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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마루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파군의 1,000여 중보병은 5,00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 있는 신전 앞 계단을 포위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경비대가 아니잖아?”
“왜 중보병이 우리를?”
“엄마, 무서워!”
꼬마 아이가 어른들의 불안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울먹거리면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마루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을 감지했다.
중보병이 시민들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마루는 붉은 머리를 두 갈래로 곱게 땋은 꼬마 아이를 보았다.
꼬마 아이가 무서운 마음이 들었는지 엄마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지며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왕도의 치안을 맡고 있는 경비대만 해도 일반 시민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중보병이라니!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감으로 점점 굳어져 가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중보병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눈을 제외한 얼굴 전부를 가리고 있어 그들의 표정이 어떠한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시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가중되었다.
신전 앞은 1,000여 중보병과 시민들 5,000여 명이 자리해 있음에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막았다.
그 순간, 중보병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은색의 투구에 수실이 달려 있는, 중보병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였다.
그자의 철갑은 중보병과는 달랐다.
마치 사람의 가슴과 아랫배의 근육을 형상화한, 기사들만 착용하는 흉갑이다.
“나파 제국의 신민으로 남고자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웅성웅성.
외침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모두 고개를 내젓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신민은 아무도 없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을 전부 제국에 반하는 반란군과 동조한 폭도들이라 판단하겠다!”
그 순간, 마루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렸다. 그는 이 자리를 어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루는 사람들에게 밀려 어느새 계단의 맨 위에 있었다. 시민들의 가장 뒤쪽.
“여기요, 여기!”
나파인인지, 아니면 나파인으로 살고 싶은 대선의 사람인지 모를 사내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위기 상태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사람의 반응이지만, 그 사람의 행동은 위기의식을 느낀 군중들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난 제국의 신민이오!”
“나도!”
곧 여러 사람이 허둥지둥 나서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여기에 나파인은 없다! 우리는 대선인이다!”
앳된 여자의 음성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대선인이다!”
뜨거운 감정이 실린 격정적인 목소리였다.
“우리는 영원한 대선인이다!”
몇 명의 사람들이 여자의 선창을 따라 했다. 앞으로 나서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멈추어 섰다.
“우리는 영원한 대선인이다!”
감정은 순식간에 전파가 되었다.
군중들은 이내 한목소리를 내었다.
음성도 한층 격해졌다.
마루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손을 들어 외치는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긴 빨간 머리 아이가 치켜드는 고사리 같은 손을 보았다.
엄마를 따라 하는 그 행동에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눈은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즐거운 놀이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재밌어 하는 아이의 웃음과는 반대로 마루의 불안감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군중들이 외치는 함성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점차 그 열기에 동조하고 일체된 격정적인 흥분감은 그의 내심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살기 위해서 나파인이라고 외치고 앞으로 나서던 사내들은 제자리에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격정의 일체감이 어느새 그들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마루는 아직도 조국이라는 의미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이한 열기는 그런 그마저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단순한 집단행동에 휩쓸리는 군중심리가 아니었다. 저 밑바닥에서 억눌렸던 감정들이 막힌 곳을 빠져나와서 터지는 분노의 함성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대선인이다!”
5,000여 명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다시 앳된 여자가 선창을 했다.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신다!”
마루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대각선으로 계단의 중간쯤.
평범한 얼굴의 젊은 처녀.
하지만 처녀의 양 볼은 흥분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
마루는 찰나지간에 그녀의 얼굴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파군은 물러가라!”
처녀의 주먹 쥔 작은 손이 하늘을 가리켰다.
“나파군은 물러가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부대! 앞에 창!”
그 순간, 중보병들이 일제히 세워 두었던 도끼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보기에도 살벌한 도끼창이 시민들을 향했다.
잘 훈련된 듯 그들의 행동은 한 치의 망설임이나 오차가 없었다.
전신을 철판으로 감싼 철인 같은 그들의 행동은 사람의 행동이라 여겨지지가 않았다.
그 거칠고 일사불란의 행동이 사람들의 달아오른 감정을 순식간에 진화시키고 침묵을 가져왔다.
“부대, 공격 앞으로!”
민간인을 향해 제압하라는 명령도 아닌 공격 명령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다 죽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아악!”
맨 처음 무리에서 빠져나가 제국의 신민이라 말하던 사내 중 하나가 도끼창에 몸이 뚫리며 비명을 질렀다.
최초의 비명은 학살의 전주곡이었다.
“악!”
“크악!”
“엄마!”
사람의 몸은 너무나 허약했다.
단단하고 차가운 도끼창에 의해 두부처럼 쉽게 구멍이 뚫려지고 몸 안의 내용물이 콸콸 쏟아졌다.
“이 미친놈들! 우리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 악마 같은 놈들!”
“모두 피해라!”
가장 성스럽고 경건해야 할 신전의 앞에서는 신의 모습을 한 인간의 절규가 난무하고 뜨거운 피와 죽음이 뿌려졌다.
괴수 퇴치를 할 때도 이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도륙이고, 학살이었다.
순간, 마루의 눈앞이 빨갛게 변했다. 아니, 세상이 빨갛게 채색되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붉었다.
도끼창을 쑤시는 나파의 중보병도, 그 도끼창에 몸통이 꿰뚫리는 처녀의 몸도 모두 빨갛다.
마루는 손을 내저었다.
이 모든 것을 막고만 싶었다.
“안 돼!”
처녀가 마루를 바라보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이 처연하고 안타깝다.
처녀가 입을 벌리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처녀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사람들이 중보병들을 피해 움직이면서 마루의 몸을 거칠게 밀쳤다. 처녀의 죽음에 정신이 팔린 마루는 힘없이 넘어져 바닥에 부딪쳤다. 팔꿈치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충격이 왔다.
그제야 마루는 정신이 확 들었다.
“으악!”
“사람 살려!”
빨간 머리 소녀의 작은 몸이 도끼창에 꽂힌 채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하얀 대리석 계단 위로 붉은 피가 빗물처럼 뿌려지고 흩어졌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기운이 의식을 지배했다.
마루는 무작정 앞으로 돌진하며 중보병을 어깨로 받았다.
쾅!
중보병이 계단 밑으로 굴렀다. 그는 넘어지고 구르면서 다른 중보병들을 덮쳤다.
마루는 도끼창에 꽂힌 아이의 몸을 빼 품에 안고는 정신없이 계단을 올랐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살려 줘!”
사람들은 누구에게 애원하는 것인지 모를 비명성을 토해 내며 악을 쓰고 피눈물을 쏟았다.
마루는 신전 안을 향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 뒤로 처절한 비명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신전을 둘러싼 회랑은 길었다.
다다닥!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대리석을 울리며 회랑 사이를 떠돌았다.
중보병은 대인 공격에 대해서는 막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무거운 철갑으로 인해서 기동성은 무척 취약하다.
그런 탓에 아직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루는 달리면서도 좌우를 살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제를 찾기 위함이었다.
마루는 회랑에서 벗어나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은 밖의 처참한 살육에도 불구하고 어두웠고 무겁게 조용했다.
현재 신전은 관리하는 사람들 말고는 사제는 한 명도 없었다. 나파의 탄압으로 인하여 대선의 주신을 섬기는 사제는 모두 처형되고. 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지경인데도 신은 여전히 증거하지도 않고, 만 년을 모신 신도들을 외면했다. 이제 신의 존재 자체도 부정받을 정도였다.
신전에는 신이 없다.
옷이 축축했다.
마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도 없어! 아이가 죽어 간단 말이야!”
마루는 무엇을 하든지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반드시 준비를 했다. 착오와 실수가 없는 한,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결과를 보면서 항상 만족해 왔다.
“제발, 누구 좀 나와 보란 말이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기력하긴 처음이었다.
“아무나 나와 보란 말이야!”
목청이 터져야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그의 의지를 벗어나는 상황이었다.
“씨팔! 신이든 뭐든 나오란 말이야!”
품에 안긴 아이의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아이의 가슴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핏물이 흘러나왔다.
“아직 세상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인데…….”
대리석 바닥에 고인 피가 너무도 차갑게 느껴졌다.
세상은 차가웠다.
그 세상에 사는 인간들도 차갑다.
신은 더욱 차갑다.
그때, 신도들을 위해서 커다란 돌을 파내고 성수를 담아 놓은 성반이 마루의 눈에 띄었다.
사제가 축성한 성수는 세례식을 거행할 때나 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신전을 방문한 신도들의 얼굴에 바르며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물이다.
누가 성수를 바르고 축복을 받았는지,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마루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의 축복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아이는 머리카락만 빨간색이 아니었다. 이제는 온몸이 빨갛게 된 아이의 몸을 성반에 넣었다.
하지만 성수는 아이의 피를 정화시키지 못했다.
성반 속의 성수는 이내 빨간 성수가 되었다.
그 위로 마루의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은 핏물이 된 성수 속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