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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에딜린이 공방을 확장하고 가구의 공급을 확대함으로서 가구 하나하나의 단가는 그 희소성이 줄어 값이 떨어지긴 했지만, 떨어진 값에 비하여 생산량 증대로 인한 수익의 증가폭이 훨씬 컸기 때문에 테로이실 영지의 수입은 갈수록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사실 에딜린이 아이로에메의 레어에서 지니고 나온 귀금속을 푼다면 굳이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택하지 않고도 영지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댈 수 있었지만, 에딜린은 전생에서 경제학을 배워 본 입장에서 그렇게 출처 없는 막대한 자금이 시장에 풀릴 때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부실한 경제 토대 위에서 영지를 개발해 봐야 그 돈을 푼 값을 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필요할 때 어느 정도 꺼내 쓰기는 하더라도 우선은 영지 자체의 안정된 고유 수입을 계속 해서 창출해 내는 것이 중요했다.
에딜린이 다음 과제로 선택한 것은 출판업이었다.
“마법에 관해서 책을 좀 써 볼까 합니다.”
에딜린이 뜬금없이 마법서를 쓰겠다고 이야기하자 포 마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써서 어디다 쓰게?”
포 마델이 의아해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아뎀데나펜을 비롯한 대륙의 마법은 마나의 고갈로 인해 상당 기간 정체를 겪고 있었고, 수준이 저열해진 그나마 마법조차도 여기저기 세워진 학파에서 비전으로 직계 제자에게만 전수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마법을 전수할 대상도 없는 에딜린이 마법서를 쓰겠다고 하니 포 마델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제 고갈되던 마나가 돌아오고 있으니 곧 마법의 재흥(再興)이 다가오게 될 겁니다. 높지 않은 수준의 마법서를 써서 출판을 해 낼 생각입니다.”
“출판이라?”
포 마델에게는 출판이란 단어 또한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딜린 또한 아뎀데나펜어에는 없는 단어이기에 적절히 의미가 통할 정도의 신조어로 출판이란 말을 만들어 쓸 수밖에 없었다.
아뎀데나펜의 책은 양피지나 종이에 장식하고 필사한 책을 가죽 장정으로 엮어내는 방식으로, 몇 개 없는 대학과 마법학파, 그리고 신전에서 필경사나 신관, 혹은 마법사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배껴 낸 책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값이 비싸고 구하기도 힘들었는데, 높은 문맹율과 더불어 책과 그에 수반하는 지식들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출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제책(製冊)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는데, 제대로 된 필사본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명의 뛰어난 필경사들이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이기도 했기에 인쇄술을 이용해 대량으로 활자를 찍어 낸다는 발상을 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인쇄라는 것을 해 볼 생각입니다. 잉크를 묻히면 글자를 찍어 낼 수 있는 활자를 만든 다음에, 그것을 조판(組版)한 뒤, 잉크를 가득 먹이고 기름을 짜는 압착기로 종이 위에 눌러서 글자를 찍어 내는 겁니다. 일일이 글을 베끼지 않고서도 빠른 시간 내에 글을 찍어 낼 수 있지요.”
“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는지 모르겠군. 정말 대단한 발상이야. 그렇다면 책을 매우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겠구만!”
“우선은 종이를 만드는 일도 같이 시작해야 합니다. 일일이 비싼 종이를 사 와서 책을 찍어 내는 것보다, 나무가 풍부한 우리 영지에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에딜린의 계획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착수되었다.
제지공을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지만, 이미 높은 급료로 가구공을 비롯해 염료공, 무두장이를 테로이실 영지에서 불러 갔다는 사실은 로쉬엠에도 소문이 자자했기에 어렵사리 테로이실까지 종이를 만들러 오겠다는 사람을 구할 수는 있었다.
“먼 길을 와 줘 고맙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부족한 재주를 믿고 불러 주신 자작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노이 트라이보위를 통해 구한 이 제지공은 매우 젊은 나이의 청년이었는데, 금발의 고수머리를 가진 꽤나 호감 가는 얼굴의 미남이었다.
에딜린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청년은 싹싹한 미소로 예의를 차릴 줄 알았다.
“로쉬엠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조상은 로쉬엠 출신이 아니라 아들렙 공국의 향사 집안입니다. 그러나 내전 중에 가산을 잃고 조부께서 로쉬엠으로 들어와 제지업에 종사하게 되셨죠.”
“그렇다면 가산을 물려받아서 로쉬엠에서 제지업을 해도 좋을 텐데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
에딜린은 순수하게 이 금발의 고수머리 청년이 가진 내력이 궁금해졌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남에게 호감을 심어 주는 사람이었다.
“예. 아버지께서 제지 공방을 크게 하셨는데 이 공방을 탐낸 로쉬엠의 거상 루가멜 사도레가 의도적으로 고리대를 빌려 주고 그 이자가 불어나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공방을 삼켜 버렸습니다.”
“루가멜 사도레의 악명은 들리지 않는 곳이 없군.”
“돈을 그렇게 악착같이 모으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루가멜 사도레의 이름이 나오자 제지공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어쨌든 이제 우리 영지의 식구가 되었으니 여기서 새 출발해 보도록 하게. 이름은 무엇인가?”
“루덴 블라게네쉬입니다.”
“향사 집안 출신이라더니 성(姓)도 있었군.”
“미천한 집안이나마 자부심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예절을 차리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루덴의 자세가 에딜린은 내심 마음에 들었다.
젊은 제지공 루덴 블라게네쉬가 가진 기술은 아뎀데나펜에서도 가장 수준급의 제지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대에 걸쳐 아뎀데나펜 전역에 고급 종이를 공급해 오던 가문의 후계자다웠다.
루덴 블라게네쉬는 밤나무 골이 아닌 윗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근처에 있는 나무의 품종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수지의 함량이 적고, 섬유의 길이가 길며 밀도가 낮아 종이의 원료로 삼기에 적당한 가문비나무가 고지대인 윗마을에 가서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가문비나무의 수량은 벌채를 해서 종이를 생산해 내기에 충분한 정도였고, 그 양도 적당했다.
에딜린 또한 영지를 골고루 발전시키기 위해 이미 가구 산업이 정착한 밤나무 골에 또다시 제지업을 일으키지 않고, 제지업은 윗마을의 산업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종이가 생산되기 시작하면 아랫마을에서는 인쇄업을 시작해서 윗마을, 아랫마을, 밤나무 골이 각각 제지업, 인쇄업, 가구 공업으로 그 생업을 삼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과 같은 저밀도의 농업이나 목축으로는 영지의 살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딜린은 다시 가구로 벌어들인 돈을 들여 제지업을 위한 장비를 마련하고 윗마을 입구에 제지 공방을 지었는데, 제일 먼저 하던 일을 손 털고 이 제지업에 동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딜린과도 인연이 있는 아델리에의 아버지 넬이었다.
“루덴. 뭐 또 필요한 게 있는가?”
“아니요. 이제 슬슬 종이를 만들 준비는 다 된 것 같아요. 자작님께서 이래저래 신경 써주셔서 기구들을 마련해 주신 덕에 벌채만 시작되면 바로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험 삼아 종이를 조금 만들어 보고 있던 루덴을 넬이 찾아왔다.
언제나 인상 좋은 미소를 지닌 넬은 내심 이 씩씩한 청년의 진중한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괜찮은 사윗감도 드물다고 생각하고 물심양면으로 루덴을 돕고 있었다.
물론, 아직 아델리에에게는 소개도 시켜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음, 영주님께서 후한 급료를 주신다고 하니 목축 일은 집안의 아낙들에게 맡기고 윗마을의 남정네들은 모두 벌채를 하겠다고 나섰네. 이미 내가 사람을 모아 놓았으니 자네가 말만 하면 바로 온 산의 가문비나무를 뽑아서 오겠네.”
“하하. 그렇게 뽑으시면 나중에는 종이를 찍어 낼 나무가 없겠어요.”
“에이,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이 사람아. 허허!”
넬은 이 금발의 고수머리 청년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
밖에서 아델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심 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괜히 이제는 자작이 되어 귀족의 신분인 에딜린에게 노심초사 다가서지도 못하고 순정만 품은 채 끙끙거리는 아델리에가 걱정 되고 있었던 차였다.
더군다나 내심 언젠가 정신 차리면 사위로 삼아 볼까 생각했던 도뷜도 멍청하게 일을 저질러 버리고 노역살이를 하고 있으니 귀한 딸을 줄래야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멀쩡한 사윗감이 떡하니 눈 앞에 등장했는데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넬은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괜히 새참을 핑계 삼아 아델리에를 공방까지 찾아오도록 만든 것이었다.
“내 딸인가 보네. 배가 출출할 시간이라 자네와 같이 먹으려고 새참을 좀 싸 오라 했네만. 어떤가?”
“아, 저야 당연히 좋지요. 어서 들어오라고 하세요. 덕분에 맛있는 한 끼 먹게 되었습니다.”
“데리, 이쪽이다. 어서 들어오렴.”
사랑의 열병을 앓고서도 아직까지 풋풋함을 잃지 않은 아델리에가 새참 바구니를 들고서 제지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집에 와서 드시지 얼마나 먼 거리라고 여기까지 저를 부르고 그러세요?”
아버지가 괜한 일을 시킨다는 생각에 아델리에는 들어오자마자 투덜거리며 탁자에 먹을거리를 늘어놓는다.
“아, 저 안녕하세요. 넬 아저씨 따님이시라면서요?”
아델리에가 아버지에게 투덜대느라 미처 보지 못한 탓에 루덴이 먼저 인사를 걸어왔다.
아델리에는 새참을 늘어놓다 말고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그러니 웬 멀쩡한 청년 하나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안녕하세요. 이번에 종이 만들러 오신다는 그분이신가 봐요?”
“예. 루덴 블라게네쉬라고 합니다.”
두 남녀는 괜히 멋쩍은 듯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붉힌다.
그런 둘을 보고 있는 넬의 입가에는 드디어 웃음이 번진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사윗감을 찾았군!’
윗마을에서 종이 생산이 시작되자 인쇄 공방을 아랫마을에 설치하는 일만이 남게 되었다.
인쇄술이라는 것은 이 아뎀데나펜에 등장한 전례가 없는 일이니 만큼 어디서 직공을 구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에딜린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테로이실 영지에는 변변한 대장간 하나 없었기에, 큰 화로와 놋쇠를 부어 주물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루비외넨에 특별히 주문을 해서 활자를 맞춰 오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대장장이들을 좀 구해다가 제대로 된 대장간이라도 만들어야겠어…….’
언젠간 테로이실 영지에도 그럴싸한 대장간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에딜린이었지만, 우선은 아쉬운 대로 루비외넨 성에 주문을 해서 만든 활자로 시험 인쇄를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인쇄 장치는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를 짓이기는 압착기를 들여와 손을 본 다음에, 활판을 놓으면 잉크가 잘 찍혀 나오게 누를 수 있도록 고쳤다.
이렇게 대충 아쉬운 대로나마 조판장을 만들어 놓고 인쇄라는 것을 시작해 보았는데, 우선은 마법서의 출판은 미루고, 포 마델이 가지고 있던 서책을 시험 삼아 인쇄해 보기 시작했다.
“인쇄 결과가 상당히 좋은데요?”
“오, 이렇게 종이에 찍혀 나온 것을 보니 눈에 잘 들어오고 읽기도 편하구나. 거기다가 책을 보급하기 쉬울 테니 일석이조로군.”
포 마델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예전 마법 수련을 받던 시절에 두꺼운 마법서를 여러 권 필사해 본 경험이 있는 포 마델로서는 이런 기술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충분히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종이로 인쇄를 해 내더라도, 책을 제본하고 장정하려면 제책공이 필요하긴 할 게다.”
“활자를 주문한 루비외넨의 대장간에서 한 명을 수소문해 줬어요. 지금쯤 아마 우리 영지로 오고 있을 겁니다.”
“흠… 그거 잘됐군. 그래서 첫 책은 무엇으로 할 생각이냐?”
“마법서는 천천히 출판하도록 하구요. 우선은 할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책 중에서 ‘일곱 공국의 연대기’를 찍어 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일곱 공국의 연대기’라……. 그거 괜찮은 생각인 듯하다.”
‘일곱 공국의 연대기’는 130년 전, 리겔 공국의 학자 벤 제드게렙이 쓴 편년체의 역사서였다.
아뎀데나펜의 개국에서부터 구왕조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아뎀데나펜의 역사를 왕실과 일곱 공국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서술한 책이었다.
처음으로 찍어 낼 책이 정해지자 작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진행되기 시작했다.
밤나무 골의 가구 생산은 이제 완전히 정착이 되어 주민의 거의 모두가 가구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생산된 가구는 참나무 상회를 통해 로쉬엠으로 보내져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이렇게 얻어진 수입은 우선 제지업과 인쇄업에 투자되었는데, 윗마을의 제지업은 아직까지 종이를 생산해 외부에 판매한다기 보다는 인쇄를 위한 종이를 대어 주는 일에 치중하고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가 책으로 인쇄되어 팔리기 전까지는 수입으로 환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투자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제책공까지 합류하고 아랫마을에서 삯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간단히 아뎀데나펜 알파벳을 가르치고, 책을 조판하는 방법도 익히게 한 다음에 인쇄업에 투입했다.
인쇄기는 다섯 대가 설치되었는데 한 대당 식자공(植字工) 2인, 조판공(組版工) 2인과 인쇄기를 돌리는 일을 하는 도제 한 명을 포함해 다섯 명이 달라붙게 되었다.
이렇게 아뎀데나펜에서 최초로 책을 인쇄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허! 어떻게 책의 글씨가 이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지요?”
처음으로 인쇄된 ‘일곱 공국의 연대기’를 받아 든 노이 트라이보위는 책을 펼쳐 보고는 감탄을 면치 못했다.
노이 트라이보위 자신도 까막눈을 겨우 면한 처지기는 했지만, 인쇄된 책이 기존의 책과 어떤 면에서 다른 가치를 지니는지 알아볼 안목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어떤가? 팔아 볼 수 있겠는가?”
에델린의 물음에 노이 트라이보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죠. 물론 어차피 글을 읽은 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니 책을 살 수 있는 사람도 적겠지만, 이렇게 싼 값에 책을 찍어 낼 수 있다면 팔았을 때 남길 수 있는 이문은 지금 팔고 계신 가구 못지않을 겁니다.”
“그럼 가구와 같은 조건으로 계약해 주겠는가?”
“이번에는 제가 정하기에는 좀……. 저희 상단주가 자작님을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번 이쪽으로 찾아오게 한 다음에 이야기를 해 보시는 것이 어떠실는지?”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