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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이, 이럴 수가…….”
놀란 이지구가 바라보자 마루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한다면 검술로만 상대해 줄 수도 있습니다.”
이지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없지만…… 부탁하오.”
어차피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검술로라도 이겨 보고자 하는 열망이 피어났다.
마루의 검에서 진기가 사라지자 이지구는 다시 검을 찔러 갔다.
마루가 슬쩍 몸을 움직이며 안에서 바깥쪽으로 검을 쳐 냈다. 이지구는 다시금 휘청거렸고, 그 틈을 타 마루의 검이 그의 어깨에 대어졌다.
뭐 어떻게 해 볼 틈이 없었다.
“허허허…….”
이지구는 그제야 깨달았다.
기검사는 단지 병기의 우위라는 개념이 아님을 말이다.
진기를 느끼는 것과 운용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검사와 기검사의 차이는 그렇듯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기검사를 상대해 적어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이 얼마나 헛된 오만이었던가.
검을 늘어뜨린 이지구는 마루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마루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지구의 시선이 다시 남조문웅에게 향했다.
“이런 말…… 늦었다는 것은 알지만, 일깨워 줘서 감사하오.”
이지구가 무릎을 꿇었다.
“늦게나마 깨달아서 다행이네.”
나머지 기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부디 원하는 것을 이루시기를…….”
이지구는 날카로운 검첨을 목에 대었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네.”
“대선 만세!”
숙여진 이지구의 목을 뚫고 검첨이 피를 머금고 빠져나왔다.
“대선 만세!”
다섯 명의 기사의 목 뒤에도 피를 머금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생명을 잃은 팔들이 이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마루, 죽은 자들의 시신을 모아라.”
남조문웅의 말에 마루는 죽은 기사들을 마차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사이 남조문웅은 궁본병무의 목을 베었다.
잠시 후, 검은색 두장의를 눌러쓴 술법사가 나타나더니 뒤집혀진 마차를 향해 초열화탄을 쏘았다. 위력을 줄인 듯 터지지 않은 초열화탄을 맞은 마차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마차가 맹렬하게 타오르자 남조문웅과 마루, 그리고 술법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불길은 점점 거세어졌다.
마차의 뒤를 쫓아 정신없이 달려온 궁본병무의 사병들이 목격한 것은 화살을 맞아 죽어있는 말들과 불타는 마차, 그리고 목에 검이 박힌 기사들과 목이 잘려진 궁본병무의 비대한 몸통뿐이었다.


제8장 광장의 학살



왕도 금미달의 신전 앞 중앙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즐기기 위하여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한가람 제과점은 신전의 옆과 중앙 광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루는 근래 새로 개발한 저온 숙성 빵이 많은 호응을 얻자 제과점에서 만드는 모든 빵과 과자에 저온 숙성 방식을 적용했다.
신선도면에서도 저온 숙성 빵이 더 오래 보존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맛이 좋았다.
이것은 이제 마루가 원하는 것이 아닌, 빵을 사 먹는 사람들인 소비자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 되었다.
마루는 오늘 하루도 납품한 곳에 들어간 과자와 빵의 수요를 바쁘게 살펴보고 있었다.
“지배인님, 차 드세요.”
“고마워, 선애.”
찻잔을 내려놓는 유선애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마음에 색깔이 깃든다면 아마도 붉어진 얼굴색과 같을 것이라고 마루는 생각했다.
마루가 그윽하게 웃음을 짓자 유선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근래의 유선애는 마루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중을 들고 있노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아늑한 감정을 느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마치 마루와 부부가 된 듯한 상상을 하곤 했다.
지금처럼 자신이 탄 차를 마시는 것만 보아도 마냥 행복하고 기뻤다.
마루가 맛있다고 치하를 하고, 그윽한 웃음을 지어 줄 때면 그녀의 마음은 세상 그 어느 여자보다 행복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루가 신경 쓰지 않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제과점의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제과점에서 손님을 맞는 아가씨는 모두 세 명이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마루의 시중은 모두 유선애가 도맡아서 한다.
마루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평온한 일상이었다.
송석대와 연관되지 않았다면 소소한 즐거움이라 생각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송석대를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이 부담스럽고 미안하기만 했다.
언제 시간을 내 두 사람을 정식으로 대면시켜 줘야 되겠다고 마루는 생각했다.
그렇게 느긋한 생각에 빠져 있던 중 불현듯 밖이 시끄러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장의 한쪽에서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고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 생겼나?”
마루의 물음에 유선애도 광장을 내다보았다.
“지배인님,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유선애는 마루가 말리기도 전에 문을 열고 광장으로 뛰어갔다.
“저런!”
풍성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뛰는 유선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루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루는 다시금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매출 장부에 시선을 주었다.
사실 그는 차를 그다지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선애의 정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당분간 차를 삼가야 되겠군.”
마루는 유선애같이 순수하고 착한 처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비록 거칠게는 굴지만 잔정이 많은 송석대라면 분명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것이다.
“지배인님! 지배인님!”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헐레벌떡 들어오는 유선애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왜 그래?”
걱정스런 마음에 마루가 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행여나 경비대원에게 봉변을 당하고 쫓겨 온 것은 아닌가 해서였다. 그러나 한가람 제과점에서 일하는 사람은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봉변을 당한 적이 없었다.
“저, 저기…… 광장 신전 외벽에 사, 사람…… 이 있어요!”
외벽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 젊은 처녀를 이렇게 놀라게 할 일이었던가?
식민지 이전만 해도 신전의 외벽에는 신의 계시를 받는 사도의 모습과 성인들의 숭고한 모습들이 부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의 침탈과 함께 대선의 국교는 물론이고, 신의 존재도 부정되고 말살되었다.
지금의 신전 외벽은 멋들어지게 부조된 조각이 깎이고 파헤쳐져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한데 그 외벽에 사람이 있다니, 무슨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선애야, 진정하고 자세히 말해 봐.”
“지, 지배인님…….”
유선애는 한껏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마루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사, 사람의 목이…….”
“사람의 목?”
유선애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의 눈에서 이윽고 눈물이 쏟아졌다.
“선애야, 일단 여기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어.”
마루가 얼른 안쪽으로 들어가 물을 한 잔 가지고 나왔다.
“자, 물을 마시면 한결 진정이 될 거야.”
“네.”
“내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 테니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알겠지?”
“네.”
“눈물 닦고.”
“네.”
마루는 유선애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웃음을 보여 주었다. 마루는 자신의 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밖으로 나갔다.

아침인 데도 불구하고 신전 광장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신전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12개로 이루어진 신전의 기둥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오른쪽 기둥의 끝에 붙어 있는 외벽에 검게 쓰여진 듯한 글자와 점 같은 물체도 확대되었다.
뛰어가던 마루의 심장의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신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폭이 30미터나 되는 대리석 계단 50여 개를 올라가야 한다. 지금 그 계단에는 성스러운 신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마루도 계단 아래에 섰다.
가까이 다가와 보니 검게 보였던 글자는 빨간 글씨였고, 점 같은 검은 물체는 사람의 머리였다.
빨간 글자가 무엇으로 쓰여 졌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내용이 더 충격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여기 나파의 주구이자 매국노인 여병무(궁본병무)를 처단하여 대선의 혼이 건재함을 알린다.
대선이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대선의 국민이여!
신의 가호가 함께할지어다.
대선이여, 영원하라!

“저항군이다!”
누군가가 비명처럼 짧게 소리를 질렀다.
“저항군이 아직도 건재해!”
또 다른 사람이 흥분한 음성으로 외쳤다.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의 수호신이 함께하신다!”
“대선이여, 영원하라!”
“신이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여기저기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오고 외침은 점점 커져 갔다.
“대선, 만세!”
“저항군, 만세!”
“만세! 만세! 만세!”
광장에 함성이 울렸다.
사람들의 가슴에도 울렸다.
‘아!’
남조문웅이 여병무의 목을 왜 가져오나 싶었다. 한데 이렇게 사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함성이 퍼지고 분위기는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마루는 은근히 불안했다.
경비대에서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함성을 듣고 있노라니 그의 심장에도 까닭 모를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슬픔에 복받쳐 끓어오르는 감정인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나 분노가 치미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군중들이 느끼는 감정과 점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군중들은 점점 더 불어났고, 군중 사이에 흐르는 기이한 열기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착착! 착착! 착착!
“나파군이다!”
마루는 위압감을 동반하는 듯 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나파군이다.
철갑을 입고 패도를 찼으며 도끼창을 든 중보병들이다.
‘중보병이 여기에 왜?’
전장에서나 투입되는 중보병이 시민들만 가득한 왕도 한복판에 등장했다.
치안 유지가 주목적인 경비대는 가벼운 가죽 옷인 경갑만 착용한다.
그에 반해 중보병은 무거운 금속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기 때문에 오로지 공격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허리엔 보조 무기로 패도를 차고 손에는 도끼창을 든다.
무거운 철제 갑옷으로 인해 기동성은 떨어지지만 밀집대형에서 나오는 위력은 대규모 집단전에 있어 상대를 압도하고 제압하기에 그만이다.
어찌 되었든 왕도 한복판인 이곳에 중무장의 중보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있을 장소도 아니었다.
마루는 물론이고, 모든 시민들이 의아해하는 한편, 불안스럽게 몰려오는 두려움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