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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자신에게 부탁을 한 태상노군도 굳이 숨기라고는 당부하지 않았으니 이야기를 해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으음, 그래. 솔직히 말하마. 말하지 말라고 한 내 부탁이 너에게는 무리였으니 말이다. 사실 넌 이미 죽은 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지도 살지도 않은 몸이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의 몸이라고요?
―그래, 너는 초혼지체를 타고 났다. 세상이 시작되고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지. 초혼지체는 말이다.
천갑은 초혼지체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명을 들으며 태완은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할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안배를 진행해 왔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그동안 해온 수많은 노고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네 할아버지의 노고는 아주 처절한 것이었다. 태상노군께서도 감탄하신 바가 크지. 허나 네 할아버지는 천절영가의 주인답게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다. 만약 자신이 해온 안배가 실패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문제가 커진다. 다음에 진행해야 할 과정은 극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실패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지금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네 할아버지를 보게 되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째서 내가 비밀을 지켜달라고 한 것인지 이유를 설명했으니 말하고 말고는 네 판단에 맡기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만약 할아버지 성격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비밀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태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지를 하나로 융합해 초혼지체가 선천적으로 가지는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가 시전할 대법이 성공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틀어질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자신이 들은 대로 할아버지가 자존심이 센 성격이라면 자신의 신체와 묵천기, 그리고 고대 신의 잔재가 가지는 연관 관계를 알게 되면 실망이 클 것이니 틈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판단은 유보하도록 하자. 이자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지만 판단은 뒤로 미뤘다.
5장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종내에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틈이 생겨 불안정성이 해소되지 않아 후에 발생하게 될 일이 너무 크거니와 어떻게 해서든지 염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태상노군님의 말씀을 전하마.
생각에 잠겨 있는 태완에게로 영언이 들려왔다.
―제게 전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래, 인연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그분의 당부셨다. 나 또한 그렇고.
―알겠습니다. 그리 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묵천기를 모두 전했고, 운영도 순조로운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자.
―예.
대화가 끝이 났지만 둘 다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천갑은 비밀이 지켜질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태완은 마지막 태상노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금령과 수환은 묵천기의 전수가 모두 끝나고 둘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묵천기를 전부 전해주면 천갑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걱정하고 있었다.
―저 자식 완전히 작정을 한 것 같다.
―그래,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전해준 것 같으니 말이다. 저 정도면 영계로 들어가지 못할 텐데 걱정이다.
―둔탱이이기는 하지만 미련한 놈은 아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짓일 테니까 기다려 보도록 하자.
―그래, 태상노군이 부탁한 일이라고 했으니 소멸까지는 가지 않겠지.
손을 댔다가는 둘 다 큰일이 나기에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금령과 수환은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천갑과 태완을 지켜보았다.
벌써 전수가 끝났지만 태완과 대화를 하면서 일부러 묵천기를 불어넣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천갑은 천천히 손을 뗐다.
―금령아, 이제 끝난 것 같다.
―그러게 저 자식 완전히 변해 버렸다.
동이 터올 때까지 기운을 쏟아 낸 탓인지 천갑의 모습은 전과는 다르게 변했다. 약간은 통통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저 자식, 처음 천계로 들어갈 때 모습으로 돌아왔네.
―그러게. 그래도 좀 남긴 것 같지만 거의 전부 전해준 모양이다.
―그러게. 이제 완전히 끝났나 보다.
―저 녀석이 알아차릴지도 모르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
―그러는 것이 좋겠다.
손을 뗀 천갑이 자신들을 보자 금령과 수환은 대화를 끝냈다.
“후우, 이제 천갑이라는 이름도 버려야 할 것 같군.”
자신의 몸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기운을 모두 전해준 후 변해 버린 모습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천갑이 고개를 저었다.
비록 자신이 택한 일이지만 묵천기가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야, 돌돌아! 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아무리 노군님의 부탁이라고 하지만…….”
가라앉은 목소리에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천갑을 향해 금령이 궁금해 물었다.
“괜찮다. 노군께서 따로 생각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 그래도.”
“내가 가진 묵천기를 전부 주기는 했지만 그만큼 보충도 했으니 너희들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몸이니까.”
“그렇지만, 그래 가지고 어떻게 태돌이 놈 혼을 내주냐? 힘이 절반은 줄어들었을 텐데…….”
“내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맘이 좀 약하지 않냐. 먼저 혼내줄 수도 있지만 태돌이 놈 도망가라고 시간을 약간 벌어준 것뿐이다. 못 도망가면 그것은 지 놈 운수 탓이고.”
“하여간 네놈은…….”
언제나 무뚝뚝하고 거칠어 보이는 천갑이다. 속을 들여다 보면 마음이 무척 여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해놓고도 끝까지 우긴 이유도 이런 천갑의 성격 때문이었다.
“시간 없다. 빨리 가라. 난 어서 태돌이 녀석 잡으러 가야 하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우리도 빨리 금강산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천갑아, 나중에 만나면 감로수라도 한잔하자.”
금령은 태완을 다시 들쳐 업었다.
팟!
파파팟!
금령과 수환은 천갑에게 인사를 한 후에 빠르게 금강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축지를 이용해 금강산을 향해 빠르게 사라져 가는 금령과 수환을 바라보며 천갑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영악하니 다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냥 보내기 섭섭하니까 태돌이가 설치한 영폭뢰 맛이나 좀 보고 가라. 그 대신 네놈들이 내게 저지른 죄는 모두 용서하마.”
숨기려면 끝까지 숨길 것이지 묵천기를 전수해 준 것에 놀란 것인지 금령이 실수를 했다.
무심코 자신을 돌돌이라 부른 것이다.
돌돌이란 소리를 들으며 천갑은 자향에게 자신을 비방한 것이 금령과 수환임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돌이의 복수심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령아! 수환아! 정말 다시 봤으면 좋겠구나! 이게 끝이 아니기를 빈다. 태돌이의 영폭뢰는 아마 너희를 축복하는 폭죽이 되어 줄 것이다.’
천갑은 멀어지는 금령과 수환을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를 떠났다.
수환이 예측한 대로 마음이 약하기도 하지만 은근 뒤끝이 있는 천갑이었다.
◈◈◈
천절영가에서 천갑과 헤어진 금령과 수환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 금강산 깊은 곳 한적한 수풀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천갑과 헤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얼굴은 누군가에게 잔뜩 얻어터진 모습이었다. 금강산으로 오는 동안 험한 꼴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크으, 저놈이 틀림없이 놀려대겠지?”
“네 꼴을 봐라. 안 그러게 생겼냐?”
“넌 어떻고? 누가 물귀신 아니랄까 봐. 얼굴은 푸르딩딩해 가지고…….”
“뭐! 물귀신? 너 인마, 때도 아닌데 얼굴은 시뻘겋게 단풍으로 물들어 가지고서는…….”
금령이 자신을 놀리자 수환 또한 울긋불긋해진 모습을 비웃어 댔다.
“뭐! 단풍? 너 진짜, 자꾸 그러면 방 뺀다.”
“그놈의 방 빼라는 소리! 그래, 방 빼면! 도대체 넌 남는 게 뭔데. 아마 널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걸?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그만! 더 이상 하면 진짜 방 뺀다.”
더 험한 소리가 나올까 봐 금령은 수환을 멈추게 했다. 수환이 말하려는 것이 알려진다면 자신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알았다. 알았어! 이제 그만하마. 그런데 진짜 어떻게 들어가냐? 화영이란 놈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면 적당히 둘러대야 할 텐데 말이다.”
더 이상 하면 갈 곳 없는 처지가 될까 봐 수환도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 말이다.”
싸움을 멈춘 둘은 수풀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절벽 중간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제법 공간이 넓은 편으로 바닥이 평평한 공터였다.
공터에는 전에 금강산에서 흑의인들에게 공격을 당했던 화영이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지 씩씩거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저 자식 화가 많이 난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다 태돌이 자식 때문이다.”
“그래 태돌이 놈이 그렇게 악다구니만 안 썼어도 시간 맞춰 올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놈 도력이 그렇게 높아졌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
“그래도 그렇지. 무식하게 영폭뢰(靈爆雷)를 설치해 놨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 일 때문에 아직까지 앙심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영폭뢰를 심어 놓다니 그 자식도 정말 미친놈이다.”
태백산을 빠져나오며 태백산신이 펼쳐 놓은 영폭뢰에 호되게 당했다.
영폭뢰는 영기를 뭉쳐 놓은 것으로 일정한 기운에 반응하여 폭발하게 되어 있는 폭탄과 같은 것이다.
이질적인 영기를 강력하게 폭발시키는 영폭뢰는 영체를 가진 존재나 귀체들에게는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질적인 영기를 가득 쐬게 되므로 영체를 형성하는 기운을 오염시켜 본신에 많은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들어내기가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든다고 해도 영력의 소모가 워낙 많아 시전한 지령신도 영체에 타격이 크기에 함부로 펼칠 수 없는 것이었다.
“금령아,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자신이 갖고 있는 거 탈탈 털어 도전했는데, 그 많은 산신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알거지 신세로 나앉았으니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그래도 그렇지. 산신씩이나 되는 놈이 그깟 문제 가지고 그렇게 무식한 수를 쓰다니. 미친 것도 아니고. 그때 회장질 못하게 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하긴, 그 미친놈이 회장이 됐으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남았겠지.”
“그나저나 온몸이 욱신욱신 쑤신다.”
“엄살 좀 떨지 마라.”
“천갑이 녀석 묵천망에 쏘이고, 곧바로 태돌이 녀석이 설치한 영폭뢰에 당했는데 엄살이라니?”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게 당한 것 치고는 괜찮으니 이만하길 다행으로 여겨라.”
“하긴 그렇지.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골로 갈 뻔했으니 이만하길 다행이지.”
낌새가 심상치 않아 조심을 한 탓에 직접적인 폭발 반경에서는 벗어나 치명타는 벗어났지만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상처라면 꽤나 양호한 편이었기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저놈을 어떻게 구슬리지? 웬만한 것 가지고는 말도 통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않냐. 사실대로 말을 하는 수밖에…….”
“흐이유, 내 팔자야.”
썩은 달걀을 먹은 것 같은 둘의 표정은 정말이지 불쌍해 보였다.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매인 몸에 태상노군의 부탁까지 있었기에 금령과 수환은 화영에게 가야만 했다.
하지만 자꾸만 발걸음이 꺼려졌다.
“금령아, 뭐라고 자꾸 구시렁거리는 것 같은데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고 가자.”
“뭐라고 말하겠냐? 우리를 죽이니 살리니 하겠지. 들어봐도 소용이 없을 텐데.”
“그래도 들어보자. 자기 손자 일인데 우리만 씹지는 않겠지. 혹시, 뭔가 수가 날 수도 있잖아?”
“그래, 알았다.”
수환의 재촉에 금령은 대기의 진동을 끌어들였다. 잠시 뒤 화영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이렇게 늦어? 어휴! 그 문신쟁이 놈하고 뜨뜻미지근한 오줌싸개 같은 놈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놈들 분명히 일도 제대로 못하고 사고를 쳤을 거다.”
바람결을 타고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와 똑똑하게 들려왔다.
자신들을 비하하는 말에 금령과 수환은 열이 받을 대로 받았다.
“저, 저! 저 어린놈 말하는 본새 좀 봐라. 금령아, 너 보고 문신쟁이란다.”
“넌 어떻고, 인마! 너는 뜨뜻미지근한 오줌싸개란다. 오줌싸개.”
화영의 목소리에 금령과 수환은 화가 치밀었다.
“으으으, 오줌싸개! 진짜 내가 열받으면 한 방도 안 되는 놈인데…….”
“아서라. 그냥 참는 게 복이다. 욱했다고 개기다가는 저번처럼 개망신 당한다. 우리에게 숨겨진 한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쉽게 당할 놈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아직 신령 사회에 소문이 안 퍼져서 그렇지. 얼마 전에 저놈에게 당한 일이 퍼지면 우린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한다.”
“휴우!”
맞는 소리였기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저놈도 사정을 이야기하면 용서해 줄 테니 어서 나가자. 더 열받기 전에 말이다.”
울분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금강산 수령신 자리를 내놔야지. 이제 조금 있으면 잘 지내게 될 텐데 말년에 이 무슨 생고생이냐?”
“내가 할 소리다. 얼마 있지 않아 이 자리 물려주고 천상계로 올라가 즐길 수 있을 텐데 저놈에게 걸려서 막판에 이렇게 되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둘 다 속에서는 천불이 일어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서 가자. 더 화내기 전에.”
“그래.”
풀숲을 벗어난 둘은 모습을 드러내고 절벽 중턱의 공지로 날아갔다.
―무슨 눈빛이 저러냐?
―그래, 아주 지랄이다. 우릴 아주 잡아먹을 것 같다.
숲을 나서자마자 화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겁나도록 화가 난 눈빛이다. 이미 자신들을 보았으니 다른 데로 도망갈 수도 없기에 금령과 수환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중턱으로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