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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망하다
2화
1장 새로 온 찬모(2)
가끔씩 지나는 이들은 대문의 틈새로 안을 엿보며 감탄했다.
“와! 이 집 정원 끝내준다!”
5년째 정원을 가꾸는 손 씨의 솜씨였다.
사실, 집 내부는 더 완벽했다. 이태리에서 공수된 흰색 대리석과 흰색 몰딩, 백색의 최고급 내장재들이 안정된 통일감을 주었다. 바닥은 모두 밝은색의 목재를 썼다. 값비싼 나이테의 물결들이 바닥을 지탱하며 계단이 되고, 손잡이가 되어 2층까지 이어졌다.
사실, 시혁이 가장 돈을 많이 쓴 건, 공교롭게도 ‘빈 공간’이었다. 댄스파티를 벌여도 좋을 만큼, 거실을 아주 드넓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기고, 모든 방문은 시원스럽게 양쪽으로 열게 하고, 정원이 온전히 보이도록 투명한 통창을 뚫고, 높은 천장에선 자연광이 쏟아지게 했다. 설계의 의도는 분명 ‘눈부실 만큼 집 안이 밝게 빛나도록 하기’였다.
그러고서 온 집 안을 짙은 녹색의 벨벳 커튼으로 둘렀다. 햇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방의 접이식 문도 모두 닫아 잠갔다. 백색의 아름다운 주방도 거의 폐쇄하고 일부만 썼다. 가구가 특히 이상했는데, 휑뎅그렁하게 넓은 공간에 꼭 필요한 가구들만 있었고, 그때그때 사들인 것처럼 디자인이 들쭉날쭉했다.
“누가 커튼을 마음대로 열라고…….”
식당에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시혁은 불만을 뱉다 입을 닫았다. 부엌의 사람이 바뀌었단 사실이 잊을 수 없이 또렷했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른히 들려왔다. 바람 한 점이 기분 좋게 날아들었다. 시혁은 12인용 식탁 끝에 차려진 1인용 밥상을 한참 들여다보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시혁은 밥상에, 아니 음식에 물리고 질린 사람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신제품 시식회에서 매번 직원들을 긴장시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업무고, 가장 잘 팔릴 양질의 식품을 만드는 시스템을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숨을 쉬는 것처럼 만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일 년 열두 달, 스케줄은 빽빽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많다.
만남은 식사를 동반한다. 점심을 두 번 먹는 건 자주 있는 일이고, 바쁠 땐 세 번까지도 먹는다. 밥상이 가운데 놓이면 전투가 시작된다. 이해와 이권과 욕망을 놓고 서로를 총질한다.
따라서 가짓수만 많은, 보기에만 그럴듯한, 화려하게 치장된 상을 보면 자연스럽게 식욕이 떨어지며 피로가 몰렸다. 밖에서 먹는 밥이 질렸고, 시간이 허락되는 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예산댁이 푸근한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
‘어째, 오늘은 맛이 좀 있슈?’
웬만하긴 해도 최고의 찬모는 아니었던 예산댁이 은근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으면 시혁도,
‘인사만 하는 게 낫겠죠? 아님, 정확히 말할까요?’
농을 했다. 그러면 예산댁은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음마, 인사만 하고 말어유!’
‘맛있습니다.’
‘쳇! 오늘은 우거지에서 잡비린내 안 나는규? 사장님이 아니고 아주 사냥개여유!’
잔소리하며 내주는 구수한 숭늉이 맛 좋고 편했다.
그렇게 흡족한 찬모였던 예산댁을 내보내고, 시혁은 참 흥미로운 찬모를 만났다.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의 삼색 나물, 감자전, 된장찌개, 조기와 산적, 어느 곳에서나 수백 수천 번은 보았던 아주 흔한 상차림이었다.
하지만 아주 달랐다. 예산댁이 담가 두고 간 나박김치와 배추김치까지 올린 상을 마주하니 이곳이 영후각인가 싶었다. 찬을 접시에 담은 솜씨만 보더라도 상 차린 이의 품성을 알 만했다. 그녀는 매우 단정하고 정갈하며, 단호하여 군더더기가 없었다.
보들보들한 감자전이 입 안에서 가볍게 바스러졌다. 감자만의 순결한 향긋함, 콩기름의 콩 비린내와 느끼함을 말끔히 누른 알맞은 조화, 홍고추와 청고추의 고명이 칼끝에서 핀 꽃 같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영후각의 음식이 그의 밥상 위에 재현되었다. 심심한 간, 최소한의 양념, 설탕 고춧가루 참기름으로 뒤범벅되지 않은, 원재료가 가진 최상의 맛과 향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아리고 비리고 텁텁하고 누린 것들을 말끔하게 잡는다. 화장 벗은 얼굴로도 최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자태다.
솜씨도 솜씨지만 정성이 기막혔다. 숯불을 피워 찬찬히 구운 조기와 산적이 입에 딱 맞았다. 비린내 제거는 물론 최상의 풍미를 올렸다. 달큼한 양념간장이 타지 않게 얇게 구운 산적도 두말할 나위 없었다. 맛있었다. 임금의 수라상 부럽지 않았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입에 넣다 보니 배가 불러 왔다. 무엇이든 배가 차면 손을 놓음에도 오늘은 식탐을 부리는 어린애가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민수. 이름이 민수라 하였다, 정민수. 여자답지 않은 이름이었다. 조금 더 고운 이름이 어울렸을 것 같지만. 그녀가 영후각 찬모의 딸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자리마저 사라졌지만 영후각은 최고의 기생집으로 당대 내로라하는 국회의원, 장관, 최고위 경영자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큰 부엌의 찬모가 되기 위한 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갖은 썰기, 포 뜨기, 다듬기 등 칼질을 하게 되는 것만도 몇 년은 걸린다. 그리고 섞박지부터 시작해 갖은 김치 종류며, 장국, 찌개, 무침, 조림, 볶음, 장을 담그는 일까지……. 이 외에도 국수 말이, 찜, 떡, 다식 등에도 능통해야 한다. 부엌의 위생 및 정리까지 맡는 책임자인 셈이다.
불편한 몸으로 남의집살이를 하는 처지가 된 그녀의 사연은 미루어 두더라도 그녀의 음식 솜씨만큼은 정직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서재로 들어가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거실 소파에 눌러앉아 멀거니 잡생각에 시간을 소비했다. 그의 잔잔한 일상 속에 툭, 던져진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여자 때문이었다.
‘달그락’ 하는 찻잔 소리와 함께 베이비 로션의 향이 훅 끼쳐 왔다. 싸구려 로션의 향이었으나 그녀의 체취가 더해져 이색적인 달콤함으로 변질되었다. 과일과 더운 차 한 잔, 간단한 후식을 차려 줬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얽히는 걸 노골적으로 피한다. 아까부터 마치 없는 사람을 시중들듯 했다.
시혁도 함께 모른 체하려 애쓰다 결국 그녀를 눈에 담고 말았다. 우유를 쏟은 듯한 피부, 아랫입술만큼 부푼 윗입술, 오뚝한 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 시혁을 담지 않은 눈망울은 저토록 선하고 맑았다.
시혁은 외면당한 시선을 거뒀다. 그녀의 목엔 스카프 대신 짧고 얇은 손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미안함이라고 하긴 좀 부족한 불편함이 그를 날카롭게 찔렀다.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애써 피하던 갈색의 눈동자가 잠깐 그를 담았다. 아마도 실수였던 듯, 곧 도망치듯 아래로 내리깔렸음에도 그는 확인하였다. 도발을 품은 눈빛에 어린 원망, 그래, 저것. 이미 경험했음에도 가슴이 철렁였다.
그러나 도도한 입술은 다시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까딱, 하며 괜찮다는 표시만을 짧게 했다. 열없이 앞에 놓인 찻잔에 입을 댔다.
그녀는 빈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안 보는 척 고개를 돌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을 좇았다. 절룩, 절룩, 여전히 조금씩 둥글게 허리를 움직이며 걷고 있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심하진 않다.
아무 일 없이 천천히 그녀의 템포대로 움직이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삶고 있었던지, 물이 ‘푸르르’ 넘치는 소리에 다급해진 뒤로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다리를 저는 기색이 역력했다. 흔들흔들 그녀의 기다란 주름치마가 걸음걸이와 함께 리듬을 만들어 냈다. 낭창한 허리선이 기막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이성은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빨리 내보내라 명령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너무나 어린 여자였고, 게다가 아주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이가 몇이랍니까?”
월요일 아침, 일정 보고 뒤 난감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김 비서에게 물었다.
“스물일곱이랍니다.”
다행인지 보이는 것보다는 꽤 많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놓아둘 만큼은 아니다. 서른넷의 총각, 시혁이 홀로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를 찬모로 들이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배꽃여자고등학교를 중퇴?”
김 비서는 정민수에 관한 간단한 신상을 시혁에게 보고했다.
“네, 2학년에 중퇴한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공부를 꽤 잘했나 보군.”
최고의 명문 여고를 1년 남기고 중퇴할 일이 무엇일까.
“어머니, 정명희 씨는 영후각이 문을 닫을 때까지 약 18년간 찬모로 일했고, 위암으로 투병하다 작년 말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병원비 때문에 형편이 어려워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알아보았는데, 현재 정민수 씨의 재정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생전에 큰 빚을 져서 정명희 씨 앞으로 된 약간의 재산은 모두 가압류 과정을 거치고 있고, 정민수 씨는 꽤 많은 빚을 물려받았습니다.”
큰 빚이 있거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집안에 고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어쨌든 안 될 것 같습니다.”
돈 될 정보들이 많은 시혁 주변에서 유혹에 쉽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찬모를 구하라는 지시가 빨리 떨어지지 않자, 김 비서는 시혁의 안색을 살폈다.
“예산댁의 보조로 가끔씩 오던 청주댁은 어떠신가요?”
정민수를 그대로 두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아주 불편할 것이었다. 그에게 집이란 권력과 이권을 다투는 전투를 치른 뒤 밤을 보내는 휴식처였다. 휴식처를, 그만의 공간을, 행동을 단정히 해야 하는 가시방석으로 만드는 건 바보짓이다.
‘턱 밑에 송곳을 꽂아 놓고 편키를 바라라.’
아버지라면 망설임 없이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수고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단 좀 둬 보지.”
돌아보지 않으면 그만, 도발을 품은 그 눈빛에 미혹되지 않으면 그만.
모든 것이 스스로 할 탓이다. 그녀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녀가 차려 주는 밥상에 홀딱 반해서였다.
2장 불편한 그녀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던 시혁의 노력은 슬슬 한계에 부딪혔다. 그녀가 거슬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딱히 꼬집어 야단칠 일은 없다. 예산댁의 부재로 엉망이 될 줄 알았던 생활은 아주 평화롭게, 오히려 더 만족스럽게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전처럼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지 못했다. 지그시 미루어 두려 한 호기심이 풍선처럼 불룩 부풀어 올라, 저도 모르게 그녀를 찾았다.
언제나 정갈한 상차림, 새콤한 초무침이 입맛을 당겼다. 하지만 오늘따라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12인용 식탁의 한쪽 끝을 차지하는 1인분의 음식과 늘 익숙하던 적막이 새삼 불편했다. 민수는 무엇도 더 청할 것 없이 완벽히 차려 놓았다. 그리고 그를 피해 달아났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처음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가 들어온 지 열흘째던가, 시혁은 여태 말도 한 마디 섞어 보지 못했다. 시혁 쪽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딱 한 번, 막은 일이 있기는 했다.
처음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였다. 아마도 웃옷과 가방을 받아 주려 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취하도록 술을 마신 상태였다. 실수라도 할까 싶어 비틀거리며 손을 들어 막았었는데, 그걸로 그런 건가. 그 뒤였다. 그녀조차 그를 피했다.
곰곰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 머리꼭지를 구경할 수가 없다. 아침엔 바빠 돌아볼 겨를이 없다 치고, 저녁엔 취기가 있으니 서로 내외한다 치고, 하지만 주말까지, 어쩌다 집에 쉬러 들어와 저녁을 먹는 오늘 같은 날조차 사람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너무하다.
식사가 준비되면 그녀는 늘 서재의 문을 ‘똑똑’ 노크하고 도망쳤다. 곧바로 나와 봤자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뒤다. 항상 집 안에 있으면서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피해 다녔다.
식사 중인 주인을 홀로 버려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이건 찬모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시혁은 울컥 화가 치밀어 그녀를 부르기 위해 목청을 돋우려다가 곧 눈앞에 대령되어 있는 숭늉을 발견하곤 다시 후우, 숨을 내쉬었다. 숭늉이 그를 비웃듯 김을 모락모락 뿜었다. 시혁은 찬물을 들이켰다.
“민수 씨!”
결국 민수를 불러들였다. 2층 계단 위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려던 민수가 그의 부름에 붙들렸다. 한 손으론 난간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걸레통을 쥐고 있었다. 청소를 하려는 모양인가. 그러고 보니 1층의 마루며, 나무로 된 손잡이 같은 것들, 가구들이 죄다 반들반들 윤이 났다.
느릴 땐 느리면서도 손은 무척 빨랐다. 예산댁의 빈자리를 메우다 못해 월등하다는 사실을 시혁은 애써 모른 체했다. 그 말간 얼굴을 보면,
‘집안일 중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쪽 손에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무렇게나 뱉었던 말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민수는 느린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더운 날씨에도 정강이까지 오는 또 다른 촌스러운 치마, 긴팔의 셔츠, 여전히 감겨 있는 목의 흰 손수건. 아무리 촌스러운 옷들로 무장하듯 휘감았다고 해서 낭창한 허리선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렇게 윤이 나도록 온 집 안을 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하려던 말을 깜빡 잊고 말았다. 이것도 분명 그녀를 위해 꺼낸 말이었으나 왠지 말투가 거칠게 튀었다. 시혁은 목청을 흠, 가다듬고 흐트러진 무언가를 추슬렀다.
“자주 쓰지 않는 곳의 청소는 따로 사람이 오잖습니까.”
예산댁은 시혁이 쓰는 곳들을 청소하고 간단한 세탁도 맡아 주고 있었다. 사실 찬모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시혁도 청소와 세탁을 하는 잡역부를 따로 두었었다. 하지만 문제의 스파이 사건을 함께 겪은 예산댁이 먼저 나서 주었다.
‘식구도 꼴랑 하나뿐인데, 뭐 할 일이 많이 있겠슈?’
‘내 아버지는 사람을 열둘도 더 씁니다.’
‘하하, 그래서 어르신은 진지도 더 많이 잡순대유? 그류, 사장님은 집에서 진지도 잘 안 잡수니, 그냥 지가 다 하고 말쥬.’
그래서 월급을 올려 인사치레를 하고 예산댁을 의지했다. 하지만 민수는 민수다. 부엌일 이외에는 못하겠다고 나선대도 할 수 없었고, 사실 그게 옳았다.
“일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까?”
민수는 고개를 돌린 채 까딱, 최소한의 표시만을 간단히 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말을 섞는 것도 거부당한 느낌, 그 묘한 불쾌감이 신경을 슬쩍 긁으며 그를 자극했다.
2화
1장 새로 온 찬모(2)
가끔씩 지나는 이들은 대문의 틈새로 안을 엿보며 감탄했다.
“와! 이 집 정원 끝내준다!”
5년째 정원을 가꾸는 손 씨의 솜씨였다.
사실, 집 내부는 더 완벽했다. 이태리에서 공수된 흰색 대리석과 흰색 몰딩, 백색의 최고급 내장재들이 안정된 통일감을 주었다. 바닥은 모두 밝은색의 목재를 썼다. 값비싼 나이테의 물결들이 바닥을 지탱하며 계단이 되고, 손잡이가 되어 2층까지 이어졌다.
사실, 시혁이 가장 돈을 많이 쓴 건, 공교롭게도 ‘빈 공간’이었다. 댄스파티를 벌여도 좋을 만큼, 거실을 아주 드넓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기고, 모든 방문은 시원스럽게 양쪽으로 열게 하고, 정원이 온전히 보이도록 투명한 통창을 뚫고, 높은 천장에선 자연광이 쏟아지게 했다. 설계의 의도는 분명 ‘눈부실 만큼 집 안이 밝게 빛나도록 하기’였다.
그러고서 온 집 안을 짙은 녹색의 벨벳 커튼으로 둘렀다. 햇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방의 접이식 문도 모두 닫아 잠갔다. 백색의 아름다운 주방도 거의 폐쇄하고 일부만 썼다. 가구가 특히 이상했는데, 휑뎅그렁하게 넓은 공간에 꼭 필요한 가구들만 있었고, 그때그때 사들인 것처럼 디자인이 들쭉날쭉했다.
“누가 커튼을 마음대로 열라고…….”
식당에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시혁은 불만을 뱉다 입을 닫았다. 부엌의 사람이 바뀌었단 사실이 잊을 수 없이 또렷했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른히 들려왔다. 바람 한 점이 기분 좋게 날아들었다. 시혁은 12인용 식탁 끝에 차려진 1인용 밥상을 한참 들여다보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시혁은 밥상에, 아니 음식에 물리고 질린 사람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신제품 시식회에서 매번 직원들을 긴장시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업무고, 가장 잘 팔릴 양질의 식품을 만드는 시스템을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숨을 쉬는 것처럼 만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일 년 열두 달, 스케줄은 빽빽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많다.
만남은 식사를 동반한다. 점심을 두 번 먹는 건 자주 있는 일이고, 바쁠 땐 세 번까지도 먹는다. 밥상이 가운데 놓이면 전투가 시작된다. 이해와 이권과 욕망을 놓고 서로를 총질한다.
따라서 가짓수만 많은, 보기에만 그럴듯한, 화려하게 치장된 상을 보면 자연스럽게 식욕이 떨어지며 피로가 몰렸다. 밖에서 먹는 밥이 질렸고, 시간이 허락되는 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예산댁이 푸근한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
‘어째, 오늘은 맛이 좀 있슈?’
웬만하긴 해도 최고의 찬모는 아니었던 예산댁이 은근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으면 시혁도,
‘인사만 하는 게 낫겠죠? 아님, 정확히 말할까요?’
농을 했다. 그러면 예산댁은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음마, 인사만 하고 말어유!’
‘맛있습니다.’
‘쳇! 오늘은 우거지에서 잡비린내 안 나는규? 사장님이 아니고 아주 사냥개여유!’
잔소리하며 내주는 구수한 숭늉이 맛 좋고 편했다.
그렇게 흡족한 찬모였던 예산댁을 내보내고, 시혁은 참 흥미로운 찬모를 만났다.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의 삼색 나물, 감자전, 된장찌개, 조기와 산적, 어느 곳에서나 수백 수천 번은 보았던 아주 흔한 상차림이었다.
하지만 아주 달랐다. 예산댁이 담가 두고 간 나박김치와 배추김치까지 올린 상을 마주하니 이곳이 영후각인가 싶었다. 찬을 접시에 담은 솜씨만 보더라도 상 차린 이의 품성을 알 만했다. 그녀는 매우 단정하고 정갈하며, 단호하여 군더더기가 없었다.
보들보들한 감자전이 입 안에서 가볍게 바스러졌다. 감자만의 순결한 향긋함, 콩기름의 콩 비린내와 느끼함을 말끔히 누른 알맞은 조화, 홍고추와 청고추의 고명이 칼끝에서 핀 꽃 같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영후각의 음식이 그의 밥상 위에 재현되었다. 심심한 간, 최소한의 양념, 설탕 고춧가루 참기름으로 뒤범벅되지 않은, 원재료가 가진 최상의 맛과 향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아리고 비리고 텁텁하고 누린 것들을 말끔하게 잡는다. 화장 벗은 얼굴로도 최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자태다.
솜씨도 솜씨지만 정성이 기막혔다. 숯불을 피워 찬찬히 구운 조기와 산적이 입에 딱 맞았다. 비린내 제거는 물론 최상의 풍미를 올렸다. 달큼한 양념간장이 타지 않게 얇게 구운 산적도 두말할 나위 없었다. 맛있었다. 임금의 수라상 부럽지 않았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입에 넣다 보니 배가 불러 왔다. 무엇이든 배가 차면 손을 놓음에도 오늘은 식탐을 부리는 어린애가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민수. 이름이 민수라 하였다, 정민수. 여자답지 않은 이름이었다. 조금 더 고운 이름이 어울렸을 것 같지만. 그녀가 영후각 찬모의 딸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자리마저 사라졌지만 영후각은 최고의 기생집으로 당대 내로라하는 국회의원, 장관, 최고위 경영자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큰 부엌의 찬모가 되기 위한 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갖은 썰기, 포 뜨기, 다듬기 등 칼질을 하게 되는 것만도 몇 년은 걸린다. 그리고 섞박지부터 시작해 갖은 김치 종류며, 장국, 찌개, 무침, 조림, 볶음, 장을 담그는 일까지……. 이 외에도 국수 말이, 찜, 떡, 다식 등에도 능통해야 한다. 부엌의 위생 및 정리까지 맡는 책임자인 셈이다.
불편한 몸으로 남의집살이를 하는 처지가 된 그녀의 사연은 미루어 두더라도 그녀의 음식 솜씨만큼은 정직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서재로 들어가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거실 소파에 눌러앉아 멀거니 잡생각에 시간을 소비했다. 그의 잔잔한 일상 속에 툭, 던져진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여자 때문이었다.
‘달그락’ 하는 찻잔 소리와 함께 베이비 로션의 향이 훅 끼쳐 왔다. 싸구려 로션의 향이었으나 그녀의 체취가 더해져 이색적인 달콤함으로 변질되었다. 과일과 더운 차 한 잔, 간단한 후식을 차려 줬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얽히는 걸 노골적으로 피한다. 아까부터 마치 없는 사람을 시중들듯 했다.
시혁도 함께 모른 체하려 애쓰다 결국 그녀를 눈에 담고 말았다. 우유를 쏟은 듯한 피부, 아랫입술만큼 부푼 윗입술, 오뚝한 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 시혁을 담지 않은 눈망울은 저토록 선하고 맑았다.
시혁은 외면당한 시선을 거뒀다. 그녀의 목엔 스카프 대신 짧고 얇은 손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미안함이라고 하긴 좀 부족한 불편함이 그를 날카롭게 찔렀다.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애써 피하던 갈색의 눈동자가 잠깐 그를 담았다. 아마도 실수였던 듯, 곧 도망치듯 아래로 내리깔렸음에도 그는 확인하였다. 도발을 품은 눈빛에 어린 원망, 그래, 저것. 이미 경험했음에도 가슴이 철렁였다.
그러나 도도한 입술은 다시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까딱, 하며 괜찮다는 표시만을 짧게 했다. 열없이 앞에 놓인 찻잔에 입을 댔다.
그녀는 빈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안 보는 척 고개를 돌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을 좇았다. 절룩, 절룩, 여전히 조금씩 둥글게 허리를 움직이며 걷고 있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심하진 않다.
아무 일 없이 천천히 그녀의 템포대로 움직이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삶고 있었던지, 물이 ‘푸르르’ 넘치는 소리에 다급해진 뒤로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다리를 저는 기색이 역력했다. 흔들흔들 그녀의 기다란 주름치마가 걸음걸이와 함께 리듬을 만들어 냈다. 낭창한 허리선이 기막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이성은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빨리 내보내라 명령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너무나 어린 여자였고, 게다가 아주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이가 몇이랍니까?”
월요일 아침, 일정 보고 뒤 난감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김 비서에게 물었다.
“스물일곱이랍니다.”
다행인지 보이는 것보다는 꽤 많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놓아둘 만큼은 아니다. 서른넷의 총각, 시혁이 홀로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를 찬모로 들이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배꽃여자고등학교를 중퇴?”
김 비서는 정민수에 관한 간단한 신상을 시혁에게 보고했다.
“네, 2학년에 중퇴한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공부를 꽤 잘했나 보군.”
최고의 명문 여고를 1년 남기고 중퇴할 일이 무엇일까.
“어머니, 정명희 씨는 영후각이 문을 닫을 때까지 약 18년간 찬모로 일했고, 위암으로 투병하다 작년 말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병원비 때문에 형편이 어려워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알아보았는데, 현재 정민수 씨의 재정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생전에 큰 빚을 져서 정명희 씨 앞으로 된 약간의 재산은 모두 가압류 과정을 거치고 있고, 정민수 씨는 꽤 많은 빚을 물려받았습니다.”
큰 빚이 있거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집안에 고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어쨌든 안 될 것 같습니다.”
돈 될 정보들이 많은 시혁 주변에서 유혹에 쉽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찬모를 구하라는 지시가 빨리 떨어지지 않자, 김 비서는 시혁의 안색을 살폈다.
“예산댁의 보조로 가끔씩 오던 청주댁은 어떠신가요?”
정민수를 그대로 두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아주 불편할 것이었다. 그에게 집이란 권력과 이권을 다투는 전투를 치른 뒤 밤을 보내는 휴식처였다. 휴식처를, 그만의 공간을, 행동을 단정히 해야 하는 가시방석으로 만드는 건 바보짓이다.
‘턱 밑에 송곳을 꽂아 놓고 편키를 바라라.’
아버지라면 망설임 없이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수고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단 좀 둬 보지.”
돌아보지 않으면 그만, 도발을 품은 그 눈빛에 미혹되지 않으면 그만.
모든 것이 스스로 할 탓이다. 그녀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녀가 차려 주는 밥상에 홀딱 반해서였다.
2장 불편한 그녀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던 시혁의 노력은 슬슬 한계에 부딪혔다. 그녀가 거슬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딱히 꼬집어 야단칠 일은 없다. 예산댁의 부재로 엉망이 될 줄 알았던 생활은 아주 평화롭게, 오히려 더 만족스럽게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전처럼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지 못했다. 지그시 미루어 두려 한 호기심이 풍선처럼 불룩 부풀어 올라, 저도 모르게 그녀를 찾았다.
언제나 정갈한 상차림, 새콤한 초무침이 입맛을 당겼다. 하지만 오늘따라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12인용 식탁의 한쪽 끝을 차지하는 1인분의 음식과 늘 익숙하던 적막이 새삼 불편했다. 민수는 무엇도 더 청할 것 없이 완벽히 차려 놓았다. 그리고 그를 피해 달아났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처음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가 들어온 지 열흘째던가, 시혁은 여태 말도 한 마디 섞어 보지 못했다. 시혁 쪽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딱 한 번, 막은 일이 있기는 했다.
처음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였다. 아마도 웃옷과 가방을 받아 주려 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취하도록 술을 마신 상태였다. 실수라도 할까 싶어 비틀거리며 손을 들어 막았었는데, 그걸로 그런 건가. 그 뒤였다. 그녀조차 그를 피했다.
곰곰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 머리꼭지를 구경할 수가 없다. 아침엔 바빠 돌아볼 겨를이 없다 치고, 저녁엔 취기가 있으니 서로 내외한다 치고, 하지만 주말까지, 어쩌다 집에 쉬러 들어와 저녁을 먹는 오늘 같은 날조차 사람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너무하다.
식사가 준비되면 그녀는 늘 서재의 문을 ‘똑똑’ 노크하고 도망쳤다. 곧바로 나와 봤자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뒤다. 항상 집 안에 있으면서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피해 다녔다.
식사 중인 주인을 홀로 버려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이건 찬모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시혁은 울컥 화가 치밀어 그녀를 부르기 위해 목청을 돋우려다가 곧 눈앞에 대령되어 있는 숭늉을 발견하곤 다시 후우, 숨을 내쉬었다. 숭늉이 그를 비웃듯 김을 모락모락 뿜었다. 시혁은 찬물을 들이켰다.
“민수 씨!”
결국 민수를 불러들였다. 2층 계단 위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려던 민수가 그의 부름에 붙들렸다. 한 손으론 난간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걸레통을 쥐고 있었다. 청소를 하려는 모양인가. 그러고 보니 1층의 마루며, 나무로 된 손잡이 같은 것들, 가구들이 죄다 반들반들 윤이 났다.
느릴 땐 느리면서도 손은 무척 빨랐다. 예산댁의 빈자리를 메우다 못해 월등하다는 사실을 시혁은 애써 모른 체했다. 그 말간 얼굴을 보면,
‘집안일 중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쪽 손에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무렇게나 뱉었던 말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민수는 느린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더운 날씨에도 정강이까지 오는 또 다른 촌스러운 치마, 긴팔의 셔츠, 여전히 감겨 있는 목의 흰 손수건. 아무리 촌스러운 옷들로 무장하듯 휘감았다고 해서 낭창한 허리선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렇게 윤이 나도록 온 집 안을 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하려던 말을 깜빡 잊고 말았다. 이것도 분명 그녀를 위해 꺼낸 말이었으나 왠지 말투가 거칠게 튀었다. 시혁은 목청을 흠, 가다듬고 흐트러진 무언가를 추슬렀다.
“자주 쓰지 않는 곳의 청소는 따로 사람이 오잖습니까.”
예산댁은 시혁이 쓰는 곳들을 청소하고 간단한 세탁도 맡아 주고 있었다. 사실 찬모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시혁도 청소와 세탁을 하는 잡역부를 따로 두었었다. 하지만 문제의 스파이 사건을 함께 겪은 예산댁이 먼저 나서 주었다.
‘식구도 꼴랑 하나뿐인데, 뭐 할 일이 많이 있겠슈?’
‘내 아버지는 사람을 열둘도 더 씁니다.’
‘하하, 그래서 어르신은 진지도 더 많이 잡순대유? 그류, 사장님은 집에서 진지도 잘 안 잡수니, 그냥 지가 다 하고 말쥬.’
그래서 월급을 올려 인사치레를 하고 예산댁을 의지했다. 하지만 민수는 민수다. 부엌일 이외에는 못하겠다고 나선대도 할 수 없었고, 사실 그게 옳았다.
“일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까?”
민수는 고개를 돌린 채 까딱, 최소한의 표시만을 간단히 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말을 섞는 것도 거부당한 느낌, 그 묘한 불쾌감이 신경을 슬쩍 긁으며 그를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