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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이곳 민가는 얼핏 보기에 꽤 큰집이라 그런지 뒷문 비슷한 것이 있을게 분명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비밀 통로라든지 말이다.
한데 해 보지도 않고 바로 개죽음을 자처하다니?
“대장님, 이곳에서 나아가 싸워 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마 저들은 우리가 그들의 군사들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죽을 것입니다. 시위를 매기고 있는 궁사들에 의해서 말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백인대장처럼 보이는 저자가 앞으로 나와 우리에게 소리칠 이유가 없습니다.”
탄테가 설득하듯이 말했지만, 이미 참혹한 현장을 본 부대원들에겐 요지부동의 일일 뿐이었다.
“탄테, 통로를 찾는다 한들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보느냐? 저들은 이미 이곳 전체를 포위 했을 것이다. 도망치다 죽느니, 싸우다 죽는 것이 명예롭다.”
십인대장의 말에 이번엔 탄테의 멱살을 잡은 이가 말했다.
“병신 새끼…… 아깐 우리가 피해자라고 지껄이더니, 결국 앞모습 뒷모습, 다른 새끼였네. 더럽다. 퉤!”
놈은 탄테의 얼굴에 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뒤늦게 십인대장이 말렸다.
“됐다. 가자.”
말을 마친 십인대장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집에 다시 넣어 둔 검을 꺼내었다.
스르릉.
날이 선 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검을 바라보는 십인대장의 눈빛이 시시각각 뒤바뀌어 간다. 아마도 여러 가지 잡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청소년 시기, 성인이 되었을 무렵의 추억들을 말이다.
십인대장을 비롯해 다른 이들도 이미 잠시 회상에 잠긴 듯한 형색이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 끝에 그들 모두가 검집에 검을 빼 들었다.
“나가자. 우린 저들에게 죽임을 당할 테지만, 누군가는 우리를 알아 줄 것이다. 가자! 레노 왕국의 용사들이여!”
십인대장이 본보기로 나서련 것인지 먼저 검을 빼 들고 뛰쳐나갔다.
그걸 말리고 싶은 탄테였지만, 이미 뛰쳐나간 뒤였다.
“이야야! 국왕 전하에게 충성을! 레노 왕국에겐 영광을!”
뒤이어 탄테에게 침을 뱉은 병사 또한 검을 빼 들고 뛰쳐나갔다. 뒤이어 다른 병사도…… 또 다른 병사도…….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다면, 나가기 전 탄테를 벌레 보듯 노려보다가 나갔다는 점이고, 탄테의 말과 다르지 않게 매복 중인 궁병들에게 접근도 못하고 머리를 뚫리고 나자빠졌다는 것이다.
그걸 보지는 못한 탄테였다. 그는 이미 두 번째, 즉 자신에게 침을 뱉은 병사가 뛰쳐나갈 때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았다.
“타, 탄테 형…….”
십인대의 막내인 셰인이 두려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셰인……!”
“살고 싶어! 난 살고 싶다고. 형의 말대로 저들은 모두 개죽음을 당했을 거야. 맞지?”
어린아이처럼 ‘제발 맞다고 해 줘.’라고 말하는 셰인을 보고 있노라니, 탄테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번졌다.
“아마, 그럴 거야. 자, 시간이 없어 셰인. 통로를 찾아보자. 얼마간 시간은 있을 거야.”
“응.”
십인대가 들어온 집은 2층집이었다.
평수로 따지자면 약 50여 평은 되어 보이는 집이었는데, 아마 마을의 유지나 촌장 등이 사는 집 같았다.
탄테는 일단 조급한 마음이 들었기에 1층은 대충 둘러 본 뒤, 아무것도 없자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에, 1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아마 수가 부족하다는 걸 파악하곤, 들어온 모양이다.
“흐읍!”
셰인이 왼손으로 입을 가려 막았다. 2층에 도착한 순간, 펼친 참혹함 때문이었다.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과 노파, 이미 베니티아 왕국 놈들은 사람이 아닌 모양인지, 노파를 강간한 듯싶었다. 노인의 입에 재갈이 물린 것을 보아하니 아마 보는 앞에서 그짓을 했으리라.
거기에 혈흔도 보인다. 일을 끝낸 뒤 살살…… 고통스럽게 죽였을 것이라 으레 짐작을 하는 탄테였다.
“셰인, 난 이쪽을 볼 테니 넌 저쪽을 찾아라.”
탄테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 셰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쪽으로 향했다.
탄테는 왼쪽으로 향했는데, 둘이 갈라진 건 일단 비밀통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병신 새끼들아! 수가 부족하면 진작 말해야지! 이런 머저리 같은…….”
퍼억!
비밀통로를 찾는 도중에 밑에서 방금 그, 백인대장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살 때리는 소리 또한 들려왔다.
다행이란 점은 바로 2층으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마을을 살펴보다 자신들이 도망간 것이 아니란 걸 아는 순간 수색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올 것이 뻔하다. 이런 수색은 여덟 명이 아닌 십인대 전체가 하니 말이다.
탄테의 발길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우당탕탕!
‘젠장!’
널브러진 의자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역시나 놈들도 들은 모양인지 ‘저기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넘어진 상태로 몸을 일으키려던 탄테.
‘이상한데?’
벽난로 쪽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셰인! 찾았다! 일단 이리로 뛰어와!”
벽난로가 과연 비밀통로가 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은 셰인을 불렀다. 어차피 적들이 올라오고 있는 이상, 셰인도 죽을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자신의 직감대로 저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부르는 것이 나았다.
아무튼 잠시 후, 탄테가 벽난로로 다가간 시점과 맞게 셰인이 무슨 일이냐며 뛰어왔고, 탄테는 슬그머니 손으로 벽난로를 훑었다.
먼지가 많았기에, 먼지를 털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다! 두 놈이다!”
미리 올라온 베니티아군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여러 곳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옆에 있는 셰인을 보자니 욕지거리가 절로 입에서 맴돌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해 봐야 했다.
벽난로를 훑는 탄테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탄테를 도와 셰인이 막 벽난로에 손을 댔을 무렵!
돌연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벽난로의 앞으로 구멍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니티아 왕국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잡아!”
십인대장으로 보이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벽난로에 있는 탄테와 셰인에게 뛰어오는 순간!! 또다시 쇠 마찰음이 들리며 바닥이 점점 꺼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바닥은 곧, 앞에 구멍 뚫린 벽난로와 함께 이어지는 다리가 만들어지더니 미끄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변해 갔다.
탄테는 일단 자신이 앞에 있었기에 먼저 타고 내려갈 생각으로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고개를 돌려 셰인을 불렀다.
“셰인!”
셰인도 이미 모습을 보았는지라 허둥지둥 미끄럼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할 때였다.
푸숙!
화끈했다. 등 쪽이 화끈한 감각이었다. 거기에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탄테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적병사와 그가 든 칼이 꿰뚫은 셰인의 모습이 그의 동공에 확대되었다. 셰인의 몸을 뚫고 나온 칼은 자신의 등도 살짝 파고 들어갔었다.
탄테가 소리치려 할 무렵, 그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밑으로 쏘아 내려져갔다.
“씨바아알!!”
그리고 뒤늦은 욕설을 내뱉는 탄테였다.
탄테의 몸은 빠르게 급하강하였고, 곧 지면에 닿을 수 있었다.
한데 이상한 것이 지면에 닿는 순간 다시 하늘로 몸이 붕 뜨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몸은 닭이 자신이 날 수 있는 최대한의 높이로 뜀박질 하는 것마냥 치솟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으로 떨여졌다.
이 통로를 미리 준비해 둔 주인이 안배한 덕분인지, 볏짚을 비롯한 솜이불 같은 것이 쌓여 있어 다치지는 않았다.

탄테의 과거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현이었기에 귀를 쫑긋하고 들었었다.
‘형님에게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이야.’
“그래서 난 이 삶이 좋아. 다만,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지.”
탄테는 그 뒷이야기를 현에게 해 주었다.
셰인에 대한, 그때의 십인대원들에 대한 복수를 해 주고 싶다고. 그때 자신에게 침을 뱉은 동료의 복수 또한 해 주고 싶다고 말이다.
왜인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셰인의 죽음이 컸으리라 혼자 생각해 본다고 현에게 말해 주었다.
“그때 셰인은 매우 어린 나이였어. 거기다가 날 따라오지만 않았다면 살았을 수도, 아니 그건 제쳐 두고 나보다 그 미끄럼을 먼저 올라탔더라면 살아남았을지도 몰라…….”
스스로를 자책하는 듯한 탄테의 말이었다.
현재 탄테는 그 일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형님,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셰인이란 친구도 이런 형님을 지하에서 웃으며 바라볼까요? 제가 만약 셰인이라면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셰인은 죽었고 형님은 살아 계십니다. 셰인에 대한 죄책감은 이십 년이 넘은 세월이라면 충분했습니다. 이제 그만 떨쳐 내시고…….”
현이 한창 말을 하는데 탄테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죄책감은 떨쳐 낼 수 있을지언정 복수심은 떨쳐 내지 못하겠구나. 그들은 짐승이었어. 베니티아 놈들은 짐승이었다고! 그때도 민간인을 학살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과 약탈하지 못하는 조항은 있었어. 물론 초기라서 유명무실한 것이긴 하지만 어떻게 민간인을 그렇게 다룰 수가 있지? 심지어 농기구 하나 들고 대항하지 않은 그들을 말이야! 그들은 동족들이었다고! 우리 지배하에 있지만 그들의 동족이었다고! 난 그들에 대한 복수심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언젠간 복수하고야 말 거다.”
현은 탄테가 생각보다 심사가 매우 복잡한 것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말이 없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매순간마다 셰인과 십인대원들에 자책하고 마을 사람들과 십인대원들을 학살한 베니티아 놈들에게 복수심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형님…….”
현은 이런 탄테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탄테를 향해 현이 조용히 물었다.
“형님…… 혹시 제게 보르구검법을 배워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현은 탄테의 복수심을 조금이라도 잠재워 줄 방법으로 보르구검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이다. 복수심을 가라앉히는 것에는 무예 수련만 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보, 보르구검법을?”
탄테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예, 보르구검법은 1∼2년을 두고 해야 기본자세가 잡히는 고급 무술이긴 하지만, 형님의 확고한 의지만 계시다면 반년 안에 기본자세를 잡으실 테고 그 후에 고급 기술을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거기다 베니티아 놈들에게 복수를 하시려는 형님이신데, 힘이 없다면 예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요.”
현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싶던 탄테가 돌연 눈을 부릅뜨고 현의 손을 맞잡았다.
“부탁한다. 난, 그때 그 일이 있은 이십여 년 동안 복수심만 키웠지 제대로 된 힘을 키우려 한 적은 없었어. 하지만 네 말대로 복수를 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한 법. 부탁한다.”
탄테의 공손한 말에 현 또한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탄테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럼 이렇게 된 거 다른 부대원들도 함께 배우는 게 어떨까요? 저번에 말했듯 이번에 십수만이 넘어가는 전면전이 있을 예정인데, 조금이라도 익혀 두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탄테 또한 생각하는 바였는지 기분 나빠하지 않고 그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사실 현 또한 본국검법을 부대원들에게 언젠간 가르치리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의 몸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그건 짐승이지, 사람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다.
한데 늘 기회가 잡히질 않았었다. 막말로, 막사에서 쉬고 있는 대원들에게 가서 ‘저한테 무술 좀 배워 볼래요?’ 한다면 부대원들의 성격상 건방진 놈! 하면서 베개를 던져 버릴 것이 뻔했기에 일단은 참아 왔던 것이다.
한데 이번에 탄테를 미끼(?)로 그들을 가르칠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전쟁터에 나서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현은 탄테에게 일단은 그렇게 말하고 피리오에게 찾아간다고 하고 사령관실로 향했다. 전투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관건이다. 본국검법이 아무리 뛰어난 무예라곤 하나, 그것도 하루 이틀 배워선 쓸모가 없는 것에 불과하다.
똑똑!
사령관과 부사령관실은 바로 옆자리에 있었기에 현은 부사령관실로 향했다.
잠시 노크를 하고 안에서 ‘들어와.’라는 음성이 들려오자 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피리오!”
업무를 보고 있던 피리오는 누구지? 하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곳에 자신의 친우가 된 로터가 서 있자,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터! 여긴 어찐 일인가? 자, 잠시만 여기 앉아 기다리게.”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닌가 보다. 그에 현이 미소 지으며 지켜보는데, 피리오가 차를 한 잔 내왔다.
“자, 들게.”
후르릅!
피리오가 내온 것은 박하차였는데, 목에 술술 넘어가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른 시간에 날 찾아온 걸 보니,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선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인가?”
현은 찻잔을 내려놓은 뒤 피리오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면전의 예상일이 언제쯤이라고 했는가?”
현의 말에 피리오가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빠르면 보름일 테고, 늦으면 한 달쯤이 될 듯싶네.”
‘보름이라…….’
“왜 그러는가?”
“혹여, 조금 늦출 순 없겠는가? 한두 달 정도로 말일세.”
“한두 달 정도로?”
“그러네. 방법은 쉬울 걸세. 전령을 보내어 병력을 채비하는 두 달 정도가 적당할 듯싶으니 그때로 하자고 하면 되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민들의 식량을 징수하고 성안에 농성을 한다고 하시게. 거기에, 그래도 안 받아들인다면 한 달쯤으로 다시 변경하게. 아마 받아들일 걸세.”
“흐음…… 사실 라시온 후작 각하와 나를 위시한 다른 군단장과 사단장들 또한 되도록 전투를 늦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있었네. 일단 사령관께 여쭤보겠네.”
“고맙구먼.”
현의 말을 듣고 피리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세를 잡고 자리에 앉은 뒤 말했다.
“그건 그렇고 로터. 자네 특수부대를 맡아 볼 생각 없는가?”
“엥? 특수부대를?”
“그래, 사실 기사들이야 여럿 존재하네만, 영 못미더워서 말이지…….”
못미덥다는 뜻이, 기사들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귀족파의 간자들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보는 현이었다.
“흠……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라서 말일세, 더군다나 이번에 창설될 특수부대에는 기사들과 중산층의 자제들인 중기병들도 참여할 것 같던데, 그들이 나를 인정이나 해 줄지 의문이네.”
“그건 걱정 말게! 자네를 무시하는 놈들이 있다면 내, 기필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일세. 부탁이네. 자네 말곤 믿을 사람이 없는 것 같네. 그리고 난 자네를 믿네. 자네는 콧대 높은 기사들을 한숨에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야.”
부탁을 하는 피리오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연을 맺은 지 하루 이틀 사이인 현에게까지 이러는 것을 보니, 피리오에겐 미안하지만 그간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로터는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알았네. 일단 생각은 해 보지. 아, 그리고 전투 당일은 꼭 미루어 주어야만 하네.”
“하하! 고맙네. 그건 걱정 말게나.”
그 뒤 현과 피리오는 전투 이야기가 아닌,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워 내었다.

그날 정오.
현은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약 두어 시간가량 피리오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로 돌아온 현을 보고 동료들과 탄테가 어딜 갔다 왔냐고 물었지만, 현은 답해 주지 않았다.
또 답해 준다면 케일을 비롯해서 필스 등이 ‘우오오!’라면서 무슨 이야길 주고받았는가를 캐물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대충 운동 좀 했다고 둘러대었다. 물론 탄테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 부대원들에겐 언제 말할 셈인가?”
탄테가 귓속말로 조용히 묻자, 현은 잠시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탄테에게 말했다.
“시간상은 지금 말해야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현의 말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탄테가 소리쳤다.
“자자, 주목! 기사님께서 한 말씀을 하신단다.”
탄테의 말에 현은 ‘에엑?’ 하는 반응이었고 막사에서 서로 잡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고 있던 십인대원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말이냐? 얼렁 말해라. 이 형님이 하신 첫사랑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란 말이다!”
한편, 현은 뭐라고 말문을 터야 할지 모르다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지르기로 했다.
“에, 저기 형님들 이제 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건 잘들 알고 계시죠?”
“네가 말해 줬으니까, 알고는 있지. 한데, 왜?”
케일이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아, 그게…… 에…… 그러니까…….”
현의 더듬거림에 케일이 소리를 쳤다.
“새꺄, 빨리 말해. 이 형이 녀석들에게 하이라이트 부분을 말해야 되는데 너 때문에 말 못하고 있잖아!”
“아, 그러니까 말이죠. 크흠! 전면전이 코앞이기도 하고……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킬 줄도 알아야하고…… 흠! 검술을 배워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정적!
막사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뒤에 정적을 깨고 입을 연건 다름 아닌 람스였다.
“설마 그때 형이 보여 준 창술이요?”
람스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 묻는 걸 보고는 필스가 머리를 한 대 탁! 때린 뒤 말했다.
“검술이라잖아, 검술! 야, 근데 무슨 댓바람이 불었기에 우리한테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그러냐. 뭐, 사실 우리야 좋긴 하다만…….”
필스의 말을 이어 이번엔 아스니아가 말했다.
“필스의 말처럼 우린 좋긴 좋다. 사실 우리도 네가 쓰는 검술을 배우고 싶긴 했거든. 하지만 아무리 친하다 한들, 그런 걸 가르쳐 달라는 건 양심상 찔려서 말이지…… 하하!”
이 시대에 타인에게 검술을 비롯한 무예들을 가르쳐 달라는 건 도덕성의 문제가 있다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해서, 종자들 또한 대게 십수 년 이상을 한 기사의 밑에서 종살이를 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아! 그런 문제는 상관없습니다. 사실, 이번에 탄테 형님이 제 검법을 배우고자 하시는 욕망이 대단하신 것 같기에, 이왕이면 여기 있는 대원들 모두가 배우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오! 정말이냐? 야, 근데…… 나 같은 뚱보도 배울 수 있겠냐?”
케일이 엎어져 있던 비곗살을 가지런히(?) 치운 뒤 현에게 다가가 말하자, 현은 잠시 케일의 몸뚱이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형님은…… 조금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형님은 검보다는 협도술을 익히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네요. 덩치가 조금 있으신 아크니아 형님과 아스니아 형님도요. 아, 물론 아스니아 형님과 아크니아 형님은 검을 배우셔도 되긴 합니다. 두 분은 협도와 검, 두 가지 모두 어울리시는 체구시거든요.”
현의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들이 어찌 알랴! 보병들 사이에서는 귀신 잡는(?) 무기라고 일컬어진 협도를!
그리고 그런 궁금증은 곧 입을 통해서 새어 나왔다.
“협도가 뭐기에 우리 같은 체구의 사람들에겐 좋다는 거냐?”
아스니아의 물음이었다.
현은 협도에 대한 설명을 빠뜨리고 협도술을 익히라고 한 것에 대해 ‘아차!’ 하다가 일단 협도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정리를 하고는 그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협도는 길이 1m 20cm 정도의 자루에 90cm 정도의 칼날을 덧대어 만든 무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생겼냐 하면요. 일단 자루는 장창의 창대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칼날은, 세이버 아시죠?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충 그걸 연결해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협도는 기병, 보병들을 상대하기에 좋은 무기입니다. 또한, 진을 치고 있는 적병들의 진을 파훼시키기에도 좋은 무기이고, 효용성 면에선 매우 뛰어난 무기입니다.”
현의 설명은 간단한 협도의 설명이라 할 수 있었다.
협도란, 중국의 미첨도와 일본의 나키나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미첨도는 몰라도 일본의 나키나타는 협도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협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철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협도란 것이 얼마나 뛰어난 무기였는고 하면, 조선시대 팽배수, 검병, 기수 등과 더불어 협도를 무기로 하는 협도수 또한 존재했다고 한다.
협도는 기병들이 사용한다면 그 효용성이 떨어지지만, 보병들이 쓴다면 매우 효용성이 큰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길이는 약 2m쯤 된다.
“멋있긴 한 거냐?”
현의 설명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귓구멍을 파고 듣던 케일이 현의 말이 마침내 끝이 나자 물었다.
현은 무예를 배우기에 앞서 ‘멋’을 논하는 케일이 과거 자신과 겹쳐 보였기에 그런 케일에게 피똥을 싸게 만들고자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피똥 싸게 만들려면 일단 그가 협도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이죠! 협도는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기일 겁니다. 사실 저는 창과 검보단 협도를 잘 쓰는데, 이곳엔 협도가 없기에 창을 쓰는 것입니다. 하니, 형님들이 배우시게 될 협도는 제 주 무기이기도 하니, 더욱더 잘 가르쳐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케일과 달리 아크니아와 아스니아 형제는 꽤나 반응이 있었다.
“협도란 무기를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다. 설명하는 것도 그렇고, 대장간에서 팔겠냐?”
“이곳엔 없습니다. 대장장이에게 의뢰를 해야겠죠. 저번에 리벨 도시에 나갔을 때 없는 걸 보니 이곳엔 없는 것 같아요.”
“하기야, 나도 그런 무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럼 모두 제게 검과 협도를 배우기로 하신 겁니다? 그럼 모두 찬성한 걸로 알고! 내일부터는 막사 옆 공터에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아, 형님들은 일단 저와 같이 가시죠. 번화가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대장간에 가야 했다. 협도를 만들러 말이다.
아스니아와 아크니아는 현에게 무술을 배운다는 마음에 들뜬 표정이 역력했고, 케일은 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물론, 케일을 제외한 모든 부대원들은 흥분한 표정이 역력했다. 앞서 말했듯, 이 시대에 타인에게서 검법을 배우기란 하늘의 별따기 마냥 어려운 것이다.
한데 로터가 손쉽게, 그것도 직접 자신들을 가르쳐 준다하니, 감사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자신들은 해 준 것도 없는데 로터는 매번 자신들에게 이리 살갑게, 또는 배려해 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또다시 로터가 21십인대에 들어온 걸 다행이라 여기는 6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