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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제9장 총독의 야망
문 옆에 걸려 있는 유등의 작은 불꽃이 어둠의 침식을 막아 내고 있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아무런 장식이나 치장 하나 없는 곳.
썰렁하기 짝이 없는 공간의 한쪽 벽에는 낡은 침대에 놓여 있었고, 그 위로 마루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누구의 손길이 닿았는지 그의 얼굴은 깨끗했다. 그러나 파리한 안색은 마치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듯 별로 좋지가 않았다.
어느 순간, 마루의 눈이 뜨여졌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시야에는 사물이 제대로 담겨지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그제야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곳이다.
몸을 움직여 봤지만 우측 어깨를 제외하고는 그리 불편한 곳은 없다.
무거운 머리와 둔통이 느껴지는 어깨.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하자마자 다시 학살의 참상이 머릿속에 선하게 떠올랐다.
“큭!”
마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난무하던 핏줄기는 더욱 선명하게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앳된 얼굴의 소녀가 애타게 부르짖는 외침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빨간 머리 아이의 눈이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한다. 너무 작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자 아이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이명처럼 아이의 속삭임이 머릿속을 헤집고 울렸다.
‘아파! 아파! 아파!’
머리가 깨질 듯했다.
소녀의 고통스러운 속삭임이 머릿속을 헤집는 듯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일었다.
마루는 머리를 쥐어 잡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 바람에 벌거벗은 상체의 앙상한 뼈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으흐흐흐…….”
끼익!
마루의 몸부림에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침대가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나무 침대가 석판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음을 내었다.
덜커덕! 덜컥!
그때, 정면의 문이 열렸다.
명화가 황급히 다가와 몸부림치는 마루의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마루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그녀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안심해요. 마루 님을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는지 마루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명화는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마루를 진정시켰다. 그 모습이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 자상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지켜 줄게요.”
명화의 그런 행동은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했다. 마루는 발작을 멈추는 듯하다가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명화는 가슴에 안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곧 침대에 눕혀 주었다.
마루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루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인하여 머리카락이 온통 달라붙어 있어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그런 마루의 얼굴을 정돈해 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고, 손수건으로 땀과 눈물을 닦아 내었다. 가슴에 맺힌 땀을 닦고서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들어 그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도 명화는 한참 동안 마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마루의 얼굴은 발작에 의해서인지 발그레했다. 그의 숨소리가 잦아들자 명화는 모포를 마루의 목까지 끌어당기고 가슴을 토닥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 선 그녀가 다시 한 번 마루를 돌아보았다.
*
*
*
왕도 금미달의 공기는 스산했다.
바로 어제, 신전 앞에서 저항군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에 중보병이 진압을 하면서 수천 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평일 대낮인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혼잡해야 할 거리에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거리에는 살기가 번뜩이는 경비대는 물론이고, 헌병대들이 곳곳마다 진을 치고 검문검색이 한창이었다.
이럴 때 운이 나쁜 사람은 경비대나 헌병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해 병신이 되어 나올 수도 있다.
남자들은 대부분 집에 처박혀 거리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간간이 늙은 여인들만이 필요한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오가는 게 눈에 뜨였다.
한가람 제과점이라 하여 이번 사태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제과점은 문을 닫아걸은 채 주문받은 빵만을 배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가에 빵을 배달하는 직원들도 몇 번이나 검문에 걸리긴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폭동에도 경비대와 헌병대는 귀족들만큼은 건들지 않았다.
귀족들은 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고, 나파의 황제를 받들며 날마다 나파의 신상에 참배를 한다.
자신의 뿌리인 유일신을 부정하는 귀족들의 행동이야말로 그들의 정신력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나파의 정책에 맞아떨어지는 일이어서 총독부는 이러한 친나파 귀족들을 매우 우대했다.
“주인님은 뭐라셔?”
배가 볼록한 공장장이 이층에서 내려오는 유선애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유선애의 얼굴은 온통 울상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그녀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염려할 거 없다고 하시는데…… 그게 좀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공장장이 의아해했다.
“어제 주인님에게 지배인님이 신전에 가셔서 소식이 없다고 하자 언제 나갔는지 꼬치꼬치 물어보고는 놀란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가셨거든요. 그리고 한참 있다 들어오실 때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셨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저 염려할 것 없다고만 하시네요.”
“주인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어디 심부름을 보내셨다면 어제 그렇게 놀란 얼굴로 나가시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듣고 보니 그렇네.”
공장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유선애가 불안하다는 듯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아 쥐었다.
“선애야, 이상하긴 하지만 주인님이 염려 말라고 했으니 지배인님은 별일 없을 거야. 설마 주인님이 선애를 속이겠어?”
“주인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그녀의 머리가 좌우로 돌아갔다. 그 바람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좌우로 요동을 쳤다. 그 모습이 마치 불안한 그녀 마음과도 같았다.
“그럼 기다려 봐. 기다리다 보면 지배인님이 오실 거야.”
“네…….”
그녀의 음성은 힘이 없었다.
“에구, 한시름 덜었다. 어서 공장 식구들에게 알려 줘야지.”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인 공장장이 몸을 돌렸다. 뛰듯이 걷는 그의 엉덩이가 뒤뚱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공장장의 그런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입가를 가리고 웃었을 유선애의 얼굴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사람이 수도 없이 죽었다는데, 그 속에 지배인님이 포함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무서운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녀의 가슴은 오그라들다 못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이 말하지만 않았다면 지배인님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와 눈물로 솟구쳤다.
다행히 주인님이 아무 일 없을 거라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를 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루의 외박도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불안한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지배인님, 제발 아무 일 없이 돌아와 주세요.’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 말라 버린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하얀 얼굴의 눈 밑에 자잘한 주근깨가 이내 눈물에 적셔졌다.
유선애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신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선을 가호하시는 주신이시여, 불쌍한 우리를 굽어 살펴 주소서! 지배인님이 아무런 탈이 없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그녀의 마음속에 울리는 간절한 염원이 신전 안의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증거하지 않은 신에게 엎드려 빌고 있었다.
*
*
*
나파의 대선 점령군은 본격적인 식민 통치와 강제 수탈을 단행하기 위하여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총독부의 설치는 대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시발점이다.
총독부는 제 입맛대로 친나파인을 중용하여 대선의 사법, 행정, 군대를 장악하고 해체하여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으로 재결성했다.
총독부의 관리 역시 하급 관리는 대선인으로 하여금 업무를 시키고 중요한 관직은 모두 나파인과 친나파인으로 구성하여 대선에 대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국왕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해 왕궁에 감금되어 감시를 받았다.
그에 따라 대선의 전국에서 저항군들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들은 조직적이고 과감한 행동으로 나파의 주요 인사들과 친나파인인 매국노들을 암살하고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사실 저항군의 등장 시기도 총독부의 설치와 때를 같이했다.
현 대선 총독부의 총독은 황제와 함께 나파를 일통시킨 위업을 달성한 혈산매정 공작이었다.
혈산매정이 총독부로 가기 위하여 자택을 나온 시간은 막 여명이 틀 무렵이었다.
노인이라고 불리기엔 억울한 나이라고 생각하는 혈산매정이 새벽잠이 없다는 사실은 총독부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덕분에 총독부의 직원들은 밥도 먹지 못하고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청색 두장의를 입고 손에는 법장을 든 네 명의 술법사가 잠시도 쉬지 않고 번갈아 가며 술법으로 대기의 유동을 확인했다.
삼엄한 기세로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 행렬은 혈산매정의 출근 행렬이다.
혈산매정은 흉갑을 착용한 기사와 중장기병, 그리고 경보병을 합해 200여 명이 넘는 대규모 호위를 받았다.
그런 혈산매정은 지금 팔두마차의 침대와도 같은 푹신한 좌석에 등을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북쪽의 일은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얀머리를 꼬아 보기 좋게 어깨 위에 늘어뜨린 그의 얼굴은 유난히 하얗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병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 그에 비해 입술은 여인의 것처럼 가늘고 붉었다.
게다가 그는 보통 사람의 두 배에 달하는 거대한 체격을 소유했다. 어찌 보면 엄청난 비만 체형이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이 비대한 체격을 가진 인물이 사상 처음으로 법검사라는 명칭을 소유한 인물이라는 것을.
법검사는 술법을 펼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검도 익힌 사람에게 붙이는 명칭이다. 단지 술법과 검을 익혔다고 해서 붙이는 명칭이 아닌 만큼 그 실력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혈산매정은 완성된 검이자 지계의 하급 술법사인 것.
한마디로 말해 혈산매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녹평에 군사를 지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혈산매정은 대선 지배에 대한 정책을 확고하게 마무리하고, 대내외적으로 이 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북방의 노아 제국과 초원의 녹평 왕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대선의 북서쪽 국가이며 노아 제국 남쪽 국가인 태호 제국을 점령하여 분할하자는 비밀문서를 몰래 주고받았다.
처음부터 나파는 태호 제국까지 점령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대선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태호 제국의 남부 일부분을 점령하여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