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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렇다면 백작이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넣은 것은 그가 우연히 창안해 낸 기술인 건가? 강호의 수법과 비슷해 보이는 건 정말 그저 우연이란 말인가? 아니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부상마저 감수할 정도로 지독한 위인인가?’
모용명은 그의 정체에 대해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응축된 마나로 내장의 부상을 치료한 백작은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기습당하고 있으니 나를 도와라!”
백작은 소리쳐 호위기사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아밀리에의 마법 때문에 곤욕을 치르느라 그를 도우러 갈 수가 없었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네 정체를 밝혀 주마! 제라드 백작!’
모용명은 트루 블러드가 들어 있는 병을 꺼내 백작을 향해 뿌리는 동시에 제뮤엘에게 배운 암흑 교단의 흑마법을 펼쳤다.
“컨페션(Confession)!”
파아앗―
컨페션은 상대의 정신을 파괴하는 사악한 흑마법!
그러나 제라드 백작은 코어(단전)의 마나를 끌어 올려 흑마법에 저항했다.
모용명은 곧바로 고대 마법을 그에게 펼쳤다.
“콤무니오(Communio)!”
콤무니오는 원래 마수나 동물 등과 친밀감을 높이는 마법이었으나 모용명은 여기에 귀령제혼술의 구결을 뒤섞어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통하게 변형시켰다.
“으으으…….”
제라드 백작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으나 곧 정신을 번쩍 차리고 마나를 끌어 올려 고대 마법에 저항했다.
모용명은 연달아 그에게 변형된 섭혼술을 펼쳤다.
샤아아―!
요사스런 기운이 백작을 향해 뻗어 나가며 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조금 전 해적 두목인 휴버트에게 실험했던 섭혼술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흑마법과 고대 마법 그리고 섭혼술 등을 연달아 펼치며 제라드 백작의 정신을 공격했다.
“으으으…….”
백작의 눈빛이 조금씩 흐릿해지며 벌어진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모용명의 안색도 창백해지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렇듯 정신계 마법과 귀령제혼술 등을 연달아 펼치는 건 막대한 심력과 공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며 쉴 새 없이 백작을 몰아붙였다.
제라드 백작은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았다.
끈질긴 모용명의 공격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긴 했지만 막대한 마나를 바탕으로 뇌를 보호하며 정신이 무너질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모용명은 초초함을 느꼈다.
계속해서 섭혼술과 정신 마법 등을 펼치느라 빠른 속도로 내공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공력이 바닥나면 더 이상 백작을 몰아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모용명은 온 정신을 집중해 남은 내공을 모조리 긁어모아 섭혼술을 펼쳤다.
파아앗―!
순간 제라드 백작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렸다. 마지막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섭혼술에 걸려 버린 것이다.
‘휴우, 간신히 걸려들었군!’
그러나 백작의 정신방벽에 살짝 금이 간 정도일 뿐! 섭혼술은 완벽하게 펼쳐지지 않았다.
모용명은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너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가?”
“으으…… 아니다.”
뜻밖에도 제라드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직 섭혼술이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으음…… 내 짐작이 틀린 건가?’
모용명은 다시 백작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마나로 목소리를 증폭하는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건가?”
“으으으…… 스…… 스승님께 배웠다.”
“스승님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으윽! 이름은 모른다. 그가…… 나에게 새로운 마나 코어(내공심법)과…… 새로운 기술을…… 크아아악!”
제라드 백작은 대답하다 말고 머리가 산산이 부서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섭혼술이 깨졌군!’
모용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안개 속으로 물러섰다.
아직은 제라드 백작을 죽이거나 제압하는 것은 시기상조!
죽이는 건 그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나 생각할 일이다. 게다가 스승이란 자가 전생의 기억을 가진 무림인일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괜히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할 수도 있으니 백작의 스승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사하는 것이 좋겠다.’
다행히 섭혼술에 걸린 상태에서 한 대화는 상대가 기억하지 못한다.
제라드 백작은 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타앗―!
모용명은 그대로 안개 속을 빠져나가며 강철 마스크를 벗었다. 그를 발견한 아밀리에가 다가와 궁금한 듯 물었다.
“시온 님! 어떻게 됐나요?”
“생각처럼 잘되진 않았지만 중요한 단서는 얻었다.”
“중요한 단서라니, 그게 뭔데요?”
모용명은 그녀에게 자세히 말해 주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여하튼 백작의 병사들을 죽이진 않았겠지?”
“그럼요! 혼만 내줬을 뿐, 상처 하나 입히지 않았어요.”
아밀리에는 칭찬해 달라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정체불명의 죽음의 사신과 마주치는 상황을 겪긴 했지만 해적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것은 그동안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해적들과의 전쟁에서 기념할 만한 승리였다.
대승에 걸맞은 축제가 필요했다.
이에 제라드 백작은 해적들의 본거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게 하고 수고한 병사들이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한껏 승전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작의 병사들은 그동안 금지되었던 술을 진탕 마시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었으며 해적들이 납치해 노예처럼 부리던 여성들과 마음껏 즐겼다.
광란에 가까운 축제의 밤이 끝나고 다음 날!
군선(Warship)들은 이그로스 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에 배를 띄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고 바람을 잠잠했다.
지금까지의 항해는 풍랑 한 번 만나지 않은 채 순조로웠다. 물결은 잔잔하고 파도도 높지 않아 뱃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 마(魔)가 낀다고 하더니!
하늘이 그들의 승전과 순항을 시샘하듯 갑자기 천둥이 쳤다.
우르르릉― 콰쾅!
구름 사이로 새하얀 뇌전이 화악 빛을 내뿜었다.
어느새 맑고 푸르기만 했던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쏴아아아―
빗방울이 굵어지며 장대비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거기다 마치 조금 전까지 맑고 화창했던 날씨가 거짓말인 것처럼 칼날처럼 세찬 바람까지 불어오기 시작했다.
슈아아아아―
거센 바람에 돛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펄럭거리고 파도가 높아졌다.
철썩! 철썩!
높아진 파도가 마치 공격할 의지를 가진 듯 선박의 정면과 측면을 번갈아가며 후려쳤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어 질 듯 심하게 요동쳤다. 바다 날씨의 변덕은 하루에도 수십 번 기분이 바뀌는 요사스런 여자의 마음과 같다더니 그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급변하는 기후에 다급해진 선장과 1급 항해사는 선원들을 향해 악을 쓰듯 외쳤다.
“바람이 더 거세지기 전에 어서 돛을 내려라!”
“고정되지 않은 물건을 죄다 밧줄로 고정시켜!”
“파도를 측면에서 맞지 않게 키를 돌려라! 비스듬히 파도를 타야 한다!”
선원들의 대응은 노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켜 맞은 파도만으로도 선체가 뒤흔들렸다.
철썩!
순간 파도와 함께 몰려든 바닷물이 단숨에 갑판을 후려치고 갑작스럽게 빠져나갔다.
“으아앗!”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중 몇몇이 파도에 휩쓸리어 딸려 나갔다. 거친 포말이 이는 바다에 빠진 자들은 구조할 틈도 주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뭐든 붙잡아!”
“다들 선실로 내려가시오!”
뱃사람들이 악을 썼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시대로 황급히 선실로 내려갔다. 어느새 젖었는지 모두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 자들은 몇몇 있었으니 제라드 백작도 그런 자들 중 하나였다.
제라드 백작은 선실로 내려가는 대신 선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그를 알아본 선장이 다급히 허리를 접어 인사를 올렸다.
백작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재빨리 선장에게 소리쳐 물었다.
“자네! 이 폭풍우가 얼마나 갈 것 같은가!”
“폭풍우의 힘이 너무 강력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적어도 3∼4일은 이런 기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으흠…… 썩 좋지는 않군!”
선장은 점점 더 큰 소리로 악을 썼다. 바람 소리가 너무 거세어져 선장실 안인데도 악을 쓰듯 외치지 않으면 서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일부러 백작에게 잘 들리도록 문장을 잘게 나누어 외쳤다.
“더욱 좋지 않은 건! 바람의 방향이! 항로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폭풍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필히 항로를 크게 틀어야 합니다!”
“그럼 즉시 항로를 바꾸게!”
백작의 명령에 선장은 곤란한 표정이 되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데 그것이…… 방향을 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드넓은 바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듯 보이지만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항로는 일반적으로 짐작하는 것보다 매우 적다.
백작이 의문을 느끼기 전에 선장은 얼른 설명을 보충해 나갔다.
“어느 쪽도 만만한 곳이 없어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북쪽은 암초 지대라 곤란하고! 서쪽은 위험한 바다 괴수들의 출몰이 잦은 지역입니다! 남은 것은 동쪽뿐인데! 그곳은 예상하기 힘든 이상 해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저희 같은 뱃사람들이 꺼리는 항로입니다!”
선장의 이 같은 보고에 잠시 고심하던 백작은 파도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사지(死地)나 마찬가지인 암초 지대나 바다 괴수들을 향해 갈수는 없겠지! 일단 동쪽으로 항로를 틀어라! 일단 폭풍우의 영향권을 벗어난 뒤 다시 항로를 수정한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선장은 즉시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조타수는 동쪽으로 키를 잡아라!”
선원들은 큰 소리로 선장의 말을 따라 외치며 명령을 전달했다.
선체가 한쪽으로 확 기울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지고 굴렀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의 사소한 부상을 염려할 때가 아니었다.
선원들이 합심해 노력한 결과 간신히 배의 방향이 바로 잡히자 선장이 다시 지시를 내렸다.
“노예들에게 힘차게 노를 젓게 하라! 선원들도 같이 노를 붙들고 힘을 보태라!”
백작이 승선한 본선이 동쪽으로 향하는 걸 본 다른 군선들도 그 뒤를 따랐다.
슈아아― 철썩!
파도가 더욱 거칠어지며 선체를 때렸다. 이것은 폭풍우의 중심이 그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급해진 선장이 제라드 백작을 돌아보며 외쳤다.
“폭풍우를 벗어나려면 좀 더 강한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거센 파도에 노예들과 선원들은 곧 지칠 겁니다! 송구스럽지만 힘센 병사들을 동원해 노를 젓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바람과 파도가 시시각각으로 거칠어지고 있었다.
원래 노를 젓는 고되고 천한 일은 비천한 노예들이나 뱃사람들이 하는 것!
그러나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닌 급박한 상황임을 느낀 제라드 백작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힘쓰는 데 자신 있는 놈들은 모두 선실 아래로 향하라! 선원들을 도와 노를 저어라!”
“네! 백작님.”
바로 그 시각.
모용명은 선실을 같이 쓰고 있던 아밀리에에게 다급히 지시를 내렸다.
“뱃사람들이 제법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배가 뒤집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아밀리에 네가 마법으로 도와야겠다!”
“네? 제 마법으로도 폭풍우를 멈출 수는 없어요!”
아밀리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자연의 대재앙이나 다름없는 폭풍우 앞에서는 7서클에 도달한 강력한 마력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마법의 원리가 아무리 인위적으로 자연력을 거스르는 것이라 해도 대자연의 분노 앞에는 그녀도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모용명은 당황한 그녀를 부드러운 어조로 달랬다.
“폭풍우를 멈춰 달라는 건 아니야, 아밀리에.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저 주위의 거칠어진 파도와 바람을 조금만 얌전하게 만들어 주면 돼!”
“그것도 별로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시온 님의 부탁이니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의 봄바람처럼 상냥한 어조에 아밀리에는 겨우 힘을 냈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서클에 저장된 마력을 차분히 끌어냈다. 7개의 서클이 톱니처럼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응축되어 있던 마나가 올올이 풀려 나왔다.
마치 실타래를 푸른 것처럼 서클에 응축되어 있던 마력을 모조리 풀어 낸 그녀는 허공에 보이지 않는 원을 그려 갔다.
그녀만이 볼 수 있는 원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며 그 사이에 마법의 언어인 룬어가 일정한 규칙대로 배열되며 선명하게 새겨졌다.
“마레 트랑퀼리타티스(Mare Tranquillitatis)!”
고대 마법인 마레 트랑퀼리타티스의 원래 뜻은 ‘고요의 바다’라는 뜻.
시동어에 반응해 룬어로 배열한 마나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7서클에 달하는 방대한 마력이 매서운 파도와 난폭해진 파도를 향해 파고들어 갔다.
마력의 간섭으로 주변의 바람이 고요해지지고 파도가 한층 얌전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때.
“크윽!”
아밀리에가 갑자기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고대 마법은 오직 에그레고르와 콤무니오 두 가지뿐! 나머지 고대 마법들은 숙련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억지로 펼치자 심장에 무리가 왔다.
또한 한꺼번에 많은 마나를 소모한 탓에 심장 주변을 감싸듯 돌아가던 마나 서클이 텅 비어버리자 마치 보이지 않은 손으로 심장을 꽉 옥죄이는 듯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러나 고통을 못 이겨 정신을 놓아 버리게 된다면 공들여 펼친 마레 트랑퀼리타티스 마법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물론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모용명)까지 풍랑에 휩싸여 죽게 될 것이다.
아밀리에는 그저 사력을 다해 버틸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창백한 편이었던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하얀 눈처럼 탈색되고 찌푸린 미간 사이로 땀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름다운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모습은 마치 월(越)나라 미인인 서시를 연상시켰다.
서시는 가슴앓이 병을 앓는 희고 고운 얼굴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어느 날 그녀가 가슴이 아파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강가를 걸어가자 투명한 강물에 비친 그녀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강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후 서시는 침어(沈魚, 물고기가 가라앉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원래 모용명은 원래 이 고사를 처음 접하고 서시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 터무니없이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불빛에 비친 아밀리에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문득 과연 물고기가 헤엄치는 법을 잊고 기러기가 미모에 취해 땅으로 떨어질(沈魚落雁) 미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아파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내의 보호본능을 강하게 자극해 한없이 감싸 주고 보듬어주고 싶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역시 뱀파이어인 그녀에겐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아밀리에는 그에게 금침대법을 받아 뱀파이어의 본능이 억제되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뱀파이어의 능력 중 하나인 매혹(Fascination) 능력이 무의식중에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펼쳐지는 능력이라 사내들에겐 더욱 은밀하고 치명적인 위력을 발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모용명은 차갑고 냉혹한 심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아밀리에의 마법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사나운 폭풍우에 배가 뒤집힐 위기여서 뭔가 시급히 손을 쓸 필요가 있었다.
타앗―
그는 즉시 아밀리에의 등에 손바닥을 붙였다.
단전에서 끌어낸 내력을 손바닥을 통해 그녀의 몸 안으로 조심스럽게 흘려보냈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듯(牛飮水成乳 巳飮水成毒).
저마다의 성격이 다르듯 몸속에 쌓은 마나도 각기 다른 성격을 띠게 될 수밖에 없다.
모용명은 혈도를 통해 흘러 넣은 진기가 아밀리에의 마나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더없이 신중한 태도로 진기요상술의 구결대로 손상된 심맥(心脈)을 치료했다.
그 순간 아밀리에는 그의 손바닥을 통해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심장을 쥐어짜는 듯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통이 조금 누그러들었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밀리에는 몹시 기쁜 마음에 나머지 고통마저 모두 잊었다.
‘아! 시온 님이 이렇게 나를 돕다니! 평소에 냉혈한처럼 굴지만 사실 조금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 마음속으로는 나를…….’
심장을 부드럽게 감싸는 더없이 따스한 기운에 아밀리에는 마치 그와 하나가 된 듯 무한한 충만감을 느꼈다.
마음이 안정되며 불완전했던 그녀의 마법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파아앗―!
그때 갑판 위에서 초초하게 선원들을 독려하던 선장은 갑자기 주변의 파도가 고요해지고 세찬 바람이 기세를 잃고 잦아드는 걸 느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폭풍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은 분명했다!
“지금이다!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라!”
선원들이 그의 말을 따라 힘차게 복창하며 전달했다. 제라드 백작 역시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탈진한 자들은 밀어 버리고 힘차게 노를 저어라!”
노예들을 대신에 노를 붙잡은 건장한 병사들이 씩씩하게 노를 저었다.
쫘아악―
모두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 덕분에 백작이 승선한 군선은 힘차게 수면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들은 이런 식이라면 무사히 폭풍우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차올랐다.
그러나 그때 다시 파도가 거칠어지며 갑판을 거칠게 때렸다.
슈아아― 철썩!
아밀리에의 마력이 완전히 바닥나며 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아쉽게도 그녀의 마법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대자연의 힘에 대항해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다급해진 선장과 백작은 체면 불구하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노를 저어라! 포기하지 말고 계속 저어!”
“게으름 피우는 자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뱃사람들과 병사들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제라드 백작의 엄벌과 선장의 불호령이 두려워 그러는 것도 있지만 그들 역시 폭풍우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수장되어 죽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도 어떻게든 발버둥 치다 보면 가끔씩 수면 위에 뜨게 되는데 이때 들이마신 호흡이 고통스런 시간을 연장시킨다. 어떻게든 숨을 쉬고 싶은 욕구 때문에 물을 들이쉬게 되어 결국 폐와 위에 물이 가득 차 안쪽에서 쫘악 찢어지게 된다.
무심코 물에 팅팅 불어 괴물같이 처참한 몰골이 된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며 전력을 다해 노를 저었다.
“영―차, 이영―차!”
구령을 붙여 가며 조금이라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파도는 더욱 거칠어졌다.
슈아아아― 콰광!
거칠어진 파도는 선체를 박살 낼 듯 격하게 휘몰아쳤다.
원래 폭풍은 중앙이 외려 잔잔하고 외각의 바람이 더욱 거세기 마련이다.
폭풍우의 중심에서 벗어나려고 애쓸수록 파도가 점점 더 강력해졌다. 그것도 한 방향이 아니라 사방에서 동시에 일어나 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나운 파도들이 서로 부딪히며 갑작스럽게 거대한 파도가 솟구쳐 올랐다.
원래 파도에는 각각의 고유의 파형이 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생긴 각각의 파형이 어느 지점에서 부딪치면서 어느 순간의 공명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거대한 파형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두고 뱃사람들은 삼각파도(Pyramidal Wave)라고 칭한다.
쫘아아악―
바로 그 거대한 삼각파도가 군선들을 높이 띄웠다.
정점에 달하는 순간 파도가 느닷없이 사방으로 쫘악 빠져나가며 선체만 허공에 둥실 뜬 형세가 되어 버렸다.
날개가 없는 것은 곧 추락하기 마련.
슈아아아!
잠시 떠올랐던 선박들은 아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 쳤다.
“크아아아아!”
“끼아아아악!”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실 것 같은 아찔한 낙하 감각에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파아앙!
배가 수면에 처박히면서 폭발음에 가까운 거대한 소리가 났다.
단단하게 건조되지 않았다면 이 충격만으로도 배가 산산이 부서졌을 터!
실체로도 선체 곳곳에 금이 가며 수압으로 인해 결국은 부서진 틈이 쩌억 입을 벌렸다.
쏴아― 아아아!
세찬 물줄기가 일부 선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침수되기 시작했다.
“물을 퍼내려 하지 말고 격자를 내려! 이 멍청아!”
“누구더러 멍청이라는 거야? 이 XX 같은 놈이!”
“그만! 시간 없으니 나중에 붙어!”
위기감이 목을 조여 왔기 때문인지 뱃사람들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욕을 하면서도 제 할 일을 잊지 않고 바삐 움직였다.
쿠궁!
신속하게 격자가 내려지고 침수된 선실들은 곧 폐쇄되었다.
그러나 겨우 응급조치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는 그들을 향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높이의 파도가 몰아쳤다.
슈아아아아아― 콰콰콰앙!
엄청난 위력이 담긴 파도가 선박을 후려쳤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은 갑판!
우지끈―
돛대가 먼저 부서지고 갑판 위에 설계된 모든 구조물이 와르르 부셔져 내렸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충격을 받은 선체가 기우뚱 기울며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한쪽 벽으로 나뒹굴었다. 노를 젓던 자들도 모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채 서로 뒤엉켰다.
부러진 노의 날카로운 단면이 그들의 몸을 관통했다.
파악! 파악!
그야말로 모두가 난장판으로 한데 뒤엉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부러진 뼈와 꿰뚫린 살! 으스러진 관절과 끊어진 힘줄!
누가 흘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피가 선실 바닥을 흘렀고 그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온기에 놀란 자들은 기겁하며 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목청껏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야말로 지옥의 심연에서나 엿볼 수 있는 참혹한 풍경!
한편 선실에 있던 모용명과 아밀리에도 결코 충격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그나마 모용명은 민첩하게 경공과 벽호유장공을 동시에 펼쳐 안정된 자세로 착지하며 나무기둥을 붙잡았지만 아밀리에의 처지는 그렇지 못했다.
“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 그녀는 그야말로 무방비한 상태로 튕겨나 선실 벽을 향해 내동댕이쳐졌다.
위험하게도 머리가 충돌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놔뒀다간 단단한 선실 벽과 쌓아올린 침에 부딪혀 두개골이 으깨져 뇌수가 튀고 목뼈가 으드득 부러져 단번에 숨이 끊어질 것이다.
‘공들어 키운 수하를 그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지!’
타앗―!
모용명은 선실 바닥을 박차고 아밀리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다급한 마음에 그녀를 품에 꽉 껴안자 서로의 가슴이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그녀의 가슴은 풍염하고 더없이 부드러운 감촉을 전해 줬다.
아무리 북풍보다 차디차고 돌같이 단단한 심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무릇 사내로 태어났다면 그러한 감촉을 느낀 그 순간만큼은 전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명은 진정 냉정한 사내였으며 지금은 감촉의 여운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아밀리에 쪽이었다.
‘아아! 시온 님…….’
모용명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허공에서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무사히 바닥에 착지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슈아아아― 콰앙!
연신 몰아치는 파도에 선실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어서 자칫하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타앗―!
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 경공을 펼쳐 비교적 안전한 침실 아래로 숨어든 후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 괜찮은…….”
고개를 숙여 뭔가 한마디 하려던 그는 아밀리에와 눈을 마주친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멈칫했다.
그녀의 두 눈은 온통 요사스런 자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지만 동시에 더없이 매력적인 기운이 아밀리에의 눈빛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필 그때 금침대법이 깨지고 뱀파이어의 본능이 되살아났다.
흔들리는 선실의 벽에 부딪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녀의 생존 본능을 자극한데다 가슴이 맞닿는 순간 순진한 그녀가 받은 심리적 자극이 너무 컸다.
사실 원래부터 뱀파이어의 본능은 종족 특유의 특성이니 성수의가의 대법으로 이를 치료하려고 시도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방심한 상태에서 그녀의 매혹(Fascination) 능력에 기습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진 그도 저항할 수 없는 매력에 순식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샤아아―
그동안 억눌려 있던 본능이 한 번에 뿜어져 나온 건지 숨이 막힐 듯 매혹의 향이 아밀리에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결코 서툰 교태를 부리거나 유혹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간절히 간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고 혹은 농염한 수많은 감정들이 담겼다.
눈빛으로 말을 건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일까?
바로 그 순간.
모용명은 갑자기 내딛고 있는 바닥이 사라진 듯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파도에 휘말린 선박이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하고 섬뜩하리만치 위태로우면서도 동시에 구름 위를 나는 듯 더없이 황홀한 기분!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색을 잃고 회백색으로 변했다.
기필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직성이 풀리지 않을 듯 몸 아래쪽에서 깊고 격한 열망이 활화산처럼 화악 솟구쳐 올랐다.
조금만 더 흔들리면 도저히 욕망을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아 호흡마저 멈춘 그 순간.
아밀리에의 어여쁜 얼굴이 가까워지며 붉은 석류를 방불케 하는 도톰한 입술이 다가왔다.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
그 안에서 가장 귀한 향료와 감미로운 음료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듯 모용명을 매료시켰다.
마치 꽃의 달콤한 수액을 탐하는 나비나 꿀벌처럼!
녹아내릴 듯 황홀한 인세(人世)에 다시없을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