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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백작님, 너무 빠릅니다. 병사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송산지구는 마차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알아서들 오겠지.”
“그래도 안전을 위해선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무적의 송산 경과 10명이나 되는 기사가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그 말에 송산지구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 봐야 괜히 자신없는 모습만 보이는 꼴이다. 백작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송산 경, 더욱 서두르라 이르게.”
“마부는 속력을 높여라! 그리고 기사들은 사주경계를 단단히 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
“옛!”
“안본, 자네도 긴장을 늦추지 말게.”
“알겠습니다.”
흑두장의를 입은 술법사가 기운차게 대답했으나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듯했다.
술법사는 크게 천지인 세 단계로 나뉜다. 그리고 각 단계는 다시 상중하로 세분되어 나누어진다.
안본상수는 현재 천지인의 단계 중 인계의 상급 술법사다.
비록 술법 주입을 할 수 있는 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라면 나파 점령 전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술법사다운 대우를 받으며 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파에서 수많은 술법사들이 들어온 작금의 현실에 인계의 상급 술법사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많아졌다.
옛날처럼 풍족하고 마음 편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같은 단계의 술법사라도 나파의 술법사와는 질이 달랐다.
나파의 술법사들은 대개가 전투에 필요한 공격적인 술법을 구사한다.
반면 대선의 술법사들은 실용적인 술법를 연구하면서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술법을 익히고 발전시켜 왔다.
그렇게 실생활의 편의와 다양성만 추구한 나머지 전투 술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진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안본상수에겐 적이 습격을 해와도 제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든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두두두두!
궁본병무의 비대한 몸을 실은 사두마차와 마차를 따르는 10여 필의 말들이 대지를 박차고 질풍처럼 길을 내달았다.
마차는 외성을 벗어나 왕도를 끼고 도는 강인 한산강을 따라 달렸다.
그렇게 얼마간 달리자 풍경 좋은 한산강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귀족의 별장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언덕만 넘으면 목적지가 지척이었다.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말들도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지 조금도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마차 앞에서 길을 이끄는 다섯 기사의 말이 언덕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언덕의 안쪽 숲에서 느닷없이 시뻘건 불덩이와 화살이 날아왔다.
“초열화탄(焦熱火彈)이다!”
펑!
술법으로 만든 초열화탄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마차의 바퀴 부분을 강타했다. 화살은 선두에서 박차를 가하며 길을 재촉하던 기사들과 술법사의 몸에 여지없이 틀어박혔다.
“으악!”
“습격이다!”
콰직!
불덩이에 맞은 마차가 수미터를 떠오르더니 이내 아래로 떨어지며 와장창 부서졌다.
그 순간,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초열화탄과 화살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휙!
미쳐 대응을 하기도 전에 초열화탄은 선두의 기사들과 말을 덮쳤다.
펑!
“크어억!”
히히히힝!
초열화탄이 터지자 말과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요행히 초열화탄을 피한 기사들의 몸에 화살이 날아들어 박혔다.
“윽!”
“백작님을 보호해라!”
운이 좋아 초열화탄과 화살을 피한 송산지구는 재빨리 하마하여 날아오던 화살을 검으로 쳐 내면서 부서진 마차로 다가갔다.
그때, 화살 한 대가 송산지구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팍!
“크윽!”
송산지구를 비롯한 기사들은 안에는 사슬 갑옷을 입고 그 위로 경갑을 걸쳤다. 이 정도의 방호라면 상대가 기검사가 아닌 한 경검사나 평검사의 도검은 무리없이 막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단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화살 공격에 무력하다는 점이었다. 진행 방향이 직선인 화살 공격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살이 경갑을 쉽게 뚫고 들어가 안에 받쳐 입은 사슬 갑옷을 헤치고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뿐만 아니라 조각난 사슬이 다시 살을 헤집는 통에 움직일 때마다 끔찍한 통증이 몸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백작님?”
말에서 내려 마차로 모여드는 기사는 겨우 다섯에 불과했다. 일시에 기사의 절반이 죽은 것이다.
남은 다섯 기사도 성치 못했다. 그들은 송산지구처럼 화살을 맞거나 초열화탄에 당해 힘겹게 검을 휘두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고 있었다.
“모두 마차 뒤로!”
송산지구는 이를 악물었다.
강변을 끼고 도는 길인지라 강변 쪽은 강물이 훤히 보이는 낮은 지역이지만 화살이 날아오는 반대쪽은 언덕이었고 숲이었다.
따라서 강변 쪽으로 몸을 숨기면 마차가 보호막이 되어 화살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남은 기사들은 지체없이 마차를 엄폐물로 삼고서 몸을 숨겼다.
타타닥!
마차에 화살이 연달아 박혔다.
송산지구는 말과 함께 널브러진 수하 기사들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믿었던 술법사는 집중적인 화살 공격에 가장 먼저 죽었다.
히히힝!
화살이 박히고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진 말들이 꿈틀거리며 울부짖었다.
“백작님?”
배를 드러낸 마차는 거의 부서져 궁본병무가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마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려던 송산지구는 어깨에 박혀 있는 화살이 거치적거리자 손으로 화살대를 잡았다.
딱!
화살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다행히 백작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송산지구의 눈에 비친 궁본병무의 몸은 기묘하게 꺾여져 있었다.
궁본병무의 번들거리는 눈과는 달리 그의 비대한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차가 뒤집히는 충격 탓에 목 아래의 신경이 마비된 것 같았다.
화살은 이제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공격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기사들은 각자 다음 공격에 대비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백작님을 보호해야 한다!”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아직 기세는 잃지 않았다.
송산지구는 궁본병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하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 매국노라 지탄을 받는 사람이지만, 자신을 기사로 만들고 준남작의 작위를 준 주인이다.
나파 치하에서 받는 기사와 준남작의 작위였지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과 함께 서품을 받은 이상 궁본병무를 위해 죽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게 기사도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기사의 운명이었다.
주인이 죽음을 맞더라도 당당하게 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게 수하이자 기사인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송산지구가 궁본병무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의 얼굴이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인하여 번들거렸다.
엎드려서 궁본병무의 몸을 끄집어내는 일은 평상시라면 기검사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송산지구에게 일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좌측 어깨에 화살을 맞아 좌수에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마차에 낀 엄청난 몸무게의 궁본병무의 상태를 고려하여 살살 빼낼 수가 없다.
“끄응!”
송산지구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양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궁본병무의 몸이 그의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두 번을 더 그렇게 하자 송산지구는 궁본병무를 마차 밖으로 간신히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기묘하게 꺾어진 몸을 거칠게 잡아당김에도 궁본병무는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목 아래의 신경이 완전히 죽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송산지구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는 검을 들었다.
살아 있는 다섯 명의 기사 앞으로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송산지구는 검을 세우며 앞으로 나섰다.
“누구인가? 정체를 밝혀라!”
“그러는 그대는 누구인가?”
어둠 속에서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송산지구는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궁본병무 백작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기사 송산지구이다!”
“송산지구? 나파식의 성이군? 그렇다면 그대는 나파의 기사인가?”
“…….”
“왜 말을 못하는가?”
“……난 대선의 기사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파식의 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걸 몰라서 묻는가?”
“불가항력이라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 너희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참으로 애석한 일이군.”
중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얼굴을 가린 복면을 내리고 송산지구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남조문웅이었다.
“아니…… 당신은?”
“호오, 날 아는 모양이군?”
“당신이 왜?”
“내 조국은 나파가 아닌 대선이니까.”
“…….”
“놀랐나?”
“확실히 놀랍소이다.”
“그런가?”
“그럼, 지금까지의 암살과 습격은 모두 당신의 소행이오?”
“아마 그럴 거야. 그리고 습격이 아닌 마땅한 응징이고, 암살이 아닌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이지!”
“어떤 말로 미화를 해도 습격은 습격이고, 암살은 암살일 뿐이오. 지금처럼 말이오.”
“조국과 국민들은 지금처럼 기사의 기사도를 간절히 원한 적이 없네. 자신에 대한 엄격한 예의,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국민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과 헌신적인 봉사의 자세는 기사가 추구하고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이지. 한데 요즘은 그런 기사들은 찾아볼 수가 없네.”
“…….”
“기사인 자네가 충성하는 나라는 나파인가, 아니면 대선인가? 그리고 자네가 희생을 해야 하는 대상의 국민들은 나파인인가, 대선인인가?”
“내가 충성을 바친 주군은 궁본병무 백작이오. 나는 기사로서 주군을 위해 검을 뽑을 뿐, 그 외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소이다.”
송산지구로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떠올리고도 싶지 않은 아픈 문제다.
송산지구의 성은 이가다. 송산은 이라는 성의 나파식 표현이다. 따라서 그의 성명은 실은 이지구였다.
시종과 종자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식에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기는 것은 다름 아닌 모시는 기사의 품성과 행동이다.
이지구가 모신 기사는 나파의 침공 시 호국 가문인 연가의 기사들과 끝까지 저항하다 산화하였다.
자기가 받들어 모신 기사의 죽음은 견습 기사인 이지구의 존재마저도 허공에 뜨게 만들었다.
기사의 서임을 받기 전까지는 기사로서의 품성을 배우고 실력을 쌓아 가는 것이 당연하 과정이기 마련인데, 이지구는 그 과정을 잃은 것이다.
더구나 나라는 나파라는 섬나라 놈들에게 점령당해서 더 이상 충성을 해야 할 대상마저 사라진 실정이었다.
그나마 그와 같은 견습 기사나 떠돌이 기사들이 쉽게 몸담을 수 있는 용방(用幇)마저도 나파군에 의하여 강제 해산이 되어 그가 있을 곳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