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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명화는 조경하에 입가에 어린 웃음이 다른 때와는 달리 매우 신경에 거슬렸다.
평소 오빠처럼 자상하게 느껴졌던 든든한 그 웃음이 지금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마루에 비하여 조경하와 지낸 시간들이 더 소중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같이하는 동지애는 연인을 향한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거는 일은 그다지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다.
현실보다는 음유시인이 전해 주는 가락에 더 많이 들려오는 내용이지만, 그녀에게 동지들은 모두 애인인 동시에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가.
명분과 목적이 아무리 옳다 하여도 한 사람을 무작정 사지로 내모는 일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물론 조국의 독립을 위하는 과정은 험난하고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대선 곳곳에서는 동지들이 나파의 군인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독립이라는 절대적 사명 앞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들이 흘린 뜨거운 피가 숭고한 대지 위에 뿌려져 신의 은총을 받아 다시 태어날 거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어쩐지 잘못된 것만 같았다.
적어도 죽을 때만큼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영문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이용의 대상이 되어 결국 끔찍한 고문 속에 죽어야 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나파의 잔인한 고문관들의 손에서 마루가 견딘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화가 성급한 몸짓으로 문을 나섰다.
“조 조장님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군요.”
“명화, 어디 가는 거야?”
“…….”
“명화?”
조경하는 명화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 이내 깨닫고는 얼굴을 구기더니 황급히 뒤를 쫓았다.
*
*
*
기사는 문 앞에서 검은 띠로 마루의 눈을 가렸다. 마루는 잠자코 그의 행동에 따랐다. 암굴과도 같은 어둡고 좁은 길이었지만, 눈을 가린 마루는 알 수 없었다.
기사가 내민 검집의 끝을 잡고 어딘지 모를 길을 따라가는 마루의 걸음은 부자연스러웠다.
몸이 아직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은 그의 발걸음을 자꾸만 망설이고 더디게 만들었다.
그래서 왼손은 벽에 대고 있었다.
지하 특유의 음습하고 축축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가운데, 몇 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예민하게 청각을 자극하였다.
이윽고 계단을 타고 올라 점점 어딘가로 향했다. 바닥이 고르고 평평하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마지막 계단입니다.”
기사의 말에 마루는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맑고 시원한 바람 내음이 맡아졌다. 계단을 오르고 나서도 기사는 한동안 그를 끌고 걸었다.
돌이 맞부딪치는 소음이 들리고 미끄러운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얼마를 더 걷고 나서 기사가 말을 했다.
“숫자를 50까지 세고 안대를 벗으면 됩니다. 그럼.”
“고맙습니다.”
기사의 대답은 없었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기사는 사라진 것이다. 기사가 사라진 곳을 파악하려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마루는 그러지 않았다.
마루는 가능하면 천천히 숫자를 세고 나서 안대를 벗었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낯익었다.
신전의 중앙인, 성수가 놓여 있는 곳이다.
자신은 그리 멀지 않은 지하에서 올라온 것이다.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깨끗하게 닦아진 대리석 바닥에는 윤기가 반짝였다.
성수가 들어 있는 성반을 들여다보았지만, 핏물 대신 맑은 물만이 고요하게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지만 자신은 변해 있었다. 초취한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변하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럴 수만 있다면, 매일 느끼는 일상의 평범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은 일상의 평범함을 원했던 것 같다. 가끔은 원성받는 자들의 집을 저항군이라는 이름으로 터는 재미도 맛보면서…….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닥에 와 닿는 대리석의 매끄러운 감촉이 이질적이었다. 그런 생각은 자신의 마음이 변해서이리라.
회랑을 따라 걷다가 무슨 기척이라도 들리면 멈추어 서서 무심결에 좌우를 살폈다. 경비대와 헌병대들이 지키고 있다는 명화의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마루의 표정은 긴장 때문에 잔뜩 굳어 있었다.
이윽고 신전의 입구를 떠받치고 있는 열두 개의 기둥 일부와 광장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고, 더불어 무장을 한 경비대와 헌병대의 모습도 보였다.
마루는 순간적으로 신전 곳곳에 세워진 신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신상은 나파군에 의하여 파괴되어 발목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신상을 받치고 있는 석대는 그가 몸을 숨길 만큼 커다랗다.
‘이제 어떻게 한다? 지금 나가면 분명히 의심을 받을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저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자니 너무도 막연하고…….’
마루는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평상시의 옷차림이라면 귀족 행세라도 하면서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 볼 텐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머리는 풀어헤쳐져 산발이 되었고, 얇은 상의 하나만 걸친 채였다.
복식을 사교의 수단과 체면으로 알고 매우 중요시하게 여기는 귀족은 집에서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복장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다.
오직 평민만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복장을 한다. 그냥 편하게 입는 것이지만 귀족들은 그런 평민들을 천하게 여긴다.
그러니 귀족도 아니요, 평민도 아닌 어중간한 자신의 지금 모습은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휴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막막했다. 명화의 말에 반발하고자 고집을 부려 나오긴 했지만, 신전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은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본관과 10여 개의 부속 건물로 이어진 공식적인 출입구는 모두 두 곳이다.
왕궁을 향한 광장과 접해 있는 북쪽 정문과 시가지로 향해 있는 남쪽의 후문이다.
하지만 후문은 예전부터 사제들과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전에 쓰이는 물건들을 납품하기 위한 사람들만 출입할 뿐, 일반인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두 곳 모두 경비대와 헌병대가 지키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출입구는 그게 전부가 아니았다. 신전 건물의 주변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도록 환하게 트여져 있었다.
그 공간은 모두 드넓은 잔디밭으로 펼쳐져 있고, 외부와의 경계는 신전 전체를 섬처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강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신전을 들락거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강을 넘지 않는다. 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침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은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건널 수 없는 신지와의 경계선이었다.
일단은 이 건물을 나가야 하는데 광장으로 향하는 북쪽 출구와 부속 건물로 이어진 남쪽 출구는 모두 봉쇄당했다.
‘그렇다면 출구가 없는 서쪽과 동쪽은 경계가 없거나 있다 해도 허술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쪽에 밖으로 향하는 창문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구멍들이 뚫어져 있는 것을 기억해 냈지만, 과연 그 구멍들이 창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마루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 제과점과 가까운 동쪽으로 움직였다.
신전의 건물이 워낙 크고 복잡해서 창문의 위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쉽게 눈에 띄었다.
그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환기 구멍이었다.
하지만 환기 구멍의 위치는 신전의 거의 10미터의 높이에 있었고, 구멍의 크기는 가로 세로 50여 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정도면 빠져나가는 데 충분하겠지만, 문제는 환기 구멍까지 올라가는 일이었다.
잠시 구멍을 보며 생각에 잠긴 마루는 신전의 벽을 장식하기 위해 길게 늘어뜨린 하얀 휘장을 떼어 내고 이빨로 천을 찢어낸 다음 서로 연결했다.
그런 다음 나무 탁자를 찾아내어 다리 하나를 떼어 냈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그의 온몸은 다시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직 마루의 몸은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천의 한쪽 끝을 나무 탁자의 중간에 묶고 다른 한쪽에는 무게를 싣기 위해 떼어 낸 탁자의 다리를 매달았다. 그런 뒤 구멍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나 나무는 구멍 옆의 벽을 맞고 떨어졌다.
밑으로 떨어지는 나무를 피해 마루는 황급히 몸을 날렸다.
우당탕!
나무가 대리석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깜짝 놀란 마루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며 귀를 기울였다.
“휴우!”
다행히도 별다른 기척이 나지 않아 마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과 달리 10여 미터의 높이의 작은 구멍에 긴 탁자의 다리를 집어넣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의 10번 가까이 던지고서야 구멍에 나무를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구멍에 나무가 가로로 걸쳐지도록 조심스럽게 잡아 당겼다.
다행히 나무는 한 번에 걸쳐졌다.
이미 체력은 바닥난 상황.
마루는 자신의 내부를 점검했다. 다행히 운공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공으로 진기를 돌리니 늘어졌던 근육에 힘이 솟았다.
두어 번 잡아당겨 나무가 좌우의 벽에 단단하게 걸쳤음을 확인한 마루는 천천히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으음!”
진기로 육체에 힘을 불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등골에 땀이 줄지어 흐르고 속옷이 금세 축축해졌다.
‘몸이…… 정상이 아니다.’
몸의 상태가 이렇게 나빠질 이유가 없었다. 특별하게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몸의 상태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가까스로 구멍에 한 팔을 걸치며 밖을 내다보았다.
신전 주변의 초록 잔디가 눈에 확 들어왔다. 좀 더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살폈다. 인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사실에 탄력을 받은 마루가 거의 구기다시피 해서 몸을 구멍에 걸치고는 줄을 끌어 올려 다시 바깥쪽으로 내렸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구멍 안쪽에 탁자 다리를 걸치고 좌우를 살피면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온 다음 줄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나무의 무게에 의해서 줄은 구멍 안으로 미끄러지며 이내 사라졌다.
신전 밖으로 나왔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잔디밭을 사이로 제과점과의 거리는 500미터쯤 되었다.
며칠 전의 사건 때문인지 흉흉한 눈을 번뜩이는 경비대와 헌병대 말고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자신의 모습은 너무 쉽게 눈에 띄는 것이다.
신전에서 강과의 거리는 약 300미터. 강까지만 다가가면 거의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푸른 잔디밭을 300미터나 지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입은 하얀옷은 푸른 잔디와 너무 대비되는 색이다. 기어가든 뛰어가든 사람의 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운명에 맡기고 모험을 걸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밤까지 기다리기에는 머리 위의 태양이 지나치게 높았고, 또 순찰 중인 경비대들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막다른 길에 선택의 폭은 많지 않았다.
결국 마루는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전에 내린 폭우로 인하여 땅은 축축했다. 잔디를 헤치고 땅을 파자 아직 젖은 흙이 나왔다. 얇은 상의를 벗어 젖은 흙에 짓이겼다. 하얀 옷이 흙에 범벅이 되었다.
그런 뒤 마루는 다시 상의를 입었다.
축축한 흙의 질감이 온몸에 끈끈하게 엉겨 붙었다. 이제 죽어라 뛴다면, 몸이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1분 안에는 강에 이를 것이다.
마루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거
기에 있는 거요?’
마루는 신을 부정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그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 것이었다.
<『잠들지 않는 새벽』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