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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어쨌든 조창의경 자작을 혈산매정 가문의 귀족으로 영입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백작으로 승작시킬 수가 있다.
몇 가지 거쳐야 할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조창의경 자작이 야망이 있는 자라면 대선의 총독인 혈산매정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작 우려되는 상황은 본국의 귀족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자칫하다간 조창 가문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세력을 키운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하고, 또 필히 그런 쪽으로 공론을 몰아갈 것이다.
원래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없는 것도 만들어 낸다 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혈산매정으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말이다.
“그까짓 입만 나불대는 귀족 놈들이 뭐가 무섭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입만 나불대는 귀족들이라고는 하지만, 수없이 많이 벌어진 내전을 통해 단련된 백전노장의 귀족 무장들이다.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주색에 빠져 방탕한 삶을 보낸 대선의 쓰레기 같은 귀족들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시기가 이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되었네. 조창의경에게만 은밀하게 전하도록. 조창의경이 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그놈이 머리가 있고 나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 테니까.”
“…….”
위험한 방법이긴 했지만 조창의경의 내심을 파악하고 끌어들이기엔 매우 적절한 방법이었다.
삼호장경은 더 이상 혈산매정의 지시에 반론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저항군인가, 반란군인가 하는 놈들 말이야…… 아직도 뿌리를 뽑지 못하고 언제까지 설쳐 대게 놔둘 거야?”
“그것들이 워낙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 배후를 캐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첩대원들을 거미줄처럼 쫙 깔아 놓고 추적 중이니 머지않아 놈들의 실체를 파악하여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발악하도록 계속 방치해 두면 곤란해. 지금까지 총력을 기울여 애써 실시한 동화 정책이 모두 헛수고가 될 수 있음이야. 반란군의 행동에 미개하고 멍청한 대선 국민들이 하나둘 호응하고 동조하여 나선다면 그다음의 일은 혼란과 혼선뿐이다. 후작도 알다시피 나는 대선에서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반란군을 뿌리 뽑기 위한 어떠한 짓을 해도 좋다. 모든 재량권을 이용하여 반드시 그놈들을 발본색원하여 완전히 씨를 말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각하!”
“반란군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인간들은 인정을 두지 말고 공개처형해라. 반란군을 도와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처형된다는 것을 미개한 족속들의 의식 속에 확실하게 새겨주란 말이다.”
혈산매정은 손바닥을 펴 목을 치는 흉내를 내며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그리고 궁본병무를 대신 할 수 있는 자를 물색해 봐. 그놈이 분수를 모르고 공녀를 취하더니,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마는군. 여색을 밝히긴 하지만 능력이 있던 놈인데, 아쉬워. 그런 자가 많아야 되는데 말이야.”
“곧 새로운 인물을 천거하겠습니다.”
사람은 많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선별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혈산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자잘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방역부대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만 내놓으면…….’
그때가 세상이 바뀌는 날이 될 것이다.
‘이놈들, 다 쓸어버리리라.’
한차례 혈광을 번뜩인 혈산매정은 이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제10장 오기



머리가 무거웠다.
마치 머리 안에 무거운 쇳덩어리도 들어 있는 것마냥 머리가 자꾸만 아래로 처졌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너무 머리가 무거웠다.
결국 일어서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침대에 다시 머리를 내렸다.
언뜻 명화를 본 것 같았다.
‘꿈이었던가, 아니면 환상이었던가?’
무거운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방이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 한구석에서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미간을 찡그리며 통증을 희석하려 하였지만, 통증은 이내 뒷골 전체로 퍼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뒷골을 지배하고 이내 전신으로 퍼졌다.
“하악!”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마루는 부들부들 떨었다.
머릿속에서 이는 통증을 뽑아 버리려는 듯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요동을 칠 때마다 머리카락이 성큼 뽑혀져 나왔다. 침상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마루의 몸이 뭍에 나온 해파리처럼 축 늘어졌다.
땀으로 한바탕 목욕을 한 것 같은 얼굴 아래로 어지럽게 뒤엉킨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늘어진 얼굴에 배어 나오는 땀만이 그가 살아 있음을 말해 주었다.
축축이 젖은 얇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벗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신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이 탔다.
마비된 것 같은 목을 어렵게 돌려 침상 주위를 살폈다. 머리 쪽만 빼고 침상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뒤쪽을 더듬어 보았다.
차가운 질감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조금 더 더듬자 사기 주전자가 손에 닿았다.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손에 지나치게 힘이 가해졌는지 주전자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밀어내고 말았다.
챙그랑!
사기 주전자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고, 적지 않은 소음을 만들었다.
마루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이 치워지며 은은한 과일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루가 살며시 눈을 떴다.
명화, 그녀였다.
과일 향은 그녀에게서 풍긴 것이었다.
“목마르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마루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명화는 새로운 주전자와 옷을 들고 돌아왔다.
허리를 굽혀 마루의 상체를 들어 올리는 일이 수월하지 않은 듯 명화가 침상에 앉아 마루를 가슴으로 안았다.
마루는 명화가 들이켜 주는 물을 허겁지겁 마시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살 것만 같았다.
명화는 마루를 다시 침상에 누였다.
“악몽을 꾸었나요?”
마루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묻는 명화를 마주 보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마루는 머리가 아팠다고는 하지 않았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광장의 비극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지만 마루 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아이는 신전의 양지바른 곳에 안장을 했어요. 그리고 아이의 상처로 살펴보니 고통없이 숨을 거둔 것 같아요. 그러니 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해 보세요.”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친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고아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보다 친나파인의 딸이라는 생각이 앞서 마루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하였다.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학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외감에 따른 반발이기도 했다.
명화가 젖은 옷을 벗겨내려 하자 마루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딱딱한 음성.
명화는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갑자기 변하게 된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했다.
“땀을 많이 흘려 옷이 젖었어요.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가 있어요. 몸을 닦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감기에 걸리지 않아요.”
“내가 하겠습니다.”
마루는 침상을 손으로 짚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 정도의 기운은 생겼다. 그러나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마른 수건으로 상체를 닦고 명화가 건네주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작은 지극히 완만했다.
그때까지 명화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마루는 침상에 다시 몸을 눕히며 명화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명화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곳은 신전의 지하예요.”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명화 아가씨입니까?”
“마루 님을 구한 분은 조경하란 분이세요. 그분 아시죠? 전에 경기장 귀빈실에서 만났잖아요?”
“생각납니다.”
마루는 명화의 시선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녀를 보며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에 조경하를 본 것도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맞아.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어. 그리고…….’
그 뒤의 상황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분이 마루 님을 모시고 왔어요.”
“내가 여기에 얼마나 있었습니까?”
“마루 님은 3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어깨의 탈골 말고는 별다른 부상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모양이에요.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명화는 마루가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과 발작을 하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탈골이라는 말에 마루는 우측 어깨를 움직여 보았다. 약간 욱씬거리는 느낌 말고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아마도 중보병을 어깨로 들이받을 때 입은 충격인 것 같았다.
“마루 님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조 조장님이 뼈를 맞추었어요. 그리 불편하지는 않으시죠?”
이 여자는 도대체 뭔가?
이 여자의 의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매국노인 친나파인을 부친으로 두고 있으면서 웃기게도 나파의 지배가 온당하지 못함을 말하는 여자다.
이러한 암담하고 절망적인 대선의 현실을 공감하지 못하고 현실 속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삶을 은근히 꼬집어 지적하는 여자다.
그리고 평민의 신분인 자신에게 존대를 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여자다.
고아들을 돌보며 행복해 하는 여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여자였다.
어쩌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가진 자의 무료하고 건조한 일상을 나름대로 흥미있게 보내기 위한 놀이는 아닐까?
땅 위를 정신없이 기어 다니는 개미를 바라보는 시선은 개미의 운명을 틀어쥔 신이나 다를 바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개미의 운명을 바꿀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일까, 살려 줄까?
아니, 좀 더 살려 두고 관찰하자. 어떻게 버둥거리며 사는지 지켜보자.
개미 앞에 거대한 장애물이 나타나면 우월감의 다른 표현인 동정심으로 치워 주기도 한다. 이제 막 재미가 시작되려 하는데 장애물 때문에 개미가 그만 의욕을 상실하고 주저앉으면 곤란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개미가 혹시 자신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은…….
마루는 명화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내렸다.
옹졸하고 치졸했다.
어쩌다가 이리 치사해졌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