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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가야겠습니다.”
“아직 움직이기 힘들 텐데요?”
“그래도 가야 합니다.”
“혹시 제과점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단장님, 아니, 남조문웅 님도 마루 님이 여기 계신지 알고 있으니까요.”
“알고 계시다고요?”
“예……. 제가 걱정하실까 봐 연락을 드렸어요.”
마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마 전에 남조문웅과 함께 검투사 경기장에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만약 조경하라는 사람의 일행이 저항군이라면 연화란 백작은 충분히 설명이 간다. 그러나 제과점 주인이자 도둑질이 부업인 남조문웅과 매국노를 부친으로 둔 명화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발 더 양보하여 명화도 저항군이라 치자. 하지만 남조문웅이 저항군과 연관이 있다고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파인인 남조문웅이 무엇이 아쉬워서 저항군을 만난단 말인가.
아니다.
마루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귀와 눈을 닫은 바보가 아니라면, 그동안 듣고 목격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감안하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남조문웅이 한 모든 행동과 말들이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면?
남조문웅이 나파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면 그가 저항군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충격적인 것도 아니다.
사실 그동안 일부러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었다. 하지만 마냥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마주쳐야 할 때였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명화는 그런 마루를 보면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가야겠습니다.”
“꼭 가셔야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는 무리예요. 신전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거예요.”
명화는 이 고집불통의 사내가 마음을 바꾸어 주길 바랐다.
혹시라도 신전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경비대나 헌병대의 눈에 띈다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만약 잡혀가기라도 한다면 신전에서 나온 상황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이렇게 나오는 마루의 행동에 조경하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스러웠다. 조경하는 필요하다면 상대가 누가 됐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인물이다.
곧 아주 중요한 거사가 시작된다.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거사를 방해하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그가 취할 행동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나는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신전 밖에는 경비대원과 헌병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어요. 그들의 눈을 피할 자신도 있나요?”
만류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마루를 자극하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들과 마찰을 일으킬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명화는 마루에게 이런 바보 같은 일면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루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한결같고 성실한 사람이라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루는 어느 곳에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인정과 대우를 받고 살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는 안목이 없다. 시류를 읽지 못하고 상황 파악에 어둡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이렇게 고집스럽게 나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파군들은 대선인들이 공격적이어서 자신들을 지키고자 방어적으로 대했단 말인가?
아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가지는 단순하고 우매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명화는 그런 내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총독부의 반응을 보면 이번 일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요.”
총독부는 포고령을 내걸었다.
3일 전, 신전 앞에서 지금까지 전례없던, 왕국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민심을 혼란하게 하는 폭동이 반란군들의 사주를 받은 일부 폭도들의 의해 자행되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 결과, 아무것도 모르는 수많은 시민들이 폭도들의 무자비한 폭동으로 인해 희생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총독부는 이 사건을 좌시하지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여 반란군들과 그에 동조한 폭도들의 획책을 저지하고 총력을 다해 소탕할 예정이라 선포했다.
“그리고 반란군과 폭도들의 행적이나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자들을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포상을 약속했어요. 이런 때에 마루 님이 신전을 나선다면 주위를 지키는 경비대와 헌병대들이 그냥 지켜만 볼 것 같아요? 만약 그들에게 붙잡히게 되면 어찌 되는지 몰라서 그래요?”
‘모른다! 난 모른다!’
마루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목구멍을 넘어오지 않았다.
반사적일 정도의 묘한 반발감이 그의 내부에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명화의 말은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렸고, 설사 그녀의 말이 옳더라도 모두 부정하고 반박하고 싶었다.
심장을 얼리는 것 같은 지독한 차가움이 외로움과 소외감이라는 감정을 싣고 전신으로 뻗치고 있었다.
설사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명화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어리석고 무모한 오기라도 해도 좋다.
마루는 명화를 노려보면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내 앞을 막는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지금 마루 님의 처지가 어떠한 줄이나 아세요? 혼자서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요? 아이들 투정부리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제발 고집 좀 그만 부려요!”
명화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답답한 벽창호처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마루에게 그만 화가 난 것이다.
“투정이라 해도 좋고, 고집이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 합니다.”
“남조문웅 님도 사정을 아신다고 말했잖아요.”
“아시든 모르시든…… 나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다.”
마루는 남조문웅에게 직접 들으며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두 눈과 귀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보내 줘.”
문득 들려온 음성에 마루와 명화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문 쪽을 향하였다.
“뭐라고요?”
명화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물었지만, 그는 손을 올려 명화의 말을 막았다.
“단, 조건이 있네.”
“걱정 마십시오. 난 아무것도 듣거나 보지 않았습니다.”
“역시 머리가 좋은 친구라 금방 상황을 이해하는군.”
“…….”
“그래도 자네를 구해 준 은인인데 그렇게 독 오른 표정을 지을 건 없잖은가.”
“설사 그렇게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
“굳이 인사를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가 이러니 좀 후회가 되는군.”
“…….”
“자네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와 내 동료들은 목숨을 걸었다. 비단 목숨만 건 게…….”
명화가 조경하의 말을 제지하였다.
“그만하세요.”
조경하는 명화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몸을 움직일 만하면 일어나게. 밖에 자네를 안내해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네.”
마루는 전신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일어섰다.
“신세를 졌습니다. 그럼.”
“잠깐만요.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리겠어요. 나하고 같이 동행한다면 신전을 벗어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명화에게 고개를 숙인 마루가 열려 있는 문을 향했다.
밖에는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
그는 검투사 경기장에서 보았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마루가 젊은 사내를 따라가자 명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조경하에게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지금 나가면 어찌 되는지 잘 아시잖아요.”
“단장님의 뜻이야.”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조금 전에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단장님에게 보고를 했어. 그랬더니 단장님이 그러더군. 마루가 원하는 대로 해 주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요?”
명화의 음성은 떨고 있었다.
“단장님이 어렵사리 내린 결단이야. 그리고 나는 단장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조직의 사활을 걸면서 이루어 내야 할 만큼 이번 거사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 않나. 그런 만큼 반드시 성공해야 돼. 그래야 전 국민이 동요하고 마침내 궐기하여 나파군에 대항한다면 총독부도 이 나라에서의 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누가 그것을 모르나요. 하지만 거사하고 마루 님하고 무슨 상관이죠?”
“좋게 말하면 일종의 조직원으로서 자질을 검증하는 일이야. 여기 신전을 빠져나가는 일은 나라고 해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 하지만 마루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빠져나간다면 그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조직에 가입시키는 것도 고려해 볼 생각이야.”
“말도 안 돼요. 조직에 가입하면서 자질 검증을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설사 자질을 검증한다 할지라도 이건 너무 지나쳐요!”
명화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조직원의 자질 검증은 항상 시행되어 왔어. 다만 본인들이 알지 못할 뿐이지. 그리고 이만한 상황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면 우리에겐 하등 필요없는 존재야.”
“만약 체포라도 되면 어떻게 되죠?”
“그것도 의미가 있지.”
“무슨 의미요?”
“마루는 우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체포된다 하더라도 말할 것이 없단 말이지.”
“설마 경비대가 고문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지금 우리를 잡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저들에게 신전에서 나온 마루는 충분히 좋은 먹잇감이 될 거야. 며칠만 저들의 신경을 붙잡도록 마루가 버티어 준다면 거사가 성공하게 될 확률은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야. 설마 마루의 목숨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는 동지들의 목숨보다 더 값지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글쎄, 단장님이 마루를 조직의 일원으로 생각했다면 사전에 사상 무장과 훈련을 시켰을 거야. 나는 충분히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명화는 그가 마치 빠져나가지 못하고 체포당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는군.”
“단장님이 대학관에 보내고 무공을 가르쳤다는 것은 언젠가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자질을 검증한다고 사지로 내몰다니요? 정말 이해할 수 없네요.”
“처음엔 그런 의도로 마루를 교육시켰겠지. 하지만 오랫동안 관찰해 보니 그의 나약한 성격상 조직의 일보다는 제과점 지배인 자리가 어울린다고 최종적으로 판단된 모양이야.”
“그 말은 단장님의 생각인가요, 아니면 조 조장님의 주관적인 판단인가요?”
“내 말이 곧 단장님의 말이야.”
“설마?”
“설마라니? 마루같이 허약하고 생각없는 한 사람 때문이 조직이 한순간에 괴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마루에게는 이것이 선택의 갈림길이야. 그리고 설사 체포된다 하더라도 단장님이 손을 쓸 테니 그리 부정적으로만 여길 것도 아니야.”
조경하가 언성을 높이다가 지나치게 흥분했다고 여겼는지 명화를 달래듯 말했다.
“이렇게 결정할 바에는 그냥 평범하게 살게 내버려 두지 뭐 하러 끌어들인 건가요?”
사실 조경하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경하가 남조문웅을 대신하여 결정하는 것처럼 굴기에 그리 반문한 것이다.
“단장님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컸던 모양이야. 다소 유약한 면이 있지만 잘만 다듬으면 쓸 만한 저항군이 되리라 여긴 거겠지. 그런데 명화도 보았듯이 광장의 사건을 경험한 그의 정신은 의외로 모래성처럼 나약하기 그지없어. 정신이란 충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견고해지기 마련이지만 그의 정신은 문제가 많아.”
“만약에 단장님이 손을 쓰기도 전에 고문이라도 당해서 그 사람이 버티지 못한다면요.”
“다행히 굳건한 의지로 고문을 견디어 내면 좋겠지만, 크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설사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연다 하더라도 나파인인 단장님이나 내무대신인 신정영효 후작님의 영애인 명화에 대한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지. 오히려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다고 혹독하게 당하고 말 거야. 하지만 만에 하나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명화만 남기고 대원들은 다른 거점으로 옮겨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