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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이십사절 1권
1화

제1화 만남


절강성에 위치한 작은 어촌.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로 돌아온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곳을 회강현이라고 불렀다.
절강성 회강현에서의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 그것이 앞으로의 역사에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지는 당시에는, 적어도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제왕 혁련천세, 이십 년 전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제왕이라 칭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그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은 십 년을 넘기지 못했다.
고작 십 년 만에 그는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에서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 자신만의 성을 쌓고 그 성을 제왕성이라고 불렀다. 그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는 이미 광동성 전역에 제왕성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또한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제왕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단, 제왕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강서, 복건, 절강성 일대의 군소방파들을 제압하며 이들 네 개 지역을 아우르는 한 개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명실 공히 모든 무림인들이 인정하는 일세(一勢)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절강성의 마지막 희생양인 오도문(五刀門)과의 일전이 있던 날이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절강성의 패자로 군림해 온 오도문, 그런 오도문의 중심에는 문주인 오도추혼 문극인이 있었다.
문극인은 그날까지 단 한 번도 오초 이상 도법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오초를 펼치기 이전에 이미 승부는 끝이 났고, 승자는 항상 그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오도추혼(五刀追魂)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오도단혼도법(五刀斷魂刀法)은 소문처럼, 혁련천세에게도 실로 인상적인 도법이었다.
문극인은 그날 자신의 생애 최초로 오초의 도법을 모두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 최초로 오초 이상을 선보인 바로 그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짜릿한 승부가 있었던 그날, 혁련천세는 그 짜릿함 때문에 다소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뜬 마음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들뜬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다를 찾았다. 그런 그의 뒤를 두 명의 수하들만이 호위하며 따랐다.
바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벌써 불혹(不惑)의 나이, 세상에 뜻을 둔 지 이십 년, 비로소 일세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웃음을 조롱하며 보란 듯이 해내고야 말았다. 아니, 지금도 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된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해내고야 말겠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혁련천세는 그렇게 천천히, 정말 오랜만에 한가롭게 바닷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닷가에 한가롭게 낚싯대를 드리운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다와 소년, 소년과 낚싯대, 왠지 모를 묘한 친근감이 혁련천세의 가슴으로 찾아들었다.
혁련천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소년의 뒤로 다가갔다. 소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혁련천세의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런 혁련천세의 의도를 알아챈 두 명의 수하 역시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덕분에 소년은 한동안 그들의 등장을 알지 못했다. 그런 소년의 등 뒤에서 삼 인은 한참 동안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이 찾아왔다.
비로소 물고기의 입질이 시작된 것이었다.
평온하던 소년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번졌다.
짜릿한 손맛, 그리고 끌려오면서 퍼덕이는 물고기의 감촉. 하지만 소년의 미소는 그런 느낌에 대한 만족의 의미가 아니었다.
물고기를 건져 올린 소년은 재빨리 자그마한 소도(小刀)를 꺼내 들었다. 이내 소년을 바라보던 혁련천세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의 얼굴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년은 아직도 삼 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소년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소도가 천천히 물고기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혁련천세를 비롯한 삼 인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소년은 물고기를 먹기 위해 손질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물고기를 난도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피 흘리는 물고기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삼 인은 그런 소년의 눈에서 때때로 섬뜩한 광기마저 엿볼 수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보아 아마도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소년은 물고기를 그 살결대로 잘게 가르며 가능한 많은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
혁련천세의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수하 한 명이 부지중에 탄성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아, 천살성(天殺星).”
그의 말에 혁련천세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하의 말에 비로소 소년은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챘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삼 인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소도를 든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열 살 남짓한 소년, 그 소년의 시선에 스스로 제왕임을 자처하던 혁련천세가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왕임을 자처하던 그가 고작 어린 소년의 시선에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는 사실이 다소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런 혁련천세의 행동에 뒤에 선 수하들 역시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놀란 것은 바로 혁련천세 본인이었다.
“진정 천살성이라는 것인가?”
혁련천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살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놀라는 혁련천세를 소년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시죠?”
혁련천세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소년을 관찰하기만 했다. 소년 역시 혁련천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선 수하 한 명이 그런 혁련천세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살려 두면 분명 세상에 해악이 될 존재입니다.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일단 본 이상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혁련천세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런 수하를 바라보았다.
“놀랍군. 다른 사람도 아닌 모용백, 자네의 입에서 어린아이를 죽이자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정말 몰랐군. 진정 놀라워.”
혁련천세의 말에 모용백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제왕성의 군사 모용백,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왕성을 언급할 때마다 주저 없이 그를 혁련천세의 오른팔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의 말처럼 그가 제왕성의 대소사를 대부분 관장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다소 냉철하면서도 음침한 기운을 풍기고 있지만, 그런 외모와는 달리, 실제로는 수하들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너무나 다정다감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고작 열 살 남짓의 소년을 죽이자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존의 말씀처럼 그는 고작 열 살 될까 말까 한 소년입니다. 하지만 그 열 살 남짓한 소년이 보이는 살기에 지존이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는 사실을 상기하십시오.”
혁련천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내가 자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혁련천세의 말에 모용백이 당황하며 무릎을 꿇었다.
“신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저 아이를 살려 두기에는 그만큼 너무나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저 아이에게 가혹한 운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혁련천세가 또 다른 한 명의 수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막붕,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막붕,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 패도라는 두 글자를 붙이곤 했다.
패도 막붕, 그 별호처럼 그는 또한 다소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무공만으로 논한다면 그가 혁련천세를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의 가지고 있었다.
제왕삼주(帝王三柱), 오늘날 제왕성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을 칭하는 말이다. 제왕성주 혁련천세를 비롯해 모용백, 막붕을 가리켜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질문을 받은 막붕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모용백의 말처럼 다소 위험해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찌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막붕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혁련천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그렇겠지.”
순간, 지금까지 묵묵히 삼 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년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소년의 웃음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지금 삼 인은 분명 소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년 역시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터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는 한 치의 불안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는군요.”
소년의 말에 혁련천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리고 지긋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하긴 네 말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니지.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혁련천세가 이내 모용백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자네가 늘 하던 말이 떠오르는군.”
모용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혁련천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 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던가?”
혁련천세의 말에 모용백이 그 의도를 읽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오나 지존, 지금 지존과 소년의 만남은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곧 하늘이 소년의 명이 다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모용백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분명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내 혁련천세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놀라운 기도가 밖으로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왕의 기도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모용백과 막붕 정도 되는 인물조차 그 기세에 압도될 정도였다.
“모용백, 너는 지금 하늘이 고작 열 살 남짓의 소년을 죽이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 제왕 혁련천세가 고작 열 살 남짓한 소년을 죽일 운명이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진정 그런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혁련천세의 얼굴에 적지 않은 분노가 표출되고 있었다. 모용백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얼굴을 붉혔다.
혁련천세는 그런 모용백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모용백, 나는 제왕이다. 설사 저 아이가 천살성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나는 저 아이의 운명마저도 품에 안을 것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난세, 그 난세의 주역인 내가 가는 길은 필연적으로 피의 길. 자네의 말처럼 저 아이가 진정 천살성이라면 나와 함께 그 길을 갈 좋은 동반자가 되지 않겠는가?”
모용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막붕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소년과 혁련천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혁련천세가 다시 소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혁련천세의 놀라운 기도에도 소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혁련천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적지 않은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혁련천세의 제안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이내 소년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여전히 담담한 시선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아저씨와 함께 간다면 아저씨는 제게 무엇을 주실 건가요?”
소년의 질문에 혁련천세가 살짝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너의 눈에 이글거리는 그 욕망을 내가 질리도록 충족시켜 주마.”
소년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살기 가득한 그 어린 소년의 미소에서 모용백은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좋아요.”
소년의 흔쾌한 대답에 혁련천세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제2화 무서운 늙은이 자로(子路)


“모용백, 요즘 그 아이는 어떤가?”
혁련천세의 물음에 모용백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성주께서도 참 짓궂으십니다.”
혁련천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짓궂다는 말인가?”
모용백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불문의 반야심공(般若心功)이라니, 결국은 성주께서도 그 아이의 지나친 살기를 우려하신 것이 아닙니까?”
미소 짓는 모용백을 향해 혁련천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자네에게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네.”
모용백이 씁쓸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의 반야심공은 이제 겨우 삼성의 경지입니다. 하지만 그 살기는 오히려 예전보다 강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고작 반야심공 따위로 그 아이의 살기를 제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는지요.”
혁련천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모용백을 향해 말했다.
“삼 년 만에 삼성의 반야심공이라, 생각보다는 그다지 나쁘지 않군.”
이런 혁련천세의 반응에 모용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군을 바라보았다.
반야심공, 그것은 이름 그대로 불가의 반야심경의 내용을 근간으로 한 불문의 내공심법이었다. 비록 그 내용이 심오하기는 하지만 삼 년이라는 기간 동안 고작 삼성의 경지에 불과하다는 것은 결코 만족할 만한 성취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삼 년이라면 그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련천세는 나쁘지 않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모용백은 도무지 성주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이에 대한 성주의 기대가 고작 이것밖에는 되지 않았는가?’
모용백으로서는 이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혁련천세가 그런 모용백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는 그 아이를 자로(子路)에게 맡기도록 하지.”
순간 모용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주가 언급한 자로라는 인물은 바로 성의 화원을 담당하는 화원지기였다. 더구나 이미 육십을 훌쩍 넘긴 늙은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자에게 아이, 마우를 맡기려는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늙은이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말인가?’
모용백은 이런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확인하듯 혁련천세에게 물었다.
“자로라고 하면 성의 늙은 화원지기 자로 영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혁련천세가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알고 조치를 취해 주게. 그럼 자네는 그만 물러가 보게.”
혁련천세의 말에 모용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성주전을 물러나는 동안 모용백의 얼굴은 성주의 일련의 조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모용백이 물러가자 혁련천세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환사(幻士),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순간 천장의 벽면이 살아 있는 듯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백의의 복면인이 혁련천세의 앞으로 내려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모용백 말일세. 자네는 모용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환사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혁련천세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겠지. 하지만 그 뛰어남의 이면에 감추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환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저는 단지 성주님의 신변을 호위하는 그림자일 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혁련천세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천세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환사는 조용히 다시 천장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환사가 모습을 감추자 혁련천세가 씁쓸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아이와의 만남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군. 결국 하늘이 나 혁련천세의 세상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혁련천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