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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송석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흑맥주를 마시는 마루를 웃음 띤 표정으로 은근히 쳐다보았다.
마루는 그 시선을 의식하고 눈을 크게 떴다.
“뭐?”
“아니, 아니다.”
송석대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뭐가 아닌데?”
“아무튼 잘해 봐라.”
“뭘?”
“뭐든지.”
“미친놈, 지랄하네.”
“후후후, 내가 미쳐서 지랄해도 좋으니까 잘 해 보란 말이다.”
“…….”
다시 한마디 하려던 마루는 송석대의 진심이 담긴 말과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송석대는 지금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엔 친구가 마음에 두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상대의 배경이 너무 막강하고 무시무시했다.
평민인 친구가 바라보기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상대였다.
더불어 자신조차 도움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내무대신인 신정영효 후작은 거물 중 거물이다.
친나파 귀족들과 함께 가혹한 탄압으로 토지 수탈에 앞장서고, 저항군들을 잡아들여 부와 권력을 쌓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딸의 남자가 평민인 마루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면 결코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
모르긴 해도 마루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송석대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송석대의 장난스러운 웃음 뒤에 깔린 진심 어린 걱정을 읽은 마루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이야기가 대책없이 이어질까 싶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대처럼 쏟아졌던 빗줄기는 어느덧 세우가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명화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결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
*
*

다음 날, 마루는 진규와 지나를 데리고 신전을 찾았다.
지금 가는 곳에 대한 설명과 함께 앞으로 둘이 살아야 되는 곳이라고 말해 주자 진규가 궁금함을 가득 담고 이것저것 물어왔다.
마루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대답해 주고자 했지만, 정작 본인도 명화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다만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만한 건물이 없어 임시로 빈 신전에서 거하고 있다는 정도와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는 말만 유선애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유선애도 명화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후원자였던 것이다.
마루는 진규에게 좀 더 희망적인 말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좋은 곳이고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 진규와 지나 같은 고아들을 보살피고 있어 더 이상 굶거나 맞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신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신전에 들어서면서 마루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허둥댔다. 신전에 오면 당연히 명화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신전은 그가 생각한 것만큼 작은 곳이 아니었다.
광장을 접하고 있는 거대한 본 건물과, 역시 작지 않은 부속 건물 10여 개가 삼면으로 회랑과 연결되어 방대한 공간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건물은 10여 채에 불과하지만 각각의 건물은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용도가 다른 방이 벌집처럼 꾸며져 있던 것이다.
일일이 건물을 다 확인하자면 하루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이거, 마중 나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할 수 없다. 우리 신전 구경하면서 천천히 찾아보자.”
마루는 양손에 잡은 진규와 지나를 쳐다보고 스스로의 한심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진규와 지나는 마루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세 사람은 신전의 이층으로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본 건물을 대충 살펴보고 나와 부속 건물로 이어지는 회랑으로 향했다.
회랑의 양편에는 파릇한 잔디가 짙은 초록으로 물들인 채 싱그러운 풀 냄새를 풍겼다.
햇볕은 부드럽고 소담스러웠다.
신전 밖과는 또 다른 세상.
그 잔디 위에는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아이들이 반원을 그린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는 흰옷을 입은 여자가 한껏 미소를 짓고 환한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마루가 천천히 다가서자 아이들 중 하나가 손을 가리켰다.
그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루는 멀리서도 한눈에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명화였다.
명화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같이 있던 여자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햇살과도 같은 포근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은 그의 마음을 절로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 아이들 때문에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괜찮다면 이 아이들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어서 오렴. 난 명화라고 한단다. 넌 이름이 뭐니?”
명화가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 바라보자 지나가 몸을 움츠리며 마루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 아이는 지나라고 하고, 이 아이는 오빠인 진규라고 합니다. 둘 다 아주 영리하고 착한 아이입니다.”
“네, 아직 낯설어서 그러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다행히 명화는 지나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환경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한다.
지나는 아직 마루와 살가운 정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화보다는 마루가 더 친숙하고 안전하다 느끼는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곧 명화를 따라 부속 건물의 실내로 들어섰다.
이곳은 명화가 업무를 보는 공간인지, 업무용 책상과 그 주위로 몇 개의 의자가 있고 한 쪽 벽면에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있었다.
의외일 정도로 평범한 풍경.
자리에 앉자 바로 명화가 마실 것을 내왔다.
명화가 직접 쟁반을 들고 오자 마루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서둘러 그가 쟁반을 받으려 하였지만, 명화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 고개를 흔들었다.
“진규와 지나라고 했지? 이 과자는 내가 구운 거란다. 한 번 먹어 보고 맛있는지 알려 주겠니?”
두 아이의 앞에 과자와 우유가 든 쟁반을 내려놓으며 명화가 말하자 지나가 진규를 바라보았다.
진규는 다시 마루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니까, 어서 먹어 봐.”
마루가 거듭 권하자 진규가 과자를 들어 지나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오른 손바닥을 아랫배에 대더니 고개를 숙였다.
“잘 먹겠습니다, 명화 아가씨.”
예의바르고 정중한 진규의 말에 명화가 다소 당황한 듯 바라보다 이내 환한 웃음을 짓고는 마루를 돌아보았다.
마루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혼의 귀족 여인에게 경칭하는 의미로 붙이는 표현이 바로 아가씨라는 말이었다. 그렇듯 귀족끼리 서로 높여서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지만,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다.
더구나 고아라 생각한 진규의 입에서 나올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가의 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
그로 보아 진규와 지나는 귀족가의 핏줄임이 분명했다. 어린 진규가 이렇듯 반듯할 정도라면 대단히 훌륭한 가문이리라.
“진규야, 성을 물어봐도 되겠니?”
명화의 물음에 진규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마도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지?”
명화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거 먹은 다음에 진규와 지나가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해? 왜냐하면 몸을 청결히 하지 않으면 병에 걸릴 수가 있거든. 그런 것은 진규도 알지?”
“네.”
진규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지나랑 씻으러 갈까?”
“네.”
“마루 님은 괜찮다면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마루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명화는 나가기 전에 업무용 책상 위의 검은빛이 도는 상자를 열고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검은 상자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릴 동안 무료하진 않을 거예요.”
검은 상자, 재음기(再音器)라 불리는 물건에서는 나파에서 건너온 이색적인 음악이 훌러나왔다.
재음기는 서방 대륙에서 전해졌다는 물건이다.
해양무역이 발달한 나파는 일찌기 멀리 서역의 나라들과도 교역을 하였다.
그 교역품 중 하나가 바로 재음기였다.
재음기는 여러 가지 악기에 의해 연주되는 노래를 저장시킨 음판을 넣으면 음악이 재생되는 상자다.
귀족들에게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아 너나 할 것 없이 구입하려고 혈안이 된 물건이다.
하지만 수요에 비하여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격이 턱없이 비쌌다. 그럼에도 물건이 없어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파에서도 처음에는 궁정과 일부 고위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점차 일부 귀족들에게 재음기가 공급되며 소문이 났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리듬과 심금을 울리는 운율을 가진 음악은 대번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매료시켰다.
그러한 효과를 알았음인지 나파의 대선 점령 후에 식민지 수탈과 함께 문화의 희석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바로 이 재음기였다.
대선의 음악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성가와 가곡이 단조롭고 반복적인 운율을 가진 채 사원과 궁정을 통해 이어져 왔다.
그런 탓에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의 가락으로 음성에 의한 고저의 장단만으로 나열되는 게 고작이었다.
단조로운 타악기의 운율처럼 마치 웅변을 하듯 말하는 음유시인의 가락은 시대적인 상황과 정치적으로 잘 맞아떨어져 권력자들에 의하여 국민 계몽과 의식화를 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한 가락에 가슴 저미는 감정이 들어갈리 만무하거니와,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애절함 또한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인은 천성적으로 예술가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풍부하고 따뜻한 감성은 재음기에서 전해지는 애절한 소리에 금세 도취되고 말았다.
재음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귀족층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버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라라라라!
가녀리나 결코 여리지 않은 목소리가 물결처럼 출렁이는 연주에 맞추어 소곤거리듯 마루의 귀에 다가왔다.
음유시인은 스스로의 가락에 자신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고저를 조절하지만, 지금 재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이 발악하듯 부르짖는 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맑고 순수하며 아름다웠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뭔가가 담겨 있었다. 더구나 짙은 호소력을 동반한 노래의 배경에 여러 가지 악기가 받들어 주어 마루가 느끼기에는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숲 속을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게 하였고, 어떤 대상을 향해 목마른 그리움을 불러오게 하였다.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여인의 목소리라 생각되는 노래는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반대로 너무 슬펐다.
아니, 가슴이 아파 올 정도로 비통하기까지 했다.
마루는 여인이 부르는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음악은 애절함, 그 자체였다.
그러다 한순간에 음악이 바뀌었다.
앞의 음악이 감성을 자극하는 호소력 깃든 음악이라면 이번의 음악은 처음부터 분위기가 장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