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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나파군에 대한 증오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교차되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기력함이었다.
아이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내 할 일만 잘하면 세상도 잘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했다.
개인이 맡은바 일만 잘해 낸다면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우습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동안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던 삶이 실은 현실을 외면하는 극도의 이기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감정을 나누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재미없고, 얼마나 메마른 삶이란 말인가.
참으로 쓸쓸한 삶이다.
고개만 돌리면 죽음보다 더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자신은 그저 빵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과연 가족이 그러한 처지에 처했다면 빵만을 만들고 있을 수 있겠는가.
조국이라는 이름이 자신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국민들은 왜 미련하게도 조국이라는 이름의 그늘을 애타게 갈구하는지도…….
나라와 왕이 국민들에게 해 준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멍청한 왕은 왕궁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감금당하고 감시당하며 산다.
그런 왕을 의지해서 어떡하겠다는 말인가.
그까짓 나라야 없어도 그만 아닌가.
조국이 싫다.
국민들도 싫다.
자신은 더욱 싫다.
마루는 지금 이 순간 스스로가 더없이 싫었다.
아직 채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어린 생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걸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봐야만 했던 자신의 못난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마루는 얼굴을 양 무릎 사이로 더욱 깊게 집어넣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얼만 전만 하여도 잘 정돈하여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산발된 채 그의 손가락 안에서 뜯겨져 나왔다.
철그럭! 철그럭!
대리석에 부딪쳐 울리는 차가운 금속성은 분노와 자책감으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치닫던 마루의 감정에 분노라는 불티를 던졌다.
금속성의 마찰 소리가 점점 귀에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놈인가?”
“맞는 것 같은데.”
“흐흐흐, 좀 전의 용기는 어디 가고 겁에 질린 모습인가?”
“이놈, 상태가 영 아닌데?”
“뭐, 어차피 죽을 놈인데 상관있나.”
두 명의 중보병이 피에 젖은 도끼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대선 놈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왜 설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미개한 족속이라서 그래.”
“위대한 대나파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신민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감사하게 여기고 얌전히 살아갈 일이지, 미개한 족속들이 감히 반기를 들려 하다니!”
“이놈도 반란군일까?”
“우리에게 죽는 이상 무조건 반란군이야. 안 그래?”
“그러면 생포해야 되잖아.”
“죽여 놓고 반란군이라 보고하자. 그러는 게 포상까지는 무리라 하더라도 나중에 배급이라도 잘 나올 것 아냐?”
“그러는 게 낫겠지?”
“그럼!”
마루가 고개를 드니 두 명의 중보병이 보였다.
마루는 천천히 일어났다.
중보병이 도끼창을 내밀고 견제했다.
투구에 가려진 중보병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통해 마루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을 맞댄 두 중보병의 마루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전신을 철갑으로 무장한 중보병의 몸은 피로 흠뻑 물들어 있었고, 철갑의 여기저기에는 핏덩어리가 굳어 가는 중이었다.
“이 죽일 놈들!”
분노한 마루는 우측 중보병이 내민 도끼창을 잡아채는 동시에 그것으로 좌측 중보병의 도끼창을 걷어 올렸다.
챙!
“이놈이!”
“헉!”
도끼창을 잡아채는 바람에 딸려 온 우측 중보병의 목을 감아 쥔 마루는 그의 허리에서 패도를 뽑아 목을 그었다.
“크윽!”
중보병의 목이 반쯤 잘려지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이놈!”
놀란 다른 중보병이 황급히 창을 돌렸으나 그보다 마루의 패도가 더 빨랐다.
마루는 가로로 뚫린 중보병의 눈구멍에 패도를 박아 넣었다.
“커억!”
그때,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중보병들이 들어왔다.
마루는 죽은 중보병의 도끼창을 집어 들어 달려드는 중보병들을 향해 던졌다. 전력으로 던진 도끼창이 맨 앞에서 달려들던 중보병의 몸에 박혔다.
“크허억!”
거침없이 철갑을 관통한 힘에 놀란 중보병들이 멈칫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모두 흩어져라!”
마루가 다시 도끼창을 집어 들자 중보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 한 번 도끼창이 날아가고 한 명의 중보병이 산적처럼 꿰였다.
“흐억!”
중보병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꿰뚫은 도끼창을 보면서 쓰러졌다.
이젠 더 이상 날아올 창이 없음을 안 20여 명의 중보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놈은 분명 반란군이다!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마루는 쓰러져 있는 중보병의 허리에서 패도를 빼 들어 좌수로 들었다. 이제 그의 양손에는 패도가 들려 있었다.
“너희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외침과 함께 마루가 중보병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도끼창이 그의 몸을 쑤실 듯 찔러져 왔다. 순간, 마루가 도끼창을 밟고 펄쩍 뛰어올랐다. 패도가 그어지고 양쪽의 중보병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으악!”
“크어억!”
철갑을 어렵지 않게 가르는 실력에 놀란 중보병의 지휘관이 소리쳐 경고했다.
“놈은 기검사다! 접근을 허용하지 마라!”
그러나 마루는 이미 중보병 사이를 휘젓고 있는 중이었다.
“으악!”
비명이 신전의 회랑에 공명되어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계속하여 중보병 사이를 파고든 마루의 패검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중보병의 눈을 찌르고 철갑을 갈랐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오며 중보병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마루가 중보병 병사들 틈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을 때는 이미 여섯 명의 중보병이 쓰러진 뒤였다.
마루는 몸을 돌려 다시 중보병들의 뒤로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육중한 몸을 돌리지 못한 상태였다.
확실히 중보병은 움직임이 둔했고, 기동력은 제로였다.
마루가 보기엔 그랬지만, 실제 중보병들의 행동은 민첩했다.
마루가 워낙 빠르게 움직여 상대적으로 느리게 보일 뿐이었다.
까앙!
맨 뒤에 있는 중보병의 목이 날아가고 이어 가까이 있는 중보병의 턱에 패도가 파고들었다.
그때, 중보병들의 뒤로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크윽!”
철커덩!
한 명의 중보병을 시작으로 대여섯의 중보병들이 한순간에 주저앉았다. 일부 중보병들이 몸을 돌리면서 도끼창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낯선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을 들고 투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놀랄 법도 하련만 중보병들의 대응은 철갑을 착용한 무거운 몸에도 불구하고 신속했다.
전장에서 다져진 반사적인 행동.
주저앉은 중보병들의 옆구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전신을 철갑으로 무장한 중보병의 취약한 부분 중 하나다.
뒤에서 중보병들을 공격을 이들은 30대의 핸섬한 얼굴을 가진 사내, 조경하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알 것 없다!”
조경하는 검을 들어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도끼창을 비껴 막았다.
챙!
검이 튕겨졌다.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조경하에게 긴 도끼창이 상체를 노리고 찔러 왔다.
조경하는 밀리는 척하면서 찔러 오는 도끼창을 타고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중보병이 움찔거리며 급히 도끼창을 회수하려 했지만, 조경하의 검은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중보병의 눈앞으로 급격하게 검이 확대되었다.
푹!
중보병의 눈에 검이 깊숙이 박히며 뇌까지 파고들자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끄륵!
중보병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무너지는 바람에 검이 저절로 빠져나왔다.
중보병의 눈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조경하와 그의 동료들의 가세로 이제 앞뒤로 공격을 받는 형세가 된 중보병들은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마루는 상황이 어찌 되었든 중보병들을 맹렬하게 몰아치며 공격했다.
양손에 들린 패도가 움직일 때마다 쇠가 갈리는 소음과 함께 중보병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조경하가 기습하면서 수를 줄인 탓인지, 그리 오래지 않아 서 있는 중보병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쓰러뜨릴 적이 없다는 걸 인식했는지 마루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마치 할 일을 마친 꼭두각시 인형처럼.
태엽이 다 풀린 장난감처럼.
“이봐, 내가 누군지 알겠나?”
조경하가 다가와 멍해 있는 마루의 몸을 흔들었다. 그가 보기에 마루는 완전히 겁을 질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루는 초점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알 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현재 마루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멀어지는 의식이 사내의 얼굴을 가물거리게 했다.
머리의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뜨거움은 곧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변했다. 고통은 일순간에 머릿속을 헤집고 온몸으로 불길처럼 번져 갔다.
곧 입을 통해 고통스런 외침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아!”
“이봐, 정신 차려!”
별안간 대리석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를 쥐어뜯고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지르던 마루의 사지가 뒤틀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비명은 신전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
조경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마루를 짜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곧 미친 듯이 온몸을 떨어대는 마루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다.
단순하게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 것이다.
비록 온몸이 피에 젖어 범벅이 되었지만,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피부에 반점이 없는 걸로 보아 약물이나 독에 중독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발작이란 말인가.
그때, 나이가 지긋한 대원 중 하나가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마루의 머리를 받쳤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간질성 발작으로 보이는군요.”
간질성 발작은 치료약도 없고, 죽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발작을 하는 병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루를 바라보는 조경하의 시선이 비웃음에서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마루의 발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발작을 끝낸 마루의 사지가 죽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의 손과 바닥에는 발작하는 와중에 스스로 뽑아 낸 머리카락이 널려 있었다.
조경하는 대원들을 시켜 마루를 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