4화
마루는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일어나 움직였다.
어둠과 밝음이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하는 새벽의 공기는 무척 청량하고 신선했다.
검을 들고 제과점 뒤편의 공터에 선 마루는 간단하게 몸을 풀었다.
그런 다음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굳게 파지했다.
휘익!
검을 내뻗음과 동시에 몸을 우측으로 틀었다. 그러자 전방을 찌르던 검이 사선을 그리며 측방으로 이어졌다.
측방의 상단을 제압하고 이어 하단을 무력화시켰다.
마루는 이어 보법을 밟으며 몸을 직각으로 틀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반대로 뒤집혀지며 검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마치 시커먼 물이 흐르듯 검의 궤적이 줄기차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움직임 역시 검처럼 유연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스스로 깨닫고 개발한 소매치기의 손재주가 이제는 검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쉬지 않고 수련하고 정진한 결과였다.
남조문웅은 그에게 빵만을 준 것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과 인생관을 세우게 해 주었고, 또한 일신을 지킬 수 있는 무공도 가르쳐 주었다.
지금 마루의 경지는 내기를 검에 불어넣을 수 있는 기검사의 초입이다.
나파에 강점당하기 전 대선이 보유한 기검사는 50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점을 감안하면 마루의 성취는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다 남조문웅의 가르침 덕이었다.
“휴우!”
마루는 온몸에 땀이 흥건해질 즈음에야 아침 수련을 마쳤다.
남조문웅이 주인으로 있는 제과점, ‘한가람’으로 들어온 마루는 문을 활짝 열고 어제 하루 동안 쌓인 먼지를 털고 닦았다.
한가람의 전면은 물품이 잘 보이도록 커다란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는 과자와 빵, 그리고 연양갱들이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게 진열장에 올려 있었다.
청소를 하는 와중에 오랫동안 보관해도 좋을 과자와 기한이 차서 신선도가 떨어지는 빵, 그리고 연양갱을 정리하는 손길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하긴 10년 동안이나 해 온 일이니 눈을 감고도 어렵지 않게 해내리라.
사실 이런 청소 정도는 그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마루는 처음 한가람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부터, 그리고 지배인이라는 책임자가 되었어도 이 일을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 힘들다거나 고되다는 생각도 가져 본 바 없다. 그저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다.
덜그덕!
그 순간, 뒤편의 제빵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저온에서 숙성시킨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과자와 빵을 처음 선보이는 날이군. 음, 이거, 은근히 긴장되는데…….’
마루는 밀가루 반죽을 고온에서 단시간 숙성시키는 기존의 일률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저온에서 장기간 숙성시키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오늘 빵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드는 빵보다 시간도 여러 배가 더 걸리고 관리 역시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파 출신의 제빵사들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거부의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마루는 제빵사들의 불만과 외면 속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숙성에 필요한 적당한 온도와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이 하루 정도면 가장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오늘 나오는 것이다.
마루가 얼굴에 미소를 담고서 제과점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눈부신 듯 바라보았다.
막 떠오른 아침 해가 상점의 유리를 투과하며 산란했다.
유리 알갱이 같기도 하고, 찬란한 보석 같기도 한 빛의 일렁거림은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그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얼추 정리가 되자 마루는 위층으로 올라가 양치와 수욕을 했다.
어깨너머까지 늘어뜨린 검은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거울 속에서 갈색의 눈동자를 반짝였다.
피부가 하얀 탓에 다소 유약해 보이지만, 그 피부 안에 자리한 심장의 피는 누구보다도 활기차고 힘차게 뛰었다.
똑똑.
“들어와.”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주근깨가 자잘하게 나 있는 아가씨가 얼굴을 들어밀었다.
“선애, 안녕?”
“네, 지배인님도 잘 주무셨나요?”
“그럼. 선애가 모포를 새것으로 갈아 준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잘 잤단다.”
마루가 유선애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다 됐다.”
마루가 유선애와 함께 공장으로 들어서자 하얀 위생복을 입은 나파에서 온 제빵사들과 그들의 밑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대선 출신 직공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자기가 맡은 구역 앞에 정렬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다.
공장에서 나오는 과자의 종류는 수십 가지.
한가람 제과점은 왕도 금미달에서 공장제를 도입하여 빵과 과자를 대규모로 생산해 내어 공급하는 유일한 곳이다. 따라서 일하는 인원도 적지 않다.
나파 출신의 제빵사 10명과 그 밑으로 제빵제과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 도제(徒弟)가 20 명, 그리고 단순한 작업인 선별, 포장, 납품과 주문 배달 인원까지 합하면 제과점에서 일하는 인원은 모두 1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부리는 사람이 다름 아닌 지배인인 마루다.
“공장장?”
“예.”
50대의 혈색 좋고 배가 산만 한 남자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시식을 해 봅시다.”
“준비하겠습니다.”
마루는 그에 비하여 아들뻘의 나이지만 엄연히 윗사람이다.
나파인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윗사람의 말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점이다. 일단 상관이 되어 인정을 받으면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는다.
곧 향긋하고 구수한 냄새가 공장 안을 진동했다.
어린 도제들의 손에는 화덕에서 구워져 막 나온 빵과 과자가 김을 모락모락 풍기며 그를 유혹했다.
마루는 제일 먼저 식빵에 손을 대었다.
손으로 잡고 일부분을 떼어내자 식빵이 삶은 고기의 결처럼 층을 이루면서 찢어졌다.
“일단 후각을 비롯하여 시각적인 모습은 훌륭합니다.”
저온 숙성 방식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했던 공장장이 이제는 긍정적인 말을 했다.
빵이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마음이 일치되었다는 것이 마루를 기쁘게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존의 것보다 향이 더 진하고 표면이 상당히 부드러우며 탄력이 있네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렇게 질 좋은 빵을 생산해 낸다면 그쯤은 일도 아닙니다.”
마루는 웃음을 지었다.
지금 공장장은 밀가루 반죽 저온 숙성의 냉장 보관과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자는 뜻이었다.
“더구나 맛도 지금까지 먹어 본 빵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공장장도 드셔 보십시오.”
“저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
“죄송합니다. 실은 참을 수가 없어서 아까 나오자마자 시식해 보았습니다.”
공장장이 고개를 숙였다.
“잘했어요. 공장장이 제일 먼저 시식을 해 봐야 맛을 알지요. 앞으로도 나와 상관없이 공장장이 계속 모든 빵과 과자를 시식하세요.”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마루가 웃음을 보이자 그를 어렵게 주시하던 100여 명의 직공들의 경직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저온 숙성된 반죽으로 만든 빵과 과자가 몇 가지나 됩니까?”
“시식용으로 구운 정도라 내놓을 정도의 양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은 반죽으로 전부 빵과 과자를 만드세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선전도 안 했는데요?”
“그것은 나에게 맡겨 주세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장장과 말을 끝낸 마루가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의 위생 상태는 아주 청결했다.
위생적인 복장과 청결은 마루가 지배인을 맡고 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문제였다. 초반에는 한동안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들 당연한 것처럼 위생과 청결을 신경 쓰고 있었다.
“앞으로 각 공정의 위생과 청결 상태 검사는 각 공정 책임자에게 일임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조회 시간에 복장 검사는 없습니다. 공정 책임자는 조회 전에 미리 조원들의 상태를 알아서 점검하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의외인 듯 공장 안이 웅성거렸다.
“앞으로 아침 조회 때는 여러분들의 건강 상태와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한 제의와 건의 사항만을 듣겠습니다. 지금부터 누구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또 과연 말해도 좋을지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우리가 처음 실시한 위생, 청결을 위해서 해야 되는 머리 손질과 손톱 손질, 그리고 거북한 위생복을 입은 것처럼 다소 당황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처음과는 달리 완전하게 적응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조회 방식도 차차 적응이 될 겁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법이니까요.”
직공들은 모두 그의 입을 주시하였다.
나파 치하의 한가람에서 받는 대우는 그 어느 곳보다 좋았다. 그래서 모두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다.
쫓겨나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월급이나 작업 환경이 그 어느 곳보다 좋고 깨끗했다. 게다가 한가람의 주인인 남조문웅과 지배인인 마루는 직공들을 험하게 부리지 않아서 일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또 좋은 것이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공정 책임자에게 위생 검사를 받게 된 것이다. 특별히 나아진 점도 없지만, 그래도 대하기 부담스러운 지배인에게 받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래도 흉허물 없이 터놓고 가깝게 지내는 각 공정의 책임자에게 받는 것이 매 검사 때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각 공정의 책임자는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제과점의 생활은 나파 치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고 생기가 가득했다.
나파 치하인 왕도 금미달은 매일 폭력과 암살이 성행하여 왕도 곳곳에 총독부 산하의 경비대원과 헌병대원들이 진을 치고 검문검색을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체포했다. 불응할 시엔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이 일어나는 일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왕도 금미달은 매일 유혈이 난무했다.
대로를 벗어나 뒷골목으로 살짝만 들어가면 누구에게 죽었는지 모를 시체와 선혈이 질퍽하게 흘러내렸다.
그러한 불안하고 암담한 상황에서 한가람에서의 생활은 나파 치하 전의 생활보다도 오히려 낫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루는 납품과 주문 배달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따로 불렀다.
“오늘 새로 선보인 식빵과 과자들을 납품할 곳엔 이인분, 주문 배달할 곳엔 일인분을 가지고 가도록 해. 물론 무상이니까 납품처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시식을 권하는 걸 잊지 말라 전하고, 귀족가에 주문을 받아 들어갈 때는 반드시 집사장이나 하녀장에게 새로 개발한 빵과 과자라 말하고 건네주도록.”
“알겠습니다, 지배인님.”
“자, 그러면 우리 한가람 제과점의 신선한 빵을 식탁에서 기다리는 분들을 위하여 오늘도 맛있게, 열심히 합시다!”
사람들이 아침을 들기 전에 공장에서 나온 빵이 배달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배달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말과 마차를 타고 정신없이 시내를 돌아야 한다.
이처럼 한가람 제과점의 오전은 누구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루도 마찬가지다.
“선애?”
“네, 지배인님.”
“상점에 오신 모든 손님들에게 오늘 새로 선 보인 빵들을 시식하게 하고,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은 무료로 싸 주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근깨가 귀엽고 인상적인 유선애는 부모와 남동생이 모두 제과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의 가족은 나파의 점령 전보다 풍족하게 살고 있으며, 제과점은 이들 가족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다.
적어도 이들 가족에게는 지금의 현실이 그리 절망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성에 눈을 뜬 유선애는 잘생기고 똑똑하며 너무도 자상한 마루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4화
마루는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일어나 움직였다.
어둠과 밝음이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하는 새벽의 공기는 무척 청량하고 신선했다.
검을 들고 제과점 뒤편의 공터에 선 마루는 간단하게 몸을 풀었다.
그런 다음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굳게 파지했다.
휘익!
검을 내뻗음과 동시에 몸을 우측으로 틀었다. 그러자 전방을 찌르던 검이 사선을 그리며 측방으로 이어졌다.
측방의 상단을 제압하고 이어 하단을 무력화시켰다.
마루는 이어 보법을 밟으며 몸을 직각으로 틀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반대로 뒤집혀지며 검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마치 시커먼 물이 흐르듯 검의 궤적이 줄기차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움직임 역시 검처럼 유연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스스로 깨닫고 개발한 소매치기의 손재주가 이제는 검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쉬지 않고 수련하고 정진한 결과였다.
남조문웅은 그에게 빵만을 준 것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과 인생관을 세우게 해 주었고, 또한 일신을 지킬 수 있는 무공도 가르쳐 주었다.
지금 마루의 경지는 내기를 검에 불어넣을 수 있는 기검사의 초입이다.
나파에 강점당하기 전 대선이 보유한 기검사는 50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점을 감안하면 마루의 성취는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다 남조문웅의 가르침 덕이었다.
“휴우!”
마루는 온몸에 땀이 흥건해질 즈음에야 아침 수련을 마쳤다.
남조문웅이 주인으로 있는 제과점, ‘한가람’으로 들어온 마루는 문을 활짝 열고 어제 하루 동안 쌓인 먼지를 털고 닦았다.
한가람의 전면은 물품이 잘 보이도록 커다란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는 과자와 빵, 그리고 연양갱들이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게 진열장에 올려 있었다.
청소를 하는 와중에 오랫동안 보관해도 좋을 과자와 기한이 차서 신선도가 떨어지는 빵, 그리고 연양갱을 정리하는 손길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하긴 10년 동안이나 해 온 일이니 눈을 감고도 어렵지 않게 해내리라.
사실 이런 청소 정도는 그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마루는 처음 한가람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부터, 그리고 지배인이라는 책임자가 되었어도 이 일을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 힘들다거나 고되다는 생각도 가져 본 바 없다. 그저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다.
덜그덕!
그 순간, 뒤편의 제빵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저온에서 숙성시킨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과자와 빵을 처음 선보이는 날이군. 음, 이거, 은근히 긴장되는데…….’
마루는 밀가루 반죽을 고온에서 단시간 숙성시키는 기존의 일률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저온에서 장기간 숙성시키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오늘 빵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드는 빵보다 시간도 여러 배가 더 걸리고 관리 역시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파 출신의 제빵사들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거부의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마루는 제빵사들의 불만과 외면 속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숙성에 필요한 적당한 온도와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이 하루 정도면 가장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오늘 나오는 것이다.
마루가 얼굴에 미소를 담고서 제과점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눈부신 듯 바라보았다.
막 떠오른 아침 해가 상점의 유리를 투과하며 산란했다.
유리 알갱이 같기도 하고, 찬란한 보석 같기도 한 빛의 일렁거림은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그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얼추 정리가 되자 마루는 위층으로 올라가 양치와 수욕을 했다.
어깨너머까지 늘어뜨린 검은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거울 속에서 갈색의 눈동자를 반짝였다.
피부가 하얀 탓에 다소 유약해 보이지만, 그 피부 안에 자리한 심장의 피는 누구보다도 활기차고 힘차게 뛰었다.
똑똑.
“들어와.”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주근깨가 자잘하게 나 있는 아가씨가 얼굴을 들어밀었다.
“선애, 안녕?”
“네, 지배인님도 잘 주무셨나요?”
“그럼. 선애가 모포를 새것으로 갈아 준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잘 잤단다.”
마루가 유선애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다 됐다.”
마루가 유선애와 함께 공장으로 들어서자 하얀 위생복을 입은 나파에서 온 제빵사들과 그들의 밑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대선 출신 직공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자기가 맡은 구역 앞에 정렬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다.
공장에서 나오는 과자의 종류는 수십 가지.
한가람 제과점은 왕도 금미달에서 공장제를 도입하여 빵과 과자를 대규모로 생산해 내어 공급하는 유일한 곳이다. 따라서 일하는 인원도 적지 않다.
나파 출신의 제빵사 10명과 그 밑으로 제빵제과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 도제(徒弟)가 20 명, 그리고 단순한 작업인 선별, 포장, 납품과 주문 배달 인원까지 합하면 제과점에서 일하는 인원은 모두 1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부리는 사람이 다름 아닌 지배인인 마루다.
“공장장?”
“예.”
50대의 혈색 좋고 배가 산만 한 남자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시식을 해 봅시다.”
“준비하겠습니다.”
마루는 그에 비하여 아들뻘의 나이지만 엄연히 윗사람이다.
나파인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윗사람의 말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점이다. 일단 상관이 되어 인정을 받으면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는다.
곧 향긋하고 구수한 냄새가 공장 안을 진동했다.
어린 도제들의 손에는 화덕에서 구워져 막 나온 빵과 과자가 김을 모락모락 풍기며 그를 유혹했다.
마루는 제일 먼저 식빵에 손을 대었다.
손으로 잡고 일부분을 떼어내자 식빵이 삶은 고기의 결처럼 층을 이루면서 찢어졌다.
“일단 후각을 비롯하여 시각적인 모습은 훌륭합니다.”
저온 숙성 방식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했던 공장장이 이제는 긍정적인 말을 했다.
빵이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마음이 일치되었다는 것이 마루를 기쁘게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존의 것보다 향이 더 진하고 표면이 상당히 부드러우며 탄력이 있네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렇게 질 좋은 빵을 생산해 낸다면 그쯤은 일도 아닙니다.”
마루는 웃음을 지었다.
지금 공장장은 밀가루 반죽 저온 숙성의 냉장 보관과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자는 뜻이었다.
“더구나 맛도 지금까지 먹어 본 빵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공장장도 드셔 보십시오.”
“저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
“죄송합니다. 실은 참을 수가 없어서 아까 나오자마자 시식해 보았습니다.”
공장장이 고개를 숙였다.
“잘했어요. 공장장이 제일 먼저 시식을 해 봐야 맛을 알지요. 앞으로도 나와 상관없이 공장장이 계속 모든 빵과 과자를 시식하세요.”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마루가 웃음을 보이자 그를 어렵게 주시하던 100여 명의 직공들의 경직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저온 숙성된 반죽으로 만든 빵과 과자가 몇 가지나 됩니까?”
“시식용으로 구운 정도라 내놓을 정도의 양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은 반죽으로 전부 빵과 과자를 만드세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선전도 안 했는데요?”
“그것은 나에게 맡겨 주세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장장과 말을 끝낸 마루가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의 위생 상태는 아주 청결했다.
위생적인 복장과 청결은 마루가 지배인을 맡고 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문제였다. 초반에는 한동안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들 당연한 것처럼 위생과 청결을 신경 쓰고 있었다.
“앞으로 각 공정의 위생과 청결 상태 검사는 각 공정 책임자에게 일임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조회 시간에 복장 검사는 없습니다. 공정 책임자는 조회 전에 미리 조원들의 상태를 알아서 점검하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의외인 듯 공장 안이 웅성거렸다.
“앞으로 아침 조회 때는 여러분들의 건강 상태와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한 제의와 건의 사항만을 듣겠습니다. 지금부터 누구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또 과연 말해도 좋을지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우리가 처음 실시한 위생, 청결을 위해서 해야 되는 머리 손질과 손톱 손질, 그리고 거북한 위생복을 입은 것처럼 다소 당황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처음과는 달리 완전하게 적응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조회 방식도 차차 적응이 될 겁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법이니까요.”
직공들은 모두 그의 입을 주시하였다.
나파 치하의 한가람에서 받는 대우는 그 어느 곳보다 좋았다. 그래서 모두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다.
쫓겨나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월급이나 작업 환경이 그 어느 곳보다 좋고 깨끗했다. 게다가 한가람의 주인인 남조문웅과 지배인인 마루는 직공들을 험하게 부리지 않아서 일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또 좋은 것이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공정 책임자에게 위생 검사를 받게 된 것이다. 특별히 나아진 점도 없지만, 그래도 대하기 부담스러운 지배인에게 받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래도 흉허물 없이 터놓고 가깝게 지내는 각 공정의 책임자에게 받는 것이 매 검사 때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각 공정의 책임자는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제과점의 생활은 나파 치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고 생기가 가득했다.
나파 치하인 왕도 금미달은 매일 폭력과 암살이 성행하여 왕도 곳곳에 총독부 산하의 경비대원과 헌병대원들이 진을 치고 검문검색을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체포했다. 불응할 시엔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이 일어나는 일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왕도 금미달은 매일 유혈이 난무했다.
대로를 벗어나 뒷골목으로 살짝만 들어가면 누구에게 죽었는지 모를 시체와 선혈이 질퍽하게 흘러내렸다.
그러한 불안하고 암담한 상황에서 한가람에서의 생활은 나파 치하 전의 생활보다도 오히려 낫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루는 납품과 주문 배달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따로 불렀다.
“오늘 새로 선보인 식빵과 과자들을 납품할 곳엔 이인분, 주문 배달할 곳엔 일인분을 가지고 가도록 해. 물론 무상이니까 납품처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시식을 권하는 걸 잊지 말라 전하고, 귀족가에 주문을 받아 들어갈 때는 반드시 집사장이나 하녀장에게 새로 개발한 빵과 과자라 말하고 건네주도록.”
“알겠습니다, 지배인님.”
“자, 그러면 우리 한가람 제과점의 신선한 빵을 식탁에서 기다리는 분들을 위하여 오늘도 맛있게, 열심히 합시다!”
사람들이 아침을 들기 전에 공장에서 나온 빵이 배달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배달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말과 마차를 타고 정신없이 시내를 돌아야 한다.
이처럼 한가람 제과점의 오전은 누구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루도 마찬가지다.
“선애?”
“네, 지배인님.”
“상점에 오신 모든 손님들에게 오늘 새로 선 보인 빵들을 시식하게 하고,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은 무료로 싸 주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근깨가 귀엽고 인상적인 유선애는 부모와 남동생이 모두 제과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의 가족은 나파의 점령 전보다 풍족하게 살고 있으며, 제과점은 이들 가족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다.
적어도 이들 가족에게는 지금의 현실이 그리 절망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성에 눈을 뜬 유선애는 잘생기고 똑똑하며 너무도 자상한 마루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