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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게 뭔데?”
“하도 냄새가 나서 방모님이 씻기려고 계집아이를 데려가려 하자 저놈이 방모님 손을 물고 놓아주질 않잖아.”
알 만했다.
그 모습에 참지 못한 송석대가 때린 모양이었다.
“제 딴에는 동생을 지키고자 한 것 같은데, 좀 과한 거 아냐?”
“안 그래도 후회하고 있다.”
마루를 노려보는 사내아이의 눈은 적의에 가득 차 있었다.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 같은 눈빛.
마루는 짐을 안으로 옮기고 있는 박봉만에게 빵을 받아 두 아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름이 뭐니?”
“…….”
“난 마루라고 한단다. 배고프지 않니?”
그러자 송석대가 말했다.
“그 녀석들, 오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아마도 며칠 굶었을 거야.”
“잘하는 짓이다!”
마루가 빈정거리듯 말하며 송석대를 째려보았다.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옛날 생각나서 잘하려고 했어. 한데 얘들이 받아 주질 않으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잘하려고 하는 놈이 애를 이렇게 패냐?”
“어쩔 수 없었다니까.”
“잔소리 말고 가서 우유나 좀 가져와.”
송석대가 인상을 쓰고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마루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남자답구나. 오빠는 당연히 동생을 지켜야지. 그래, 잘했다. 잘했는데…… 동생이 배고프지 않을까? 넌 남자니까 참을 수 있어도 동생은 힘들어할 것 같은데…… 나 같으면 기분 나쁘고 미워도 동생을 위하여 조금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동생이 배고플 것 같다는 말에 사내아이의 마음이 흔들렸는지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은 채 떨고 있다가 오빠가 쳐다보는 것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 나 배 안 고파.”
소곤거리듯 작은 말이었지만 마루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그 말을 들은 마루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장난도 치고 가끔 사고도 치면서 활발하고 구김살없이, 그렇게 커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어른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일부 사람들은 똑똑하다거나 천재라 칭찬하지만, 마루가 보기에는 뭔가 어긋나고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는 그 나이답게 본능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지금처럼 배가 고픈 데도 불구하고 오빠를 생각해서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앞에 말한 것과는 경우가 다르지만, 아이답지 않는 것이다.
그런 아이답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네가 잘 먹고 건강해야 오빠가 안심할 거야.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다가 나중에 아파서 쓰러지면 오빠가 얼마나 걱정하겠니. 안 그래?”
마루는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했다.
“아프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잘 먹어야지. 자, 이거 먹어라.”
마루가 빵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자 여자아이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 굳지 않은 빵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노릇노릇한 빵은 냄새는 물론이고, 보기에도 상당히 먹음직스러웠다.
꿀꺽!
여자아이는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그러나 빵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마도 사내아이의 허락이 없는 한 절대로 먹지 않을 것 같았다.
“너도 배가 고프지 않느냐? 네가 배가 고픈데 동생은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동생은 먹고 싶은데 네 눈치만 살피잖니.”
마루의 말에 사내아이는 말없이 동생을 쳐다보았다. 여자아이도 사내아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처음보다는 주저하는 기미가 엿보였다.
사내아이는 그런 동생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루 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저는 진규라고 하고 동생은 지나라고 합니다. 도움에 감사드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마루는 속으로 감탄을 했다.
그를 똑바로 보고 말하는 사내아이의 말투나 행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꼭 갚아라. 이제 협상이 되었으니 어서 먹어라.”
마루가 빵을 건네자 남자아이인 진규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동생인 지나에게 건네었다.
그러자 지나가 어른 손바닥만 한 빵을 절반으로 자르고, 둘 중 큰 부위를 진규에게 건네었다.
진규는 그 빵을 받지 않고, 지나의 손에 들린 빵을 잡았다. 그러자 지나가 도리질을 했다. 남자인 오빠가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빵이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
마루가 빵을 하나 더 건네자 그제야 두 아이는 빵을 먹기 시작했다.
“거참, 신기하네. 죽어도 안 먹을 것 같은 녀석들이 네가 무슨 말을 했기에 먹는 것이냐?”
송석대가 나타나자 다시 아이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너 때문에 아이들 얹히니까 우유 이리 주고 넌 가라.”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한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애들이나 패는 놈은 이 세상에서 멸종을 시켜야 돼. 알았냐?”
“누가 들으면 아주 죽였다고 하겠다. 알았다. 사라지마.”
송석대는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순순히 마루의 말을 들었다.
“아까 때린 거 미안하고……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네가 잘 알 거다. 목메지 않게 우유 마시면서 천천히 먹어라.”
송석대는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진규에게 말했다. 다행히 진규의 적의에 찬 눈빛도 많이 풀려 있었다.
제6장 알 수 없는 그녀
후두둑!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늙은 말이 걱정된 마루가 밖으로 나갔지만, 말과 수레는 박봉만에 의해서 마구간으로 치워진 뒤였다.
비는 매섭게 쏟아졌다.
제과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조문웅에게 미리 외출을 보고했고, 유선애에게도 사전에 충분히 주지시켰다. 꼼꼼한 유선애라면 마무리도 잘할 것이다.
진규와 지나는 허기를 채우자 하품을 하며 졸기 시작했다.
마루는 두 아이를 들어 옮겨 송석대의 침상에 눕혔다.
“아이들 어떡할래?”
송석대가 가져온 흑맥주를 한 모금 마신 마루가 물었다. 그러자 송석대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다. 여기에서 데리고 있는다 해도 누가 돌볼 사람이 있어야지. 방모님도 근래 들어 몸이 좋지 않아 예전처럼 아이들 돌보는 일이 어려워. 그렇다고 내가 돌보자니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 녀석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밖으로 내보낸다면 분명 하루도 지나지 않아 노예상들에게 잡혀갈 것이다.
“방모님은 어디가 아픈데?”
“신경통이야. 몸 때문이지. 몸이 그렇게 무거운데 다리가 버티겠어?”
방모는 도방의 방주인 송한승의 부인이다.
날마다 점심이면 부랑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인정 많은 아줌마.
사실 마루가 가져온 빵의 일부도 그녀를 통해 굶주린 이들에게 전해진다.
그녀는 넉넉한 성격에 맞게 몸도 푸짐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자꾸 불어나는 체중 때문에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마루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데리고 갈까?”
“어디? 제과점에? 그곳에서 데리고 있게?”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 고아들을 돌보고 있는데, 그곳에 데리고 가보려고.”
“그게 누군데?”
“말해도 넌 몰라.”
“여자냐?”
무언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송석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응. 근데 그 표정은 뭐냐?”
마루는 송석대의 표정과 눈빛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마음에 둔 여자냐?”
“새끼, 실없는 소리하고 있네. 귀족이야.”
“허, 귀족이라……. 귀족을 상대하는 물 좋은 곳에서 지내더니 애인도 귀족으로 두냐?”
“너 정말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래? 어떤 정신 나간 귀족 아가씨가 평민하고 연애를 하겠냐?”
“모르지. 남녀 관계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또 귀족하고 평민하고의 애틋한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송석대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미친놈! 생각하는 것하고는. 재미없으니 좋은 말할 때 그만해라.”
“짜식, 농담인데 그렇다고 정색할 건 뭐냐? 정말 뭔가 있는 거 아냐?”
“이게!”
마루가 흑맥주 잔을 집어 들자 송석대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꼭 볼썽사나운 꼴을 봐야 알아듣지.”
“근데 그런 좋은 일 하는 예쁜 아가씨가 누구냐?”
“짜식아, 넌 말해도 몰라.”
“이 자식아, 이 바닥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 것 같냐? 내가 이래봬도 도방의 차기 대권을 이어받을 몸인데, 나를 어떻게 보고 말을 그따위로 싸가지없이 지껄이냐? 생각해 보니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참나,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자존심을 찾고 지랄이네. 차라리 떼를 쓰면 귀엽게 봐주기라도 하지.”
“흐흐흐, 너 말 잘했다. 떼쓰기 전에 빨리 누군지 실토해라.”
은근한 말투로 독촉하는 송석대의 시선에 마루는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신정명화.”
“신정명화?”
그게 누군데 하는 표정을 짓던 송석대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설, 설마…… 매국노 신정영효 가문의 여자는 아니겠지?”
송석대는 무척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금미달에 신정이라는 나파식의 성을 가진 사람이 또 있냐?”
“그러면 그 여자가 그 매국노의 딸이란 말이냐?”
“귀먹었냐? 왜 말을 못 알아들어?”
“그게 아니라, 그 악랄한 매국노에게 그런 딸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그래. 혹시 그거 지능적인 술수 아닐까? 일종의 선전 효과를 노린, 아주 지능적인?”
“도둑놈, 생각하는 거하고는. 내가 몇 번 만나 봤는데 악명을 날리는 신정영효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신전에서 어렵게 꾸려 간다 하더라.”
대개 귀족가의 여자들은 귀금속을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고, 또 화려하게 성장을 한 채 사교관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그리고 같은 부류의 귀족 남자들과의 사교와 교분을 인생의 낭만, 혹은 인생을 전부 걸어야 되는 목표로 생각한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 지금의 귀족들의 세태였다.
그런데 후작가의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아가씨가 고아들을 돌본다니, 이거야말로 왕도의 화제가 아닌가.
더불어 조롱과 함께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아니, 분명히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비웃음거리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고아들을 보살피는 것은 분명 칭찬받고 칭송받아 마땅했다.
적어도 그런 점은 아름다운 마음이고, 훌륭한 행동이었다. 다른 점은 어떠할지 몰라도 그 점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은 마루였다.
“호오, 아비의 매국을 대신 속죄한다, 이거지?”
“뭐, 그런 뜻도 없지 않겠지.”
마루는 빈정거리는 것 같은 송석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