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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엠페러 1
1화

Prologue



모용세가는 본디 5호 16국 시대에 연(燕)나라를 세운 왕족의 후예였다.
북위(北魏)에 멸망당한 후, 그들은 세세대대로 시종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모용세가는 연(燕) 황실 재건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암암리에 사람들을 규합하고 재물과 양식을 모으며 때를 기다렸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영원히 대륙을 제패할 것 같았던 수나라 황실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수나라 황제인 양제는 화북 지방과 강남 지방을 연결하여 대운하를 건설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대규모의 토목공사와 무리한 군사 활동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고구려 원정의 실패가 계기가 되어, 양제가 피살된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연국(大燕國)을 다시 세울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이에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명(慕容明)은 세력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키기 전날 밤.
그는 아내가 가져온 술을 마시고 쓰러지게 되었다.
“어째서…… 당신이?”
놀랍게도 술잔에 맹독을 탄 것은 그의 아내인 진옥비였다.
그녀는 더없이 슬픈 눈을 하고 탄식하듯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대연국을 다시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호수에 비친 달처럼 허망한 것이라 생각해 보진 않았나요?”
평소에 진옥비는 모용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것은 모용세가에서 수백 년간 품어 온 헛된 망상일 뿐이고, 나라를 되찾는 것은 가망이 없을 뿐 아니라 멸족을 자초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모용세가는 두 개의 파벌로 나눠지고 있었다.
급진파는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연(燕)나라를 다시 세우길 원했고, 온건파는 허망한 꿈을 좇기보다 현실적으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급진파의 파벌이 더 강해서 온건파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상황이 급변하게 되자 온건파는 난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모용명은 심계가 깊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으나 아내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한 사내였다. 아무리 강호에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친다고 해도, 아녀자(아내)까지 의심하는 것은 당당한 사내대장부답지 못한 행동이라 그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하하하! 한낱 아녀자의 옹졸함 때문에 수백 년을 준비해 온 대업이 무너지다니…….”
가주는 피 끓는 애통함에 탄식하며 울컥 피를 토했다.
붉은 피와 함께 녹아내린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본 진옥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이럴 수가?! 단순한 마비독이라고 했잖아요?”
침소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그의 숙부인 모용극이었다.
“미안하오, 가주. 그러나 가주를 막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소.”
모용명은 허망함에 그저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하늘은 곧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려는 듯했다.





Chapter 1.
이루지 못한 꿈, 이계에서 다시 꿈꾸기 시작하다



평등이란 단어는 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섯 개의 신분 계층으로 나뉠 뿐이다.
황족, 귀족, 사제, 평민, 노예.
그중에 가장 천한 신분인 노예는 영주의 재산으로 귀속되어 있다.
평생 영주의 땅을 일궈야 하고 각종 노역에 동원되지만 노예들에게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 제공된다. 또한 그들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가축처럼 거래되며, 혹사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절대로 주인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노예들에게 사소한 일로 주인에게 매질이나 폭행을 당하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럴 때는 그저 참아 내며, 되도록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주인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면, 노예에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으리라.
‘도대체 아가씨는 왜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제논은 영주의 막내딸인 네르시아 때문에 몹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가씨는 그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왔다.
그건 바로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그녀의 침실에 홍차와 찻잔을 가져다 달라는 황당한 요구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라는 것은 잠을 잘 시간이 줄이라는 말이었다. 원래부터 노예들은 충분히 자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기 때문에, 아가씨의 요구는 혹독한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인 건 제논이 남자라는 사실이다.
원래 귀족 소녀는 성인이 될 때가지 어떤 남성과도 접촉할 수 없었다. 정략결혼의 수단이 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첫날밤에 처녀의 몸이 아니란 것이 발각된다면, 혼인은 깨어지게 되고 가문 전체가 망신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귀족 집안의 아가씨를 시중드는 것은 항상 하녀들의 몫이었다.
새벽마다 아가씨의 시중을 든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발각될 경우, 제논은 끔직한 형벌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아가씨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어찌 한낱 노예의 몸으로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네르시아가 어서 이 고약한 장난에 싫증나길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오늘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제논은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아직 주위가 온통 깜깜했지만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늦어버릴 것이란 걸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켈슨이나 헤밀튼이 깨어나기 전에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피로에 못 이겨 늦게 일어났다간 아가씨에게 홍차를 가져다 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예 놈이 감히 주인의 명령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반쯤 죽도록 채찍질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둑고양이처럼 주방에 침입한 제논은 재빨리 홍차와 찻잔을 찾아 꺼내 들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숙련된 도둑과도 같았다. 이 짓을 한 달 이상 반복해 왔기 때문에, 야간 순시를 도는 경비대원들의 이동 경로는 제논의 머릿속에 숙지되어 있었다.
무사히 아가씨의 침소 앞에 도착한 제논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매일 새벽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는 항상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슴이 떨렸다. 발각되면 그대로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진짜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까칠한 네르시아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지옥문이 활짝 열릴 것이기에, 제논은 다시 긴장의 고삐를 바짝 조이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가씨. 접니다.”
“조금 늦은 거 아냐?”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아가씨.”
네르시아는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그를 바라보았다.
오웬 백작의 막내딸 네르시아!
백작이 낳은 자식은 아들만 9명, 딸은 16명에 달한다. 여성의 지휘가 낮고 하등한 존재로 여기는 제국의 풍토에 따라 그가 이름을 기억해 주는 딸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런 백작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만큼 네르시아의 아름다움은 일대에 정평이 났었고, 백작의 성에서 그녀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인들을 하찮게 보는 것은 물론 백작의 가신들까지 우습게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다들 백작의 눈치를 보느라 그녀가 억지스런 요구를 부리더라도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현재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
그러나 어린 소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보랏빛 하늘거리는 천으로 온몸을 휘감고 대륙 남동부에서 공수해 온 값비싼 향수로 매일 목욕하며 색색의 보석이 빼곡히 박힌 팔찌와 제국에 단 세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목걸이를 찰랑이는 네르시아 세뉴 오웬의 모습은 어린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화려하다.
하지만 순전히 화려한 치장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건 아니었다. 붉은 석류를 방불케 하는 도톰한 입술! 그와 대조되는 하얀 눈처럼 희고 깨끗한 피부! 허리까지 길게 기른 머리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웠고, 뛰어난 미인인 데보라 자작 부인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아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 없을 만큼 완벽한 미모!
이 정도면 오웬 백작이 아니라 세상 그 누구라도 빠져들 만하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얼굴에 속아선 안 된다. 그녀는 천사 같은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화가 나면 조금도 참지 못하는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부근에서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부친인 오웬 백작뿐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금속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하녀들을 마구 때리곤 했는데, 그녀의 채찍질에 맞아 죽은 하녀들도 몇 명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시중을 드는 하녀의 얼굴은 자주 바뀌게 되었다.
그러니 네르시아의 호통에 제논이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벌써부터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분노한 네르시아가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달린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장면이 선연하게 펼쳐졌다.
맨살을 파고드는 쇳조각의 그 진저리쳐지는 감촉이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 왔다.
그러나 그녀로선 드물게도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지, 바짝 긴장한 제논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어, 목이 칼칼하니 차나 한 잔 따라 줘.”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가씨.”
마치 필생의 역작을 그려내는 화공처럼 홍차를 우려내는 제논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사실 비천한 노예 신분인 그가 어디서 다도를 배웠겠는가? 기본 소양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그에게 찻잎을 제대로 우려내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제논은 네르시아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그런데 열중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했던가? 이상하게도 네르시아는 그런 제논의 모습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홍차를 우려내느라 아가씨의 그러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됐습니다. 한 번 마셔 보세요. 아가씨.”
제논은 조심스럽게 찻잔에 홍자를 따라서 네르시아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읏! 홍차가 너무 뜨거워.”
“죄, 죄송합니다. 다시 올리겠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죄하며 제논은 생각했다.
‘휴우, 또 시작이구나!’
네르시아가 이처럼 까다롭게 구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매번 홍차의 온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찻잔의 손잡이가 놓인 위치까지 트집을 잡곤 했다. 그러다가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느니 웃어 보라느니, 곤란한 요구로 실컷 그를 괴롭힌 후에야 겨우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도대체 비천한 노예 놈을 괴롭히는 게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제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네르시아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다시 끓일 필요 없어, 제논. 식혀서 마시지, 뭐.”
전에 없이 다정한 말투에 제논은 오히려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적중했다.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해, 제논. 사실은 그건 조금이라도 너와 오래 있고 싶어서 괜한 트집을 잡은 거야.”
“네? 그게 무슨…….”
“이렇게까지 말해도 못 알아듣다니! 바보 같아! 꼭 내 입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해야지만 내 마음을 알겠어?”
“…….”
네르시아의 충격적인 선언에 제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절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도 이보다 놀라진 않았으리라.
‘어쩌지? 어떻게 하지? 젠장…… 이대로 죽는 건가?’
제논은 이 사실이 발각되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하고 끝없는 절망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백하고 나니 후련한 듯 네르시아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사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남몰래 제논을 좋아해 왔다. 노예치고는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를 가진데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스치는 미풍처럼 감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천한 노예를 좋아한다는 점이 창피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녀는 오랫동안 혼자서 가슴앓이를 해 왔다.
물론 그녀도 하찮은 노예 따위를 좋아해선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떻게 될지 끝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춘기를 일찍 맞은 열세 살의 소녀가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열기를 무작정 억누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이외의 남자는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처지라, 더더욱 한 번 붙은 불길이 쉽게 꺼지질 않았다.
“사랑해! 제논.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아!”
열정적인 고백을 쏟아낸 네르시아는 다짜고짜 제논을 와락 껴안았다.
“엇?”
예기치 못한 뭉클한 감촉에 제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 역시 아직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게다가 노예들은 원래 완전한 성인이 되어 건강한 자손을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남녀가 따로 분리되어 생활한다.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때문에 그는 아직 한 번도 여체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하여도, 남녀가 서로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본능이 그에게 그녀를 탐하라고 명하고 있었다. 가슴 속 어디에 그런 충동이 숨어 있었던 것인지, 혈관속의 피가 일시에 뜨겁게 끓어오르고 알 수 없는 흥분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저항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갈망!
도저히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린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열적인 입맞춤을 했다.
“사랑해! 제논.”
“아아…… 아가씨!”
막힌 제방이 터진 듯 거침 없이 쏟아져 나오는 풋풋한 열정!
두 사람의 몸은 단숨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 그 안에서 가장 귀한 향료와 감미로운 음료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듯 제논을 매료시켰다.
마치 꽃의 달콤한 수액을 탐하는 꿀벌처럼!
그는 네르시아의 입술을 미친 듯 탐하며 입맞춤을 멈출 줄 몰랐다. 짜릿한 흥분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고 이 순간만큼은 아무도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서로를 탐하며 옷깃 속으로 파고든 손길은 아무 곳이나 함부로 더듬기 시작했다.
상상만으로 그려왔던 이성의 육체!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매끈한 여체와 노동으로 인해 생긴 탄탄한 근육! 손끝에 닿은 그 생생한 감촉에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샤락―!
순간 네르시아는 대답하게도 스스로 옷깃을 동여매는 천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어린 나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풍염한 가슴이 드러났다. 가슴에서 허리까지 흐르는 몸매의 자태는 빼어나게 수려했다.
“헉!”
숨이 탁 막힐 것 같은 아찔한 광경에 제논은 흠칫 놀라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자극이 너무 과한 탓일까? 뭔가 덜컥 겁이 난 그는 문뜩 제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이러다가 들키면 무슨 참혹한 짓을 당하고 죽게 될지 몰랐다. 잔혹한 광경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제논의 머릿속을 스쳤다.
해가 뜨면 녹아 버릴 눈처럼 덧없는 혈기 때문에 목숨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네르시아는 멈출 생각이 결코 없는 모양이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 일을 들켜 봐야 한차례 꾸중을 들으면 그뿐이니 제논과는 처지가 확연히 달랐다.
거기가 지금 그녀의 몸은 활화산처럼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아아…… 제논, 멈추지 마!”
“제발! 아가씨, 이것 좀 놓아 주세요!”
당황한 제논은 황급히 네르시아를 밀쳐냈다.
그런데 너무 당황했기 때문일까?
엉겁결에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네르시아는 와락 밀려나며 화장대에 쾅하고 부딪혔다. 그 바람에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와장창!
섬세하게 조각된 화병이 비명을 지르며 깨져 나갔다.
드워프가 세공한 듯 정교한 장인의 손길이 깃들어 있는 이 화병은 그녀의 열두 번째 생일을 위해 오웬 백작이 구해 온 고가품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화들짝 놀란 제논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수치심과 분노로 이미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네깟 놈이 나를 밀어내! 고작해야 비천한 노예 놈이…… 너 같은 건 죽어 버려!”
네르시아의 아름다운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히고 입가가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손에 집히는 물건을 그에게 마구 집어던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제논은 그저 죽을죄를 지었다며 엎드려 싹싹 빌 뿐이다.
그러나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지 결국 채찍을 들고 제논을 마구 후려쳤다.
쉐에에에엑― 쫘악!
공간을 가르며 날아온 채찍은 흉험한 소리를 내뿜으며 그의 등에 파고들 듯이 감겼다.
채찍에 달린 날카로운 쇳조각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채찍에 맞은 자리가 부풀어 올라 터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논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요,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죽어! 죽어 버려! 이 더러운 노예 놈아!”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네르시아는 좀처럼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마치 상처 입은 암사자처럼 포효하며 지칠 줄도 모르고 채찍을 휘둘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제논은 결국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의식을 잃은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소란을 듣고 찾아온 하녀들이 문밖에서 외쳤다.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네르시아는 악에 받힌 듯 표독스럽게 눈빛을 빛내며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어! 노예 놈이 날 겁탈하려고 해! 도와줘!”

결국 제논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은 영주가 애지중지하는 막내딸 네르시아.
한낱 노예에 불과한 제논은 항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죄인이 되었다.
그나마 현장에서 당장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은 공개적으로 처형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며칠 더 살아 있게 된 것이 결코 그에게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무자비한 폭력과 잔혹한 고문!
때문에 그의 몸은 철저히 망가져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잃었다.
온통 피와 상처로 뒤덮이게 되었고 속이 곪아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급기야 내장이 썩어가며 구더기가 잔뜩 들끓기 시작했다.
‘괴로워…… 누가 날 좀…….’
제논은 의지와 희망을 모두 잃었다.
마침내 심장이 서서히 제 기능을 잃고 있었다.
이러다간 공개 처형을 받기도 전에 죽을 판이었지만, 제논은 간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기력조차 없었다.
“허억, 꺼어…… 억.”
모두가 잠든 새벽.
제논은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심장박동이 느려지자 점차 뇌로 공급되는 산소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힘들게 호흡을 이어가려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점차 기력을 잃어 갔다.
눈앞이 서서히 흐려지며 곧 그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몸의 감각이 하나씩 사라지는 걸 느끼고 제논은 무한한 공포에 휩싸였다.
‘사, 살려 줘! 숨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제논은 결국 힘없이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죽음!
고작 어린 계집의 하찮은 사랑놀이(?) 때문에 한 생명이 죽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네르시아가 죄책감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귀족들에게 노예는 단지 말을 할 줄 아는 가축일 뿐이다. 기르던 개가 주인의 손을 물면 당연히 미친개를 죽여야 한다.
네르시아에게 제논의 죽음은 한낱 그 정도 일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놀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꿈틀!
갑자기 제논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정지되었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하며 그는 고통에 신음을 흘렀다.

“으윽…… 어떻게 된 거지? 난 아직 죽지 않은 건가?”
기적과도 같은 소생이었으나 제논의 몸을 차지한 건 그가 아니라,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명(慕容明)이었다.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의 손에 독살당한 바로 그 모용명!
본능적으로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리려 하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내 몸이 아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운기를 하지 않은 몸처럼 혈맥이 굳어 있고 단전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모용명은 자신이 차지하게 된 몸은 무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크윽!”
그때 갑자기 지독한 두통이 그를 덮쳤다.
어이없게 생을 마감한 제논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올랐다. 뇌에 과부하가 걸리며 지독한 통증을 유발했다.
무려 15년간의 기억!
한 번에 감당하기엔 너무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다행히 제논은 비천한 농노였기 때문에 일상이 몹시 단조로웠다.
모용명은 엇비슷한 기억 따윈 가차 없이 버리고 필요한 정보만 선택했다.
필요한 정보라고 해 봤자 대륙의 공용어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제논은 기본적인 소양 따위는 없는 천박한 노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기억을 수습하자 머리를 생으로 쪼개는 듯했던 통증이 사라졌다.
이 육체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더없이 분명해졌다.
“결국…… 나는 죽었군!”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의 손에 죽게 되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그는, 더없이 참담하고 허망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까지 허망함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새롭게 얻은 몸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다시 죽음을 경험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비참하게 죽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인지 모용명은 생(生)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반드시 살아남아 이곳에 대연국(大燕國) 세우리라!
모용명에게 그것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었다.
‘중원 대륙이 아니면 어떤가? 이곳에서 대연국을 다시 세우리라. 연(燕) 황실의 후손인 내가 세우는 나라가 곧 대연국이다!’
모용명은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뜨거운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모용세가의 가주로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그로서도, 망가진 몸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난감함을 느꼈다.
우선 한 줌의 내공도 없으니 진기요상술(眞氣療傷術)을 펼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단전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이 몸뚱이는 폐를 다쳤는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공심법은 본디 호흡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숨을 쉴 수 있어야 운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흐어…… 허어어…….”
모용명은 숨을 들이쉬기 위해 젖 먹던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한때 황실을 뒤엎고 대연(大燕)의 황제가 되고자 하던 그가, 호흡 하나 제 의지대로 하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었으나 모용명은 좌절하지 않았다.
‘딱 한 번이면 돼! 한 호흡만!’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인지 마침내 그는 억지로 한 호흡을 들이켤 수 있었다.
“후읍!”
그는 호흡에 의념(意念)을 실었다. 의념이 실린 호흡은 진기(眞氣)가 되어 단숨에 기경팔맥을 파고들었다.
원래는 시간을 두고 망가진 혈도를 뚫어야겠지만, 당장 숨이 꼴깍 넘어갈 판이라 모용명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역기충혈대법(逆氣充血大法)으로 단숨에 혈도를 뚫는다.’
역기충혈대법!
그것은 잠력(潛力)을 한 번에 격발시키는 사악한 마공으로, 선천지기를 갉아먹어 수명을 단축시키고 심하면 폐인이 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과감하게 목숨을 건 승부수를 띄웠다.
파아앗―!
소리 없는 진기의 폭발이 그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끔찍한 고통과 함께 핏물이 식도를 역류했지만, 모용명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운기 도중에 소리를 내거나 하면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격발된 진기가 난폭하게 혈도를 꿰뚫었고 순식간에 일주천에 성공했다. 진기를 아래쪽으로 이끌자 쌀알 한 톨 만한 단전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