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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그때 그를 받아 준 사람이 바로 궁본병무 백작이었고, 기사의 서임을 준 사람도 그였다. 그가 충성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자면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성을 바꾸어야 했다.
그 뒤, 마음 한편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나라의 근간인 국민을 위해 검을 뽑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검을 뽑았다.
기사의 덕목이 아닌, 이 나라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궁본병무는 국민의 고혈을 뜯어먹고 수탈과 탄압에 앞장을 서는 친나파인이자 매국노가 아닌가.
이지구의 갈등과 고뇌는 개명을 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이지구는 궁본병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기사로서 한 번 맺은 충성의 맹세는 자신이 죽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시겠지. 곧 죽어도 매국노이기 전에 기사라 하고 싶은가? 참으로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로군.”
“닥쳐라!”
이지구가 분노 어린 음성으로 남조문웅의 말을 끊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네가 진정한 기사라면 당연히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이야.”
“당신들이 뭐라 하든 나는 기사의 맹세를 지키고 있다. 나의 존재 가치는 주군을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이요, 그것이 내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라가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자네의 기사도 자체가 바로 매국의 행위임을 모르더란 말인가! 이렇게 매국노를 위해 살면서 그 잘난 기사도를 지키고 싶더란 말인가!”
“나라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이 내 기사도다.”
이지구는 더 이상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가다가는 그나마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기사로서의 신념마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갈등 속에서 고뇌하면서도 주군을 위해 죽는다는 그 하나의 맹세와 신념으로 버텨 왔다.
그러나 그 무슨 이유로도 피할 수 없는 게 있다.
만인에게 지탄받는 매국노를 위해 일하고, 그 자신도 매국노라는 것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사실 본인이 추구하는 기사도는 지켰지만, 그것을 위해 더 큰 것을 망각하고 있던 것이다.
“평안한 세상이었다면 훌륭한 기사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자네의 매국적인 기사도를 칭송하지 않을 것이네.”
“더 이상 말 같지 않은 소리로 희롱하려 들지 말고 검을 들어라!”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게. 죽기 전에 자네의 실수는 바로잡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듣기 싫다!”
“하긴, 자네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러하기에 자네는 더욱 용서를 받을 수가 없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그 기백이 아까워 자네와 수하 기사들이 대선의 기사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자, 선택해라!”
그러면서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듯 남조문웅이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검이 쭈욱 길어졌다.
“기, 기검!”
“허억!”
이지구는 물론이고, 다섯 기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검에 진기를 불어넣어 유형화하는 기검은 기검사가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경지다.
기검사는커녕 경검사 상급에 불과한 이지구와 다섯 기사에겐 그야말로 꿈에서조차 간절하게 염원하던 경지인 것이다.
하나 놀람은 잠시였다.
이지구는 오늘 이 자리를 살아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했다.
다섯 명의 기사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이지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지구는 남조문웅이 했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명예를 지켜 주는 고마운 제의였다.
이지구는 한참 동안 남조문웅을 응시했다.
그가 들고 있던 검끝이 점점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어차피 대적해 봐야 죽음은 피할 수가 없다.
차라리 수하 기사들의 몸에 꽂힌 화살이 처음부터 자신의 심장에 박혔더라면 이런 갈등도 하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신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하 기사들의 신념은 어쩌란 말인가.
그들이 가진 기사로서의 맹목적인 신념까지 몽땅 부정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배운 것은 기사로서의 충성과 명예였다. 그러나 충성은 하였다만 명예는 간 곳이 없다.
어쩌면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남조문웅의 말대로 시대 상황이 이리 혼란하지 않았다면 훌륭한 기사가 되었을까?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 같은 평민 검사는 시대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권력에 틈바구니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기사도를 꿈꾸는 한에는 말이다.
도대체 기사가 뭐고, 기사도가 뭐란 말인가.
“잠시…… 시간을 주시오.”
“여기를 벗어나지 않는 한 뜻대로 하시게.”
“고맙소.”
남조문웅이 뒤로 물러나자 이지구의 주위로 다섯 명의 기사가 다가왔다. 하나같이 모두들 몸에 화살을 장식처럼 달고 있다. 개중에는 심장 부위의 치명적인 부분에 맞은 기사도 있었고, 목숨과는 상관없는 팔다리에 맞은 기사도 있었다.
자신이 명령만 내린다면 부상과는 상관없이 용감하게 검을 들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지구는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모두 자신이 궁본병무에게 천거하여 기사의 서임을 받은 기사들이다.
명예를 아는 기사들이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아니, 아니다.
우리는 다 시대가 외면했다.
“결국…… 이렇게 끝을 보게 되는군.”
“아닙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항상 괴로웠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거지요.”
“후련합니다.”
목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난날의 대한 회의를 돌아보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들은 이런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비참한 최후를 말이다.
다섯 명의 기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지구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의도다.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제대로 된 기사로서의 죽음이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최후겠는가.
어쩌면 운이 좋아 이름없는 음유시인이 부르는 가락에 한 자락 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후세에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남은 가족이 얼마나 그 멍에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죽어서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지구는 침울해 있는 기사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 주었다.
마지막 인사다.
그리고 궁본병무가 누워 있는 마차 곁으로 다가갔다.
“소, 송산 경, 뒤따라오는 보병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모두 살 수 있을 것이네!”
궁본병무는 목 아래의 신경이 마비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귀는 멀쩡하다. 하여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들은 것이다.
“백작님, 늦었습니다.”
“소, 송산 경, 설마?”
궁본병무가 안면 근육을 꿈틀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백작님, 잘 알다시피 백작님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목숨이 열 개라도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송산 경, 제, 제발!”
궁본병무는 두려웠다.
순식간에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지구가 헝클어진 궁본병무의 머리칼을 이마 위로 반듯이 정리해 주었다.
“결코 백작님 혼자 보내드리지는 않습니다.”
“소, 송산 경, 이러지 말게!”
“저승길도 제가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궁본병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지구가 검을 들었다.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곧 뒤따라가지요.”
푹!
이지구의 검이 궁본병무의 목을 관통했다.
궁본병무는 일순간 성대가 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부릅뜬 그의 눈에 비친 모습은 자신을 찌른 이지구의 얼굴이 아니었다.
보석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부인이나 버릇없는 자식들도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에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별장의 저택에서 자신을 반기는 공녀의 어여쁜 모습이었다.
그가 평소에 꿈꾸던 염원이 죽음과 함께 눈앞을 가렸다.
이지구는 검을 빼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궁본병무의 눈을 가려 주었다.
이윽고 이지구를 비롯한 다섯 명의 기사가 남조문웅 앞에 나란히 섰다.
“염치없지만 몇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이지구는 경갑과 사슬 갑옷을 벗으며 말했다. 화살이 박혀 있어 쉽지가 않은지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말해 보게.”
“나는 상관없지만 기사들의 이름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간의 실수와 잘못된 행적을 덮어 달라는 뻔뻔한 태도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참으로 염치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남조문웅은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우리의 시신을 모두 태워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이번에도 남조문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삿된 욕심이지만 기검사와 겨루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남조문웅은 흔쾌히 수락했다.
검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
더구나 죽음을 앞둔 상황이니만큼 더욱 간절하리라.
남조문웅이 물러서며 뒤에 서 있던 두 명 중 키 큰 복면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검을 늘이고 서 있던 마루가 복면을 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마루라 합니다.”
“송산, 아니, 이지구요. 그대는 기검사요?”
“그렇습니다.”
마루가 검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검이 조금 길어졌다. 확실히 기검사가 맞았다.
“젊은 나이치고는 대단한 진전이오.”
“열심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검에만 매달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달리 들으면 그대가 매국의 주구로서 딴짓을 하는 동안 이룬 성과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이지구는 이내 결심을 했는지 검을 세웠다.
진기를 검에 운용할 수 있는 기검사 초급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병기의 우위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검술에 어느 정도 경지를 쌓지 않고 기검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이지구는 더욱 검술에 매진하여 나름대로는 기검사를 상대해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만큼 실력을 쌓았다.
기검사를 경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검술에 그만큼 자신이 있던 것이다.
이지구가 번개처럼 검을 내뻗자 마루가 가볍게 쳐 냈다.
챙!
“허헉!”
순간, 이지구는 몸을 휘청거렸다.
마루로서는 가볍게 쳐 낸 일검이지만 검에 부딪쳐 돌아오는 반발력이 마치 쇳덩어리에 맞은 것처럼 엄청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