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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엠페러 3
1화
Chapter 1.
악마의 해역
제라드 백작의 군선들은 바다 한복판에서 거대한 폭풍우에 휘말리게 되었다. 선원들과 병사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 폭풍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대자연의 힘을 거스르기엔 역부족!
엄청난 파도에 휩쓸린 선박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실 안의 두 남녀는 뜨거운 정염을 불태우고 있었다.
열정적인 입맞춤으로 시작된 이 불길은 살과 피를 타고 흐르며 두 사람의 몸을 모조리 태워 버릴 듯 격한 충동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
“하악!”
아밀리에는 교성인지 비명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는 언뜻 물기가 비치더니 고운 속눈썹에 기어이 작은 이슬이 맺혔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듯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황홀한 열망이 화려한 꽃처럼 피어나며 머리가 핑 도는 듯 아찔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마치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가녀린 떨림과 황홀한 열기를 내뿜는 숨결에 자극을 받은 사내의 몸짓이 더욱 격렬해졌다.
겉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농염한 광경이지만 실은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아밀리에의 정체가 바로 뱀파이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뱀파이어의 본능에 지배되어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동안 금침대법으로 억제되고 있던 본능이 둑의 제방이 터진 듯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며 그녀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들끓는 정염은 오직 사내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일 뿐!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거미처럼 자신에게 매료된 사내의 피를 마음껏 마시고 혈관이 모조리 타 버리는 듯 지독한 갈증을 풀어야 했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밀리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상황에서도 흡혈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본능을 가로막는 건 사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
그 사무치는 마음은 모용명이 펼친 미혼술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더없이 진실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뱀파이어의 본능만 남은 이 상황에서 사내의 피를 취하는 걸 어찌 거부하려 하겠는가?
하지만 뜨거운 피를 마셔야 살아갈 수 있는 건 뱀파이어 혈족의 숙명!
사내에 대한 열정만으로 본능을 거스르는 건 더없이 힘든 일이었다.
갈증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었다. 입에 고인 피를 꿀꺽 삼키자 잠시 갈증이 수그러들며 희미하게 이성이 돌아왔다.
‘안 돼! 참아야 해!’
아밀리에는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이성이 돌아온 순간은 아주 잠시뿐!
멈칫하던 그녀는 다시 모용명의 동맥을 노리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이 동맹을 꿰뚫기 직전 다시 주춤 물러나며 정신 차리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그렇게 본능과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거친 파도가 쉴 새 없이 선박을 후려치고 있었다.
슈아아아― 콰앙!
거센 파도가 직격할 때마다 선체 곳곳이 부서졌고 차가운 바닷물이 갈라진 틈을 비집고 선실로 쫘악 쏟아져 들어왔다.
‘으으…… 더 이상 못 버텨! 아아!’
아밀리에의 눈빛이 짙은 자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결국 흡혈의 본능에 완전히 장악당한 그녀는 입을 벌리며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카아아아아!”
아밀리에는 모용명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이제 아주 살짝 힘을 주기만 하면 그걸로 끝.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경동맥을 꿰뚫으나 비릿한 붉은 피가 치솟는 바로 그 순간! 전에 없이 거칠어진 파도가 선체를 때렸다.
슈아아아아아― 콰콰콰앙!
직격당한 부위가 우지끈 부서지며 선체 외벽에 쩌쩍 금이 갔다. 공교롭게도 갈라진 범위에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선실도 포함됐다.
쫘아아악―
바닷물이 갈라진 틈을 벌리며 세찬 기세로 밀려 들어왔다.
그러는 바람에 차가운 바닷물을 흠뻑 뒤집어쓴 두 사람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파앗! 팟! 팟! 팟!
“까악!”
모용명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마혈을 순식간에 짚어 버렸다.
혈도가 마비된 아밀리에는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지며 선실 바닥에 쓰러졌다. 선실 안에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들이차고 있어서 그녀의 몸은 곧 물속에 잠겨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밀리에의 사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찢어진 경동맥을 통해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와 바닥에 쫘악 쏟아졌다.
모용명은 경동맥 주변의 혈도 몇 군데를 눌러 다급히 출혈을 막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절맥이 다시 도진 건가?’
이때까지도 그는 귀음절맥이 완치되지 않고 다시 도진 것이라 생각했을 뿐 아밀리에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여하튼 모용명은 그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침수를 막기 위해 곧 선실을 폐쇄할 것이다!’
선원들이 격벽(칸막이)을 내리기 전에 신속히 몸을 빼내야 했다. 잠시 지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사이에 바닷물이 허리까지 들어찼다.
첨벙!
모용명은 물속에 잠수하며 아밀리에를 찾아 품에 안은 뒤 곧바로 수공(水功)의 일종인 이추유영신법(鯉鰍遊泳身法)을 펼쳐 선실 바깥으로 헤엄쳐 나갔다.
드르륵― 드득!
그런데 한발 늦은 건지 이미 선원들이 격벽을 내려 선실을 차단하고 있었다.
“멈춰라!”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지만 선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선벽을 내려 버렸다.
쿠궁!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외쳤기 때문에 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다만 선원들은 침수를 막기 위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을 희생시키기로 결정 내린 것이다.
쫘아악―
그사이 선실 안은 바닷물로 빈틈없이 들이찼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방식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이해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의 문제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된 이상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뱃놈들 따위가 감히 이 몸을 희생시켜 살아 보겠다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 격벽을 부수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수밀격벽이 부서지면 자칫 선체 전체가 침몰할 위험도 있었지만 모용명은 주저 없이 격벽을 향해 장력을 격발했다.
슈아아아아― 콰아앙!
장력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격벽은 우지끈 소리가 나며 구겨지긴 했지만 단번에 부서지진 않았다. 두꺼운 격벽 안에 금속 보강재가 그물처럼 얽혀 있어 충격을 분산했기 때문이다.
꾸르륵―
벌써부터 숨이 가빠 오는지 아밀리에가 코와 입으로 물을 들이켜며 고통스러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용명은 격벽을 향해 쇄심장을 연거푸 날렸다.
슈아아― 콰아아앙! 콰아앙!
거듭되는 충격에 결국 격벽이 부셔져 나가며 석실 안에 들이찼던 물이 사방으로 쫘악 퍼져 나갔다.
“푸아압!”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두 사람은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으앗! 격벽이 부서졌다!”
“어서 복도를 폐쇄해!”
드르륵― 드득!
모용명은 선원들이 다른 격벽을 내리기 전에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 것처럼 재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절반쯤 닫히고 있는 격벽 아래를 스치듯 통과했다.
쫘아아악―
그때 선원들 몇몇이 그를 알아보며 외쳤다.
“엇? 시온 님, 아니십니까?”
이번 해적 토벌에서 모용명의 활약이 가장 눈부시게 두드러졌기에 하찮은 선원들조차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선실이 몇 구역이나 폐쇄된 건가?”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선원들은 그가 기사 신분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그건 아직 파악 중이라…….”
한 놈이 어리바리하게 어물거리자 곁에 있던 선원들 중 하나가 답답한 듯 나서며 씩씩하게 말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침몰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선수(선박의 앞머리) 쪽으로 배가 조금씩 기울고 있어서 위험합니다!”
선체의 한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물이 침수될 경우 당연히 한쪽으로 가라앉게 된다.
지금은 앞머리 쪽이 약간씩 기울고 있는데, 이렇듯 선수가 곤두박질치듯 기울고 선미가 높이 들리게 되면 선박 중앙 부분쯤에 1평방인치당 수십 톤(t)이나 되는 엄청난 압력이 가해진다.
원래 배는 물 위에 뜬 채 항해하는 상태를 기본 조건으로 설계된다. 때문에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높은 압력 또는 무게가 선체 중앙에 쏠리게 되면 견디지 못하고 휘거나 우지끈 부러져 두 동강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씩씩한 선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침수되고 있는 선실부터 차단시킨 후에 나머지 선실들의 격벽도 모두 내려 두라는 선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군. 아마도 제라드 백작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겠지?’
격벽을 무작정 내린다면 침수된 구획에 있는 자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만 배가 침몰하거나 한쪽으로 기우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런데 혹시 내 일행들은 보지 못했나?”
“일행분들이시라면…….”
모용명의 갑작스런 질문에 선원은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어리바리했던 뱃사람이 끼어들며 말했다.
“제가 저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
‘무사하다니 그걸로 됐어. 찾아가 보는 건 나중에!’
그쪽에는 무지막지한 내공을 보유한 윈프레겐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신경을 꺼 두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때 거친 파도가 또다시 선체 옆구리를 후려쳤다.
슈아아아아― 콰아앙!
“어엇!”
충격에 금방이라도 선체가 두 동강 날 듯 흔들렸다. 선원들은 미끄러지며 바닥에 쓰러졌지만 무릎 높이까지 물이 들이차 있어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 선원들과는 달리 재빨리 보법을 펼치며 중심을 잡은 그는 모든 구역이 폐쇄되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침수되기 쉬운 외판(선실 외곽을 이루는 판)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선실을 찾아야 한다!
비어 있는 선실 하나를 발견한 모용명은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거친 파도에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선실 안의 물건을 전부 문 밖으로 내던진 뒤 문을 잠갔다.
덜컥!
그는 복도에서 챙겨 온 밧줄을 꺼내 선실 안의 기둥에 아밀리에를 단단히 묶었다. 마혈을 점혈당한 그녀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모용명은 아밀리에의 맥문(脈門)을 움켜쥐고 진기를 흘려보내 기혈(氣穴)을 살펴보았다. 맥이 일정하지 않고 몸이 아주 차가웠다.
‘얼굴은 창백하고 손발이 차가우며 의식이 혼미한 것을 보면 귀음절맥의 증상과 비슷하지만,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실수 없이 펼쳤는데 어찌 완치되지 않은 것일까?’
이때까지도 모용명은 아밀리에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뱀파이어라는 이유로 그가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을 멀리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뭔가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 건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용명은 그녀의 뒷머리에 있는 옥침혈을 가볍게 누르며 내공을 주입해 뇌혈(腦血)을 자극했다.
진기로 혈도를 강하게 자극하자 그녀는 잠시 정신이 되돌아왔다.
“으윽!”
“정신이 좀 들었나? 물어볼 것이 있으니 솔직하게 대답해 봐!”
“네…… 말씀하세요.”
“아까 선실 안에서 내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리고 귀음절맥이 아니라면 네 특이한 증상들은 뭐지?”
아밀리에는 흡혈 충동에 이성이 마비된 채 무의식중에 그를 유혹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부끄러움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열정과 격한 충동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 그 순간! 아직도 그 격정의 흔적이 하복부 안쪽에 저릿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이미 우리는 함께 돌이길 수 없는 경계를 지났어! 이제 시온 님에게 내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놔야지.’
“사실 전 뱀파이어예요. 뱀파이어 혈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아밀리에는 차분한 음성으로 감추고 있던 모든 것들을 밝혔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듣고서야 모용명은 자신이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귀음절맥이 아니었군. 뱀파이어라……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뱀파이어는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높고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갈 수 있는 등, 뛰어난 종족이지만 흡혈 본능 때문에 인간에게 배척당하게 되었다.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으로 종족 특성을 억누를 수 있지만 그것도 일시적으로만 효과가 지속될 뿐이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녀에게 주기적으로 인간의 혈액을 공급하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그건 언젠가는 들킬 위험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선박은 조금씩 폭풍우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직 파도와 바람의 기세는 거칠었지만 선체의 흔들림이 서서히 약해지는 것을 선실 안의 사람들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밀리에에게 금침대법을 펼친 후 약 보름 정도가 지났나? 다시 대법을 펼쳐도 고작 그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다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유능한 수하인 그녀를 버릴 수는 없다.
모용명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아밀리에! 흡혈 본능을 억제할 다른 수단을 찬찬히 연구해 보도록 하자.”
“다른 수단이라면 무슨?”
“우리에겐 아직 익히지 못한 고대마법과 암흑 교단의 흑마법이 있으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연구하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 거다.”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모용명은 잠깐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야 해! 열흘에 한 번씩 금침대법을 펼치는 건 부담이 너무 크다.’
대법을 펼치면 한동안 내공의 회복 속도가 평상시의 3배 정도 느려지는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흡혈 본능을 억누르는 가장 확실한 조치는 음양화합을 통해 혈맥에 양강(陽剛)의 진기를 주입하는 것이지만 당당한 대연 황실의 후예로서 어찌 수하와 정을 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그것은 스스로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사실 모용명은 그녀와 함께 구름과 비바람이 된 듯 폭풍 같은 격정의 순간을 보냈지만 마치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 겪은 일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그것은 매혹(Fascination)의 능력이 가진 특성 중 하나다. 만약 뱀파이어에게 매혹당한 먹잇감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일이 벌어져도, 그간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 못하므로 교단에 신고하거나 떠벌리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으로 그는 음양화합이란 손쉬운 방법 대신 금침대법을 다시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은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펼쳐 흡혈 본능을 억제해 두도록 하자.”
“네! 알겠어요. 시온 님.”
모용명은 대법을 펼치는 동안 외부의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 밧줄로 그녀와 자신의 몸을 한데 묶었다.
아밀리에는 그와 밀착하게 되자 격정과 환희의 그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 말하거나 움직여선 안 된다.”
“네! 꼼짝도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세요.”
간단히 주의를 준 모용명은 즉시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펼쳤다.
파앗! 파앗!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62개의 바늘이 모두 꽂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아랫배에 손바닥을 붙이고 적양신공의 강맹한 내공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1각(15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전신혈맥을 모조리 뚫을 수 있었다.
파박! 파박!
혈도에 양강의 진기가 가득 차며 압력이 증가하자 몸에 꽂힌 바늘이 동시에 튕겨 나가며 암기처럼 날아가 벽에 박혔다.
이것으로 응급조치는 마친 셈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기혈이 막히며 뜨거운 피를 갈구하게 되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대법이 모두 끝나고 잠시 만에 그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자 아밀리에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괜찮아요? 시온 님.”
“그럭저럭.”
‘이것도 두 번째 펼치는 거라 그런지 조금 익숙해진 것 같군. 지난번보다는 진기의 소모가 적은 편이구나!’
모용명은 대법을 펼치느라 소모된 공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선체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밧줄로 몸을 고정시켰으나 외부의 충격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운기는 되도록 짧게 끝내는 것이 좋겠군.’
그렇게 모용명이 운기에 집중하는 동안.
뱃사람들과 군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힘을 합친 결과 백작의 군선들은 드디어 폭풍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슈아아아― 철썩!
집채만 한 높이의 파도와 칼날 같이 매서운 바람이 조금씩 기세를 잃기 시작하더니 먹구름이 흩어지며 그 사이로 태양의 밝은 빛이 넘실대는 파도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해졌다.
하지만! 태양 아래 드러난 선체의 처참한 광경은 그간의 악몽 같은 일이 결코 꿈이 아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갑판 위의 구조물은 처참히 으스러지고 돛대도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선박 외벽 곳곳에 금이 가고도 아직 침몰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하고 기특할 정도!
여하튼 그 지독한 폭풍우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기적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폭풍우를 빠져나온 선박은 단 3척뿐! 이번 해적 토벌에 12척의 군선들이 동원된 것을 생각하면 무려 7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열둘에서 셋을 빼면 아홉 척의 손해구나.’라는 식으로 계산될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군선 한 척을 건조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 또는 기술력의 집약을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실로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간신히 침몰되지 않은 선박들도 그리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세찬 파도에 연속적으로 타격을 받은 결과 선체 곳곳에 충격이 누적되었다. 여기에 다시 약간의 충격만 더해져도 파괴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게다가 격벽을 모두 내려 침수를 막았지만, 수압 때문에 미세한 틈으로도 바닷물이 계속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휘이이익― 쫘악!
채찍으로 갑판 바닥을 한 차례 후려쳐 주의를 환기시킨 선장은 선원들을 독려했다.
“바닷물을 퍼내라! 죽고 싶지 않으면 부지런히 움직여!”
제라드 백작도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돕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느릿느릿 게으름 피우는 자들은 군벌로 다스리겠다!”
“네! 백작님.”
선장과 백작을 비롯한 지휘부들은 눈에서 독기를 내뿜을 뜻 서슬 퍼런 눈빛으로 사람들을 감독하며 위협했지만 침수된 물을 퍼내는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사력을 다해 거친 폭풍우를 빠져나오느라 모두들 물을 먹은 솜처럼 노곤하게 지쳐 축축 늘어졌고 물을 빼내는 펌프도 파도에 휩쓸러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 버렸다.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어찌 물을 퍼내랴?
뱃사람과 병사들이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선박으로 유입되는 물이 퍼내는 양과 비슷해 작업은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선장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제라드 백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작님! 이런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침수 문제도 걱정이지만 선박 전체가 두 동강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을 여러 차례 받았기 때문에 잔잔해진 파도에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곧 어딘가 크게 붕괴될 겁니다.”
“으음…….”
선장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한참 동안 고민하던 제라드 백작은 무슨 결단을 내렸는지 눈빛을 싸늘히 빛내며 입을 열었다.
“즉시 물질에 능한 선원들을 아래로 보내 노를 젓게 하라!”
돛대(Mast)가 모조리 부러졌으니 선체를 움직이려면 노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그곳은 지금 물에 잠겨…….”
선체의 격벽은 모두 내렸다고는 하나 미세한 틈으로 바닷물이 계속 유입되고 있었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선실 맨 아래부터 침수될 수밖에 없었다.
바닷물이 온통 들어찼을 터인데 어떻게 노를 젓는다는 말인가?
선장의 말허리를 잘라 먹은 제라드 백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물질에 능한 선원들을 보내라고 하지 않았는가?”
꿀꺽!
백작의 거듭되는 지시를 듣고 선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제야 선원들을 모조리 수장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배를 움직이겠다는 제라드 백작의 지독한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즉시 명령을 이행하게!”
“네! 알겠습니다.”
선장은 백작의 지시대로 선원들을 독려했다.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자들에겐 가차 없이 채찍을 후려쳤다.
쉐에에에― 촤아악!
“크아아악!”
채찍을 끝에 달린 날카로운 금속들이 등판을 가르며 지나가자 처참하게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지며 갑판 바닥을 더럽혔다.
채찍질까지 해 가며 사지로 내몰다니 참으로 악랄한 짓이지만 제라드 백작은 이보다 더한 짓을 했다. 그는 아직도 머뭇거리는 선원들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파악!
잘려 나간 머리통이 갑판 바닥을 뒹굴며 절단된 동맥에서 피가 솟구쳤다.
백작은 코어(단전)를 마나를 끌어내며 머리통을 힘껏 짓밟았다.
콰직!
단단한 두개골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으깨진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항명하는 놈은 베겠다!”
흠칫 놀란 선원들은 선실 아래로 후다닥 내려갔다.
백작은 호위하듯 그를 둘러싼 기사들 중 한 명을 지목해 명령을 내렸다.
“뒤쫓아 가서 머뭇거리는 자들의 목을 베라!”
“네! 백작님.”
불쌍한 선원들은 하는 수 없이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그들은 바닷물에 잠긴 상태로 노를 저었다.
물질에 능한 선원들도 숨을 쉬지 않고서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거기에 노를 젓느라 힘을 쓰다 보니 버티는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꾸르륵―
호흡이 다하게 된 선원들은 황급히 물속을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그사이 꾸준히 유입된 바닷물 때문에 들어갈 때보다 수위가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선원들 중 약삭빠른 몇몇은 선체 외벽의 벌어진 틈을 비집고 바다로 나갔다. 복잡하게 꼬인 선실 복도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닷물 속에는 거친 수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폭풍우의 영향권을 벗어났다고 해도 평소에 비하면 파도가 거칠었던 것이다.
수류에 휘말린 선원들을 선체 외벽에 세차게 내동댕이쳐졌다.
콰앙!
두개골이 으드득 부서지며 바닷물 속에 붉은 피가 꽃처럼 피어났다.
화려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죽음.
그렇게 수많은 선원들을 사지로 내몰렸건만 별 소득은 없었다. 노를 젓는 것보다 헤엄쳐 들어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침수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뜻!
부력의 크기는 그 물체가 밀어낸 물의 무게와 같다. 침수가 심해질수록 자연히 선박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초초해진 제라드 백작은 큰 소리로 선장에게 물었다.
“무슨 다른 방법은 없겠나?”
백작의 날카로운 시선에 주눅이 든 선장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저로서도…….”
제라드 백작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선장을 답답하다는 듯 노려봤다. 그리고 무어라고 다시 말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선체가 앞쪽으로 기울었다.
뱃머리가 곤두박질치듯 주저앉으며 마치 곡예라도 선보이듯 선미(선박의 뒷부분)가 번쩍 들렸다. 선박 중앙에 수천 톤(t)에 달하는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자 선체가 금방이라도 두 동강날 듯 휘어졌다.
끼이― 끼기기기―!
1화
Chapter 1.
악마의 해역
제라드 백작의 군선들은 바다 한복판에서 거대한 폭풍우에 휘말리게 되었다. 선원들과 병사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 폭풍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대자연의 힘을 거스르기엔 역부족!
엄청난 파도에 휩쓸린 선박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실 안의 두 남녀는 뜨거운 정염을 불태우고 있었다.
열정적인 입맞춤으로 시작된 이 불길은 살과 피를 타고 흐르며 두 사람의 몸을 모조리 태워 버릴 듯 격한 충동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
“하악!”
아밀리에는 교성인지 비명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는 언뜻 물기가 비치더니 고운 속눈썹에 기어이 작은 이슬이 맺혔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듯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황홀한 열망이 화려한 꽃처럼 피어나며 머리가 핑 도는 듯 아찔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마치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가녀린 떨림과 황홀한 열기를 내뿜는 숨결에 자극을 받은 사내의 몸짓이 더욱 격렬해졌다.
겉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농염한 광경이지만 실은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아밀리에의 정체가 바로 뱀파이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뱀파이어의 본능에 지배되어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동안 금침대법으로 억제되고 있던 본능이 둑의 제방이 터진 듯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며 그녀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들끓는 정염은 오직 사내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일 뿐!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거미처럼 자신에게 매료된 사내의 피를 마음껏 마시고 혈관이 모조리 타 버리는 듯 지독한 갈증을 풀어야 했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밀리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상황에서도 흡혈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본능을 가로막는 건 사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
그 사무치는 마음은 모용명이 펼친 미혼술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더없이 진실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뱀파이어의 본능만 남은 이 상황에서 사내의 피를 취하는 걸 어찌 거부하려 하겠는가?
하지만 뜨거운 피를 마셔야 살아갈 수 있는 건 뱀파이어 혈족의 숙명!
사내에 대한 열정만으로 본능을 거스르는 건 더없이 힘든 일이었다.
갈증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었다. 입에 고인 피를 꿀꺽 삼키자 잠시 갈증이 수그러들며 희미하게 이성이 돌아왔다.
‘안 돼! 참아야 해!’
아밀리에는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이성이 돌아온 순간은 아주 잠시뿐!
멈칫하던 그녀는 다시 모용명의 동맥을 노리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이 동맹을 꿰뚫기 직전 다시 주춤 물러나며 정신 차리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그렇게 본능과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거친 파도가 쉴 새 없이 선박을 후려치고 있었다.
슈아아아― 콰앙!
거센 파도가 직격할 때마다 선체 곳곳이 부서졌고 차가운 바닷물이 갈라진 틈을 비집고 선실로 쫘악 쏟아져 들어왔다.
‘으으…… 더 이상 못 버텨! 아아!’
아밀리에의 눈빛이 짙은 자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결국 흡혈의 본능에 완전히 장악당한 그녀는 입을 벌리며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카아아아아!”
아밀리에는 모용명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이제 아주 살짝 힘을 주기만 하면 그걸로 끝.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경동맥을 꿰뚫으나 비릿한 붉은 피가 치솟는 바로 그 순간! 전에 없이 거칠어진 파도가 선체를 때렸다.
슈아아아아아― 콰콰콰앙!
직격당한 부위가 우지끈 부서지며 선체 외벽에 쩌쩍 금이 갔다. 공교롭게도 갈라진 범위에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선실도 포함됐다.
쫘아아악―
바닷물이 갈라진 틈을 벌리며 세찬 기세로 밀려 들어왔다.
그러는 바람에 차가운 바닷물을 흠뻑 뒤집어쓴 두 사람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파앗! 팟! 팟! 팟!
“까악!”
모용명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마혈을 순식간에 짚어 버렸다.
혈도가 마비된 아밀리에는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지며 선실 바닥에 쓰러졌다. 선실 안에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들이차고 있어서 그녀의 몸은 곧 물속에 잠겨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밀리에의 사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찢어진 경동맥을 통해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와 바닥에 쫘악 쏟아졌다.
모용명은 경동맥 주변의 혈도 몇 군데를 눌러 다급히 출혈을 막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절맥이 다시 도진 건가?’
이때까지도 그는 귀음절맥이 완치되지 않고 다시 도진 것이라 생각했을 뿐 아밀리에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여하튼 모용명은 그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침수를 막기 위해 곧 선실을 폐쇄할 것이다!’
선원들이 격벽(칸막이)을 내리기 전에 신속히 몸을 빼내야 했다. 잠시 지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사이에 바닷물이 허리까지 들어찼다.
첨벙!
모용명은 물속에 잠수하며 아밀리에를 찾아 품에 안은 뒤 곧바로 수공(水功)의 일종인 이추유영신법(鯉鰍遊泳身法)을 펼쳐 선실 바깥으로 헤엄쳐 나갔다.
드르륵― 드득!
그런데 한발 늦은 건지 이미 선원들이 격벽을 내려 선실을 차단하고 있었다.
“멈춰라!”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지만 선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선벽을 내려 버렸다.
쿠궁!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외쳤기 때문에 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다만 선원들은 침수를 막기 위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을 희생시키기로 결정 내린 것이다.
쫘아악―
그사이 선실 안은 바닷물로 빈틈없이 들이찼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방식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이해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의 문제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된 이상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뱃놈들 따위가 감히 이 몸을 희생시켜 살아 보겠다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 격벽을 부수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수밀격벽이 부서지면 자칫 선체 전체가 침몰할 위험도 있었지만 모용명은 주저 없이 격벽을 향해 장력을 격발했다.
슈아아아아― 콰아앙!
장력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격벽은 우지끈 소리가 나며 구겨지긴 했지만 단번에 부서지진 않았다. 두꺼운 격벽 안에 금속 보강재가 그물처럼 얽혀 있어 충격을 분산했기 때문이다.
꾸르륵―
벌써부터 숨이 가빠 오는지 아밀리에가 코와 입으로 물을 들이켜며 고통스러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용명은 격벽을 향해 쇄심장을 연거푸 날렸다.
슈아아― 콰아아앙! 콰아앙!
거듭되는 충격에 결국 격벽이 부셔져 나가며 석실 안에 들이찼던 물이 사방으로 쫘악 퍼져 나갔다.
“푸아압!”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두 사람은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으앗! 격벽이 부서졌다!”
“어서 복도를 폐쇄해!”
드르륵― 드득!
모용명은 선원들이 다른 격벽을 내리기 전에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 것처럼 재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절반쯤 닫히고 있는 격벽 아래를 스치듯 통과했다.
쫘아아악―
그때 선원들 몇몇이 그를 알아보며 외쳤다.
“엇? 시온 님, 아니십니까?”
이번 해적 토벌에서 모용명의 활약이 가장 눈부시게 두드러졌기에 하찮은 선원들조차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선실이 몇 구역이나 폐쇄된 건가?”
모용명은 그들을 향해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선원들은 그가 기사 신분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그건 아직 파악 중이라…….”
한 놈이 어리바리하게 어물거리자 곁에 있던 선원들 중 하나가 답답한 듯 나서며 씩씩하게 말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침몰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선수(선박의 앞머리) 쪽으로 배가 조금씩 기울고 있어서 위험합니다!”
선체의 한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물이 침수될 경우 당연히 한쪽으로 가라앉게 된다.
지금은 앞머리 쪽이 약간씩 기울고 있는데, 이렇듯 선수가 곤두박질치듯 기울고 선미가 높이 들리게 되면 선박 중앙 부분쯤에 1평방인치당 수십 톤(t)이나 되는 엄청난 압력이 가해진다.
원래 배는 물 위에 뜬 채 항해하는 상태를 기본 조건으로 설계된다. 때문에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높은 압력 또는 무게가 선체 중앙에 쏠리게 되면 견디지 못하고 휘거나 우지끈 부러져 두 동강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씩씩한 선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침수되고 있는 선실부터 차단시킨 후에 나머지 선실들의 격벽도 모두 내려 두라는 선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군. 아마도 제라드 백작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겠지?’
격벽을 무작정 내린다면 침수된 구획에 있는 자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만 배가 침몰하거나 한쪽으로 기우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런데 혹시 내 일행들은 보지 못했나?”
“일행분들이시라면…….”
모용명의 갑작스런 질문에 선원은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어리바리했던 뱃사람이 끼어들며 말했다.
“제가 저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
‘무사하다니 그걸로 됐어. 찾아가 보는 건 나중에!’
그쪽에는 무지막지한 내공을 보유한 윈프레겐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신경을 꺼 두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때 거친 파도가 또다시 선체 옆구리를 후려쳤다.
슈아아아아― 콰아앙!
“어엇!”
충격에 금방이라도 선체가 두 동강 날 듯 흔들렸다. 선원들은 미끄러지며 바닥에 쓰러졌지만 무릎 높이까지 물이 들이차 있어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 선원들과는 달리 재빨리 보법을 펼치며 중심을 잡은 그는 모든 구역이 폐쇄되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침수되기 쉬운 외판(선실 외곽을 이루는 판)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선실을 찾아야 한다!
비어 있는 선실 하나를 발견한 모용명은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거친 파도에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선실 안의 물건을 전부 문 밖으로 내던진 뒤 문을 잠갔다.
덜컥!
그는 복도에서 챙겨 온 밧줄을 꺼내 선실 안의 기둥에 아밀리에를 단단히 묶었다. 마혈을 점혈당한 그녀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모용명은 아밀리에의 맥문(脈門)을 움켜쥐고 진기를 흘려보내 기혈(氣穴)을 살펴보았다. 맥이 일정하지 않고 몸이 아주 차가웠다.
‘얼굴은 창백하고 손발이 차가우며 의식이 혼미한 것을 보면 귀음절맥의 증상과 비슷하지만,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실수 없이 펼쳤는데 어찌 완치되지 않은 것일까?’
이때까지도 모용명은 아밀리에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뱀파이어라는 이유로 그가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을 멀리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뭔가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 건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용명은 그녀의 뒷머리에 있는 옥침혈을 가볍게 누르며 내공을 주입해 뇌혈(腦血)을 자극했다.
진기로 혈도를 강하게 자극하자 그녀는 잠시 정신이 되돌아왔다.
“으윽!”
“정신이 좀 들었나? 물어볼 것이 있으니 솔직하게 대답해 봐!”
“네…… 말씀하세요.”
“아까 선실 안에서 내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리고 귀음절맥이 아니라면 네 특이한 증상들은 뭐지?”
아밀리에는 흡혈 충동에 이성이 마비된 채 무의식중에 그를 유혹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부끄러움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열정과 격한 충동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 그 순간! 아직도 그 격정의 흔적이 하복부 안쪽에 저릿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이미 우리는 함께 돌이길 수 없는 경계를 지났어! 이제 시온 님에게 내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놔야지.’
“사실 전 뱀파이어예요. 뱀파이어 혈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아밀리에는 차분한 음성으로 감추고 있던 모든 것들을 밝혔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듣고서야 모용명은 자신이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귀음절맥이 아니었군. 뱀파이어라……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뱀파이어는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높고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갈 수 있는 등, 뛰어난 종족이지만 흡혈 본능 때문에 인간에게 배척당하게 되었다.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으로 종족 특성을 억누를 수 있지만 그것도 일시적으로만 효과가 지속될 뿐이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녀에게 주기적으로 인간의 혈액을 공급하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그건 언젠가는 들킬 위험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선박은 조금씩 폭풍우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직 파도와 바람의 기세는 거칠었지만 선체의 흔들림이 서서히 약해지는 것을 선실 안의 사람들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밀리에에게 금침대법을 펼친 후 약 보름 정도가 지났나? 다시 대법을 펼쳐도 고작 그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다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유능한 수하인 그녀를 버릴 수는 없다.
모용명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아밀리에! 흡혈 본능을 억제할 다른 수단을 찬찬히 연구해 보도록 하자.”
“다른 수단이라면 무슨?”
“우리에겐 아직 익히지 못한 고대마법과 암흑 교단의 흑마법이 있으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연구하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 거다.”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모용명은 잠깐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야 해! 열흘에 한 번씩 금침대법을 펼치는 건 부담이 너무 크다.’
대법을 펼치면 한동안 내공의 회복 속도가 평상시의 3배 정도 느려지는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흡혈 본능을 억누르는 가장 확실한 조치는 음양화합을 통해 혈맥에 양강(陽剛)의 진기를 주입하는 것이지만 당당한 대연 황실의 후예로서 어찌 수하와 정을 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그것은 스스로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사실 모용명은 그녀와 함께 구름과 비바람이 된 듯 폭풍 같은 격정의 순간을 보냈지만 마치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 겪은 일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그것은 매혹(Fascination)의 능력이 가진 특성 중 하나다. 만약 뱀파이어에게 매혹당한 먹잇감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일이 벌어져도, 그간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 못하므로 교단에 신고하거나 떠벌리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으로 그는 음양화합이란 손쉬운 방법 대신 금침대법을 다시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은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펼쳐 흡혈 본능을 억제해 두도록 하자.”
“네! 알겠어요. 시온 님.”
모용명은 대법을 펼치는 동안 외부의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 밧줄로 그녀와 자신의 몸을 한데 묶었다.
아밀리에는 그와 밀착하게 되자 격정과 환희의 그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 말하거나 움직여선 안 된다.”
“네! 꼼짝도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세요.”
간단히 주의를 준 모용명은 즉시 성수의가의 금침대법을 펼쳤다.
파앗! 파앗!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62개의 바늘이 모두 꽂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아랫배에 손바닥을 붙이고 적양신공의 강맹한 내공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1각(15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전신혈맥을 모조리 뚫을 수 있었다.
파박! 파박!
혈도에 양강의 진기가 가득 차며 압력이 증가하자 몸에 꽂힌 바늘이 동시에 튕겨 나가며 암기처럼 날아가 벽에 박혔다.
이것으로 응급조치는 마친 셈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기혈이 막히며 뜨거운 피를 갈구하게 되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대법이 모두 끝나고 잠시 만에 그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자 아밀리에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괜찮아요? 시온 님.”
“그럭저럭.”
‘이것도 두 번째 펼치는 거라 그런지 조금 익숙해진 것 같군. 지난번보다는 진기의 소모가 적은 편이구나!’
모용명은 대법을 펼치느라 소모된 공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선체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밧줄로 몸을 고정시켰으나 외부의 충격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운기는 되도록 짧게 끝내는 것이 좋겠군.’
그렇게 모용명이 운기에 집중하는 동안.
뱃사람들과 군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힘을 합친 결과 백작의 군선들은 드디어 폭풍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슈아아아― 철썩!
집채만 한 높이의 파도와 칼날 같이 매서운 바람이 조금씩 기세를 잃기 시작하더니 먹구름이 흩어지며 그 사이로 태양의 밝은 빛이 넘실대는 파도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해졌다.
하지만! 태양 아래 드러난 선체의 처참한 광경은 그간의 악몽 같은 일이 결코 꿈이 아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갑판 위의 구조물은 처참히 으스러지고 돛대도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선박 외벽 곳곳에 금이 가고도 아직 침몰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하고 기특할 정도!
여하튼 그 지독한 폭풍우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기적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폭풍우를 빠져나온 선박은 단 3척뿐! 이번 해적 토벌에 12척의 군선들이 동원된 것을 생각하면 무려 7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열둘에서 셋을 빼면 아홉 척의 손해구나.’라는 식으로 계산될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군선 한 척을 건조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 또는 기술력의 집약을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실로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간신히 침몰되지 않은 선박들도 그리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세찬 파도에 연속적으로 타격을 받은 결과 선체 곳곳에 충격이 누적되었다. 여기에 다시 약간의 충격만 더해져도 파괴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게다가 격벽을 모두 내려 침수를 막았지만, 수압 때문에 미세한 틈으로도 바닷물이 계속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휘이이익― 쫘악!
채찍으로 갑판 바닥을 한 차례 후려쳐 주의를 환기시킨 선장은 선원들을 독려했다.
“바닷물을 퍼내라! 죽고 싶지 않으면 부지런히 움직여!”
제라드 백작도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돕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느릿느릿 게으름 피우는 자들은 군벌로 다스리겠다!”
“네! 백작님.”
선장과 백작을 비롯한 지휘부들은 눈에서 독기를 내뿜을 뜻 서슬 퍼런 눈빛으로 사람들을 감독하며 위협했지만 침수된 물을 퍼내는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사력을 다해 거친 폭풍우를 빠져나오느라 모두들 물을 먹은 솜처럼 노곤하게 지쳐 축축 늘어졌고 물을 빼내는 펌프도 파도에 휩쓸러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 버렸다.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어찌 물을 퍼내랴?
뱃사람과 병사들이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선박으로 유입되는 물이 퍼내는 양과 비슷해 작업은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선장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제라드 백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작님! 이런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침수 문제도 걱정이지만 선박 전체가 두 동강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을 여러 차례 받았기 때문에 잔잔해진 파도에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곧 어딘가 크게 붕괴될 겁니다.”
“으음…….”
선장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한참 동안 고민하던 제라드 백작은 무슨 결단을 내렸는지 눈빛을 싸늘히 빛내며 입을 열었다.
“즉시 물질에 능한 선원들을 아래로 보내 노를 젓게 하라!”
돛대(Mast)가 모조리 부러졌으니 선체를 움직이려면 노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그곳은 지금 물에 잠겨…….”
선체의 격벽은 모두 내렸다고는 하나 미세한 틈으로 바닷물이 계속 유입되고 있었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선실 맨 아래부터 침수될 수밖에 없었다.
바닷물이 온통 들어찼을 터인데 어떻게 노를 젓는다는 말인가?
선장의 말허리를 잘라 먹은 제라드 백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물질에 능한 선원들을 보내라고 하지 않았는가?”
꿀꺽!
백작의 거듭되는 지시를 듣고 선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제야 선원들을 모조리 수장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배를 움직이겠다는 제라드 백작의 지독한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즉시 명령을 이행하게!”
“네! 알겠습니다.”
선장은 백작의 지시대로 선원들을 독려했다.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자들에겐 가차 없이 채찍을 후려쳤다.
쉐에에에― 촤아악!
“크아아악!”
채찍을 끝에 달린 날카로운 금속들이 등판을 가르며 지나가자 처참하게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지며 갑판 바닥을 더럽혔다.
채찍질까지 해 가며 사지로 내몰다니 참으로 악랄한 짓이지만 제라드 백작은 이보다 더한 짓을 했다. 그는 아직도 머뭇거리는 선원들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파악!
잘려 나간 머리통이 갑판 바닥을 뒹굴며 절단된 동맥에서 피가 솟구쳤다.
백작은 코어(단전)를 마나를 끌어내며 머리통을 힘껏 짓밟았다.
콰직!
단단한 두개골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으깨진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항명하는 놈은 베겠다!”
흠칫 놀란 선원들은 선실 아래로 후다닥 내려갔다.
백작은 호위하듯 그를 둘러싼 기사들 중 한 명을 지목해 명령을 내렸다.
“뒤쫓아 가서 머뭇거리는 자들의 목을 베라!”
“네! 백작님.”
불쌍한 선원들은 하는 수 없이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그들은 바닷물에 잠긴 상태로 노를 저었다.
물질에 능한 선원들도 숨을 쉬지 않고서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거기에 노를 젓느라 힘을 쓰다 보니 버티는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꾸르륵―
호흡이 다하게 된 선원들은 황급히 물속을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그사이 꾸준히 유입된 바닷물 때문에 들어갈 때보다 수위가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선원들 중 약삭빠른 몇몇은 선체 외벽의 벌어진 틈을 비집고 바다로 나갔다. 복잡하게 꼬인 선실 복도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닷물 속에는 거친 수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폭풍우의 영향권을 벗어났다고 해도 평소에 비하면 파도가 거칠었던 것이다.
수류에 휘말린 선원들을 선체 외벽에 세차게 내동댕이쳐졌다.
콰앙!
두개골이 으드득 부서지며 바닷물 속에 붉은 피가 꽃처럼 피어났다.
화려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죽음.
그렇게 수많은 선원들을 사지로 내몰렸건만 별 소득은 없었다. 노를 젓는 것보다 헤엄쳐 들어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침수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뜻!
부력의 크기는 그 물체가 밀어낸 물의 무게와 같다. 침수가 심해질수록 자연히 선박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초초해진 제라드 백작은 큰 소리로 선장에게 물었다.
“무슨 다른 방법은 없겠나?”
백작의 날카로운 시선에 주눅이 든 선장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저로서도…….”
제라드 백작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선장을 답답하다는 듯 노려봤다. 그리고 무어라고 다시 말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선체가 앞쪽으로 기울었다.
뱃머리가 곤두박질치듯 주저앉으며 마치 곡예라도 선보이듯 선미(선박의 뒷부분)가 번쩍 들렸다. 선박 중앙에 수천 톤(t)에 달하는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자 선체가 금방이라도 두 동강날 듯 휘어졌다.
끼이― 끼기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