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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태호 제국은 나파 제국보다 거대한 국가다. 그러나 거대한 만큼 약점도 많고 찌를 곳이 많았다.
하여 다민족 국가인 태호 제국은 오랫동안 끊임없는 내란에 휩싸여 수많은 소국가들로 분할되는 처지까지 몰렸다.
그래서 이제는 태호라는 제국명도 무색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사실 그 모든 게 태호에 대한 나파 제국의 음모였고 침략 계획이었다. 소수 민족들을 지원하여 내란을 일으키고 제국 내부의 혼란을 유도한 것이다.
과연 계획대로 태호 제국의 조정은 우후죽순으로 일어나는 내란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자치권으로 회유를 한 상태.
이 모든 계획이 혈산매정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의 치밀한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대선과 태호 남부 일부를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노아 제국과 호전적인 녹평 왕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가의 영토나 인구, 군사력 면에서 나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국이자 대국인 노아 제국과 병사 개개인이 기사에 준하는 녹평 왕국은 마음을 먹고 전력을 투사하면 태호는 물론, 대선마저 단기간에 정복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한 나라다.
그런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태호와 대선이 나파에 속수무책 점령당하는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이유는 그럴 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노아 제국은 이 시대의 왕권에 의한 초월적이고 강제적인 권력 집중의 전제정치와는 다르게 의회정치를 도입하여 입헌군주제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다.
정치는 국민의 대표들이 의회에 나가 의사를 결정하고, 황제는 평상시에 각 부의 수장의 임명권만을 행사한다.
그러다 국가 위기 시에는 군대의 통수권과 사법, 행정권을 이양받아 국론의 분열을 막고 법에 정해진 대로 권한을 행사한다.
따라서 국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항이 아닌 다음에야 의회에서 주요한 사항의 결정되는 만큼 각 나라와 복잡하게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의회의 의원들은 한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태호를 침공한 나파를 견제하는 일에도 이해관계에 따른 이견이 많아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노아 제국의 이러한 정치 제도의 약점을 이용한 혈산매정은 상황에 맞게 선수를 치고 나갔다.
혈산매정이 내민 태호 제국 분할 지배의 제의는 지지부진한 설전을 거듭하던 노아 제국 의회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 주는 일이었다.
그간 적대적이었던 태호 제국을 손도 안 대고 삼키며 따뜻한 남방의 거대한 영토가 새로 생긴 것이다.
단지 나파 제국과 동맹을 맺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영토가 생겼으니, 태호 제국에 우호적인 의원들도 이러한 결과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초원의 나라인 녹평 왕국은 대부족의 연합체다.
녹평왕은 각 대부족의 대부족장이 모여 합의한 끝에 선출했다. 그러한 이유로 왕이라기보다는 대외적으로 연합체를 대표하는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왕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매우 미약한 편이다.
그러한 사정을 파악한 혈산매정은 현재의 녹평왕에게 대부족 연합체를 깨고 절대왕정에 의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당연히 녹평왕은 혈산매정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비밀 협정과 동맹을 맺었다.
그 협정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나파군의 파견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녹평의 군대는 강하다. 따라서 아무리 전략을 쓰고 용병술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결과를 알면서 이곳에서 병력을 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토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물론 본래의 계획도 그러했다.
다만, 그럴 경우 자신이 추진했던 녹평과의 협정과 동맹이 본토 소관으로 넘어갈 확률이 크다.
‘그렇게 되면 공들여 죽을 쑤어 개를 준 꼴이질 않은가?’
그것보다 더 짜증나는 일은 녹평을 이용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본토에서 녹평을 다르게 이용하거나 오히려 이용당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이거, 골치 아프군. 어찌 되었든 이 일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대책을 강구해 봐야지.’
혈산매정은 매우 위협적이고 두려웠던 노아 제국과 녹평 왕국, 두 강국을 동맹으로 삼아 일단은 배후의 위협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혈산매정은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본국인 나파에 있을 때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 세력의 견제에 의하여 지지 기반을 마련하기는커녕 오히려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대선에서는 달랐다.
대선에 대한 경영을 공고히 하여 힘을 기르고 세력을 만들면 본국인 나파 황제의 위엄에 못지않으리라.
그리하여 태호를 정복하여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제 밑그림은 다 그려졌으니 준비만 착실히 하면 된다.
그 준비의 하나가 바로 요이반의 성과였다.
혈산매정이 눈을 감고서 입을 열었다.
“삼호 후작, 방역부대의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삼호장경 후작이 갑작스런 물음에 흠칫했다.
안 그래도 어제 요이반에서 보고가 올라온 참이었다. 한데 총독이 그 같은 사실을 이미 아는 것처럼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이게 과연 우연인지, 아니면 총독이 자기도 모르는 은밀한 비선을 가지고 있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하튼 삼호장경 후작은 한순간이나마 소름이 돋았다.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리려 했습니다.”
삼호장경 후작은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었다.
그는 총독의 비서실장인 동시에 왕도 금미달의 어둠을 암약하는 방첩대의 수장이다. 그리고 방금 거론한 요이반 방역부대를 담당한 담당자이기도 했다.
“요이반에서 올라온 보고로는 세균은 임상실험을 마쳤고, 소규모 대인 지역 실험만 완료하면 당장에라도 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임상실험의 결과는 어때?”
“투입하고 난 후 3일 이내에 절명하는 9할의 치사율을 보였다고 합니다. 만약 전선에서 일정 공간 안에 집중적으로 투하한다면 시간은 그보다 줄어들고 치사율도 더 높아질 겁니다.”
“적진에 투하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도 여러 가지를 고안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쇠뇌에 장착하여 쏘는 방법과 투석기를 이용하여 방법, 그리고 열기구를 이용하여 공중에서 살포하는 방법, 지형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술법사들이 높은 지대에서 바람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살포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를 고안하고 있지만, 예산과 인원 부족으로 아직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마친 삼호장경 후작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혈산매정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역부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막대한 예산과 전력의 핵심인 술법사들을 법의로 돌리면서까지 그가 방역부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하고도 특별했다.
그런데 막대한 예산과 인원을 쓰면서도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근래에 이르러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은 것이다.
방역부대의 연구가 성과를 보이면 보일수록 그의 군대는 적은 희생으로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태호를 정복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나아가 노아 제국의 도모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한데 삼호장경 후작이 긴장한 이유는 예산과 인원 편성에 관한 얘기를 세 번째로 보고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혈산매정이 눈을 뜨자 그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음, 그것들이 마냥 놀기만 하진 않은 모양이군. 성과도 보이지 않고 본국에 좋지 않은 소문도 퍼져 이참에 정리하려 했는데…… 시기를 잘 맞추었군.”
혈산매정의 말투는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방역부대의 성과에 만족한 것이다.
삼호장경 후작이 때를 놓칠세라 말을 이었다.
“방역부대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예산을 증액하고 법의들의 인원 편성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그들도 총독 각하의 은혜에 감복하여 더욱 열성적으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그리고 각 부서장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고, 앞으로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화학 연구도 성과를 보이라고 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지 않으면 최전선으로 좌천시킨다는 엄포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요이반 방역부대장이 조창 가문의 누구라고 했지?”
삼호장경이 기억하기로는 조창의경 자작에 대한 혈산매정의 질문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현 방역부대장인 조창의경 자작은 혈산매정이 직접 임명했다. 따라서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잘 모르는 것처럼 재차 묻는 것은 그만큼 의중에 두었기 때문이다.
“조창 가문의 의경 자작입니다.”
“조창의경이라…….”
“의경 자작은 대선 정벌 시 최일선 말단 소대의 종군 술법사로 시작하여 태호와의 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공을 세워 자작의 작위를 얻었습니다. 그 뒤 전투 중 부상을 입어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요이반 방역부대로 전출이 되었습니다.”
삼호장경은 이제는 외워 버린 조창의경에 대한 이력을 줄줄이 열거했다.
“그곳에서 사적으로 물자를 빼돌리고 공금을 유용하던 전 방역부대장의 행태를 북진 사령부에 고변했다가 오히려 상관모독죄와 무고죄로 몰려 영창에 갔습니다. 영창을 나와서도 부대의 장교들과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켜 문제가 많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상관과 동료 장교들의 신임은 받지 못하고 있지만 강직한 성품과 대쪽같은 성격으로 부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혈산매정으로 하여금 은밀하게 요이반 방역부대의 감찰을 지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북진 사령부의 장교들과 연관된 방역부대장의 수많은 비리가 밝혀졌다.
그 일로 인해 수많은 장교들과 방역부대장이 최전선으로 좌천되었다. 게다가 원래 북진 사령부 산하였던 방역부대의 소속을 대선 총독부 직속으로 이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게 다 조창의경 자작의 공인 것이다.
사실 이때만 하여도 방역부대는 말 그대로 북진 사령부 소속 병사들의 질병에 관한 예방과 치료 연구만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대선 총독부 산하로 이전되면서 그 목적이 크게 변질되었다.
“그 빌어먹을 부대장 놈!”
혈산매정이 눈이 꿈틀거렸다.
더불어 눈동자의 붉은 기도 짙어졌다. 그가 매우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사실 요이반 방역부대장은 혈산매정이 막대한 자금과 공을 들여 은밀하게 포섭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 자금을 횡령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막 밑그림이 그려진 계획을 시작도 하지 못하고 수포로 만든 것이다. 물론 조창의경으로 인해 방역부대를 총독부 소속으로 이전하여 전화위복이 되긴 하였지만 말이다.
분노한 혈산매정은 방역부대장을 북진 사령관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으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자객을 보내 암살해 버렸다.
그 후임으로 백작 위가 맡아야 하는 방역부대장 직을 삼호장경 후작의 천거를 받은 조창의경 자작에게 맡긴 것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조창의경의 성격이 너무 강직하다는 것이다.
비밀스러운 일을 추진하는 방역부대를 책임진 조창의경의 강직함은 자칫하다가는 양날의 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형제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합니다.”
혈산매정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의 눈빛을 보내왔다.
삼호장경은 서둘러 뒷말을 이었다.
“아마 조창의경이 서자 출신이란 것이 문제가 되는 모양입니다.”
“서자?”
“그렇습니다.”
“서자 출신이라…… 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군.”
혈산매정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서자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군.”
“그런 이유로 조창의경은 본국보다는 이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군.”
혈산매정도 후처의 소생, 즉 서자 출신이다. 그리고 기형아라는 이유로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기어코 살아남아서 성장한 그는 조창의경과는 달리 적자는 물론이고, 혈산의 성을 가진 자들을 모두 죽여 없앤 뒤 가문을 차지했다.
“북진 사령부와도 관계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방역부대장는 백작 급이 맡아야 하는데…… 이참에 조창의경의 작위를 백작으로 승작해 주는 건 어떤가?”
“각하, 본국에 알려지면 입만 산 귀족들에게 성토할 빌미를 안겨 줄 수가 있습니다. 승작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조창의경을 격려함이 옳을 줄 압니다.”
공식적인 귀족의 서품과 승작은 오로지 황제의 특권.
그렇다고 공작인 혈산매정이 서품과 승작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혈산매정 가문에 속한 가신들에게는 임의대로 서품과 승작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황제에게 서품받고 작위를 받은 귀족에 비해 권한과 격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정통적인 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