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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물이 매우 좁고 가느다란 수로를 어렵게 빠져나가듯 음악은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가늘게 이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몸은 어느새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소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곡은 결코 즐거운 음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듣고 있노라면 우울한 감정마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듣고 있으려니 음은 규칙적인 박자로 이어지면서 강렬하고 빠르게 절정으로 치달았다.
쿠쿠쿵!
더불어 자신의 심장소리도 음과 함께 빠르게 박동하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피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감정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격렬해졌다.
저절로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아, 이럴 수가…….’
마루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음악을 듣는 내내 형언할 수 없는 비장감이 샘솟듯이 흘러나왔다.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웅장함과 절로 허리를 구부리게 하는 경건함, 그러면서 가슴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짜릿한 전율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과 구원의 손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음률은 산을 넘기라도 한 듯 아래로 꺼졌고, 마루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긴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심장의 거친 박동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열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술법에라도 빠진 듯했다.
마루로서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휴우!”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호흡은 무척 가빴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다가 마루는 얼핏 잠에 빠져들었다.

마루는 얼굴을 스치는 어떤 느낌에 순간 잠에서 깨었다.
“으음!”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 머릿속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눈앞은 선명했다.
명화가 눈앞에 있던 것이었다.
“어어!”
마루는 놀라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잘 주무셨나요?”
명화가 입을 여니 일순 과일 향기가 풍겼다.
“주인도 없는데 제가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마루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변명처럼 말했다.
“무척이나 피곤하셨던 모양이네요. 그래서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요.”
“여지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괜찮아요. 저도 음악을 듣다가 잠든 적이 많아요.”
명화가 잔에 물을 따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루는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목을 관통하는 시원함이 전신에 퍼지며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음악이…… 특이하더군요.”
마루가 재음기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상한 감정을 동반하는 음악은 처음이었다.
대학관(대학교)에 가면 어디선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곤 했지만, 그의 정서와는 그리 맞지가 않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들은 음악은 어수선한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처음 들은 곡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기를 간절하게 부르짖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음악이 가져다주는 매력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지요. 마루 님은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나요?”
마루는 명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래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생글생글 웃었다.
마루는 문득 입과 표정의 표현이 다른, 묘한 구석이 있는 여자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음에 그런 분이 생기면 반드시 이 음악을 함께 들어 보세요. 그러면 사랑이 거짓말처럼 이루어질 거예요.”
“기회가 생기면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화는 그런 마루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다음에 나온 곡은 죽은 자가 남은 자의 안식을 구하는 진혼곡이라고 해요. 원래 진혼곡은 죽은 자를 위로하는 곡인데, 이 곡은 그 반대로 산 자를 위로하는 곡이죠. 처음 들어 보셨지요?”
“네, 처음입니다.”
“이런 어둡고 침침한 곡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진혼곡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죠. 진혼곡에는 죽음을 초월한 고결하고 숭고한 의미가 깃들어 있답니다. 사자가 산 자를 걱정하여 지키고자 하지요. 마루 님은 죽어서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글쎄요…….”
하지만 명화는 확실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산 자는 죽은 자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야 하지요. 그러면서 살아 있음을 안도하고 죽은 이들의 발자취와 숭고한 업적을 떠올리며 오늘을 사는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진혼곡을 듣다 보면 찰나지간에 일생을 살아온 것 같은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게 된답니다. 음악이 끝나면 마음 깊이 평화와 안식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랍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인도한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죽은 자의 인도는 오직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안식이라는 말은 산 자의 행동이지, 결코 죽은 자로부터 나올 수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슬픔과 동시에 죽음이 생각나는 엄숙하고 거룩한 느낌은 산 자든 죽은 자든 충분히 위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기에 담긴 기도문이 있는데, 읽어 보실래요?”
“네, 어떤 기도문인지 궁금합니다.”
명화가 책상의 맨 아래 서랍을 열고 뒤적거리더니 두루마리를 꺼냈다.

남은 자를 위한 안식

이 몸은 신의 이름으로 분노하고 그대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꺼이 그대를 위한 칼이 되리라.

녹이 슨 내 칼은 아직도 서슬 푸르게 빛나고,
내 손은 그대의 의지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리노라.

남은 이의 평화를 위해 적에게 복수하고
증오엔 증오로 되갚으니
내 손에 피 마를 날이 없도다.

무고한 자 피 흘리게 말고
사악한 자의 피로 어둠의 강물을 이루게 할지어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어둠을 몰아내게 하고 사악함에 맞서게 할지어다.

안개에 싸인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죽어 가는 영혼에 한 줄기 위안으로 다가오는 그대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이 내 슬픈 영혼을 먹어치우는 사악한 존재라 할지라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맞으리라.

그리하여 그대의 뜻에 따르리라.
남겨진 자들의 영혼을 어둠에서 구할 수 있도록 그대의 능력이 깃든 녹슨 칼로 그들을 지키게 할지어다.
이 죄 많고 어리석은 나를 그대의 칼로 삼아 험하고 거칠게 사용할지어다.

이제 지나온 미련을 끊고 어둠의 강물을 타고 가니,
이 불쌍한 영혼은 아직 쉴 곳이 없도다.
그대에게 이어진 죽음의 강물을 따라가니,
그대, 신성한 영혼으로 날 맞으라.

내용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지만 명화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비장하게 다가왔다.
죽은 자는 오직 산 자를 걱정하고, 죽어서도 산 자의 곁을 지키려고 한다.
‘도대체 죽은 자는 누구이고, 산 자는 누구란 말인가?’
마루는 서너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말들이었다.
“누가 작성한 겁니까?”
“누구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기도문에는 큰 의미가 있어요. 결코 굴하지 않는 의지와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도 같은 맹세가 담겨 있지요. 그리고 이것을 읽은 사람은 필히 죽거나 산 자를 위로해야 된답니다.”
무척이나 모호한 말이었다.
조금 전에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한다면서 지금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로해야 한다니,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가 작성한 글입니까?”
명화는 누가 작성했느냐는 마루의 거듭된 물음에도 다른 말을 나열하면서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점점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우울한 듯 슬픈 표정을 짓는 그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루는 그녀의 변화를 당황스럽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마루 님도 곧 이 기도문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궁금함을 가슴속에 담아 두세요. 나중에 의미를 알고 진혼곡을 듣는다면 진짜 절실하게 와 닿을 겁니다.”
분위기가 심각하고 한편으로는 어색하기도 했다. 그녀의 말과는 달리 마루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은 것이다.
마루는 명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다 벽에 걸린 양초를 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가고 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루는 제과점을 너무 오래 비워 두었다는 생각에 명화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신전을 나왔다.

바삐 걷던 마루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춘 것은 제과점 앞에서였다.
“이런! 준비한 돈을 주지 않고 왔네.”
진규와 지나를 부탁하면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돈을 준비했다. 하지만 깜빡 잊고서 그냥 온 것이다.
게다가 진규와 지나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왔다.
불안해하는 두 아이에게 종종 들를 테니 잘 지내라는 말은 해 주고 와야 했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시간을 내야 되겠군.”
하지만 마루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휘말려 명화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운명은 잔인했다.


제7장 강변의 습격



달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밤.
두두두두두!
잘 치장된 고급스러운 마차가 밤의 정적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다.
“허어, 서두르라 하지 않았는가?”
궁본병무 백작이 창문을 열고 소리치자 기사 송산지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백작님, 지금도 최대한 빨리 달리는 중입니다.”
궁본병무는 조급했다.
마음은 벌써 공녀를 안고 있었으나 마차는 더디기만 했다.
그동안 궁본병무는 태호 제국과 전쟁 중인 나파군에게 물자를 대기 위하여 각 지방 영주들을 재촉하고 징수하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짜느라 녹초가 되었다.
게다가 행정적인 서류도 갖추어야 하는 관계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조금씩 거둬들인 세금과 물자들이라 해도 곧바로 일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챙겨 주고 상납해야 할 곳만 해도 수십 군데다.
궁본병무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거의 두 달 만에 공녀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그는 말을 타지 않은 사병들은 따라오든 말든 10여 명의 기사들과 마부만을 재촉하며 밤길을 달렸다.
조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마차는 한없이 느려 보였고, 그런 마음을 모르는 마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