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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리노트라이 1권 (1화)
프롤로그
“네 상상을 펼쳐 이 세상을 속이고 모든 것을 가져 봐!”
욕망의 속삭임.
노예였던 리노, 그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1. 미래를 읽는 자
헤이나 영지에 속해 있는 광산.
이곳 또한 여타 광산들과 마찬가지로 노예 중에서 아이들을 데려다 일을 시킨다. 어른들이 작업하기 위해서는 굴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기술 부족으로 굴이 무너지는 사고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무너진 굴을 다시 파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이기 때문에 몸집이 작은 아이들을 들여보내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그곳의 경비를 담당하는 니콜라스 대장이 이른 아침부터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 아이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일을 쉰다. 대신 이곳 주변을 청소한다.”
일을 쉰다는 말에도 아이들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졌다. 광산 주변엔 그들의 배설물과 음식 찌꺼기로 지저분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노예이고 좁은 굴 속에 들어가 고된 일을 한다지만, 더러운 것을 만지고 치우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대장이 경고했다.
“며칠 후에 세르피어 님께서 오신다. 그때, 그분이 만에 하나 네놈들의 배설물이나 쓰레기를 밟기라도 하는 날에는 몇 놈은 죽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 깨끗이 치우도록.”
아이들은 힘없는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하고는 광산 주변을 치우러 흩어졌다. 그때,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덩치도 큰 리노라는 아이가 다가왔다.
“대장님.”
“왜?”
“세르피어 님이라면 헤이나가의 차남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런 분이 여긴 어쩐 일로 오는 겁니까?”
노예와 감시병이라는 신분으로서 나눌 수 없는 일상적인 대화이다. 그럼에도 둘은 스스럼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아니, 니콜라스가 대화를 받아 줬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리노라는 아이의 재능 때문이리라. 처음 광산에 끌려왔을 때부터,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며 노예 아이들은 물론 감시병과도 친분을 돈독히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뺀질거리며 일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린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매일같이 냇가에서 몸을 깨끗이 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특이한 점이 리노란 아이를 노예이면서도 노예로 느껴지지 않게 한 것일지 모른다.
니콜라스가 물었다.
“왜? 혹시 요즘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냐? 그래서 세르피어 님이 오시는 목적을 소재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는 거냐?”
“하하! 역시 대장님의 눈치는 대단하시네요.”
“후후, 네놈이 이야기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영주님과 그 가족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냐?”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재미난 이야기 만들어 들려드렸잖아요.”
경비병 대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들이 제공해 준 정보를 가지고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 어느 유명한 음유시인의 공연 못지않은 재미를 줬던 것이다.
“알았다. 말해 주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비밀 같은 것도 아닌데……. 실은 세르피어 님이 일찌감치 상인들과 만나며 상계 쪽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제법 재능이 있나 봐. 그래서 영주님이 이 광산도 세르피어 님께 맡기기로 했다더군.”
“이곳을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장남이신 레언 님이 계신 이상 후계자가 될 수 없으니 다른 길을 찾은 것이지. 아마 그 두 분이 있는 이상 헤이나 영지는 계속 번창할 거야. 레언 님은 타고난 용사인 반면 세르피어 님은 상인이니 말이야. 한 분은 힘을 모으고 다른 분은 금력을 모으니 어찌 영지가 번창하지 않겠어?”
리노는 자신도 모르게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귀족…… 그것도 영지를 가진 대귀족의 차남이, 겨우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상계에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영주직을 이어받지 못한다 해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늙도록 놀고 먹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 돈을 벌려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단순한 취미나 재미로 나선다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가진 도련님이 무언가에 도전을 한다면 그에 합당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 법. 그럼 세르피어가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답은 너무나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후계자!’
세르피어는 차남에다 부친이 아닌 모친을 닮아 연약하게 생겼다. 반면에 레언은 타고난 용사이자 상속권을 가진 장남이기에, 그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피어가 영주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부(富)만큼 좋은 힘도 없겠지. 물론, 그가 영지를 부강하게 하려는 단순한 목적을 가졌을 수 있으니 한 번 알아보는 것이 좋을 거야.’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리노가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저, 그러니까 이 광산을 세르피어 님이 관장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니까.”
“그럼 대장님도 앞으로는 그분에게 잘 보여야 되겠네요.”
니콜라스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임시로 맡은 것이기에, 세르피어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왜 잘 보여야 하지?”
“그래야 뭔가 떨어지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만약 밉보였다가 그분이 해고라도 하는 날에는…….”
“하지만 어차피 이곳의 진정한 주인은 레언 님이 될 텐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리노가 고개를 저었다.
“레언 님은 타고난 용사라면서요. 아마도 영지 운영 쪽으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세르피어 님이 계속해서 이곳을 쭉 관장할 수 있는 문제지요.”
“젠장…… 일이 그렇게 되는 건가?”
잠시 생각해 보니 리노의 말이 일리 있다 여긴 니콜라스가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곳 경비대장인 내가 그분께 잘 보일 방법이 있을까?”
“사람이란 원래 칭찬에 약한 법이지요.”
“칭찬?”
“예. 그러니 그분이 아주 흡족할 만한 환영 인사말을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니콜라스가 리노를 향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물었다.
“너…… 뭐 좋은 인사말이 떠올랐나 보구나.”
“아니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제가 대장님을 돕겠습니다.”
리노는 속으로 사악한 웃음을 터트렸다. 잘못했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는데, 왜 자신이 그 책임을 진단 말인가. 그저 조금씩 미끼를 던져 자신이 원하는 환영 인사말을 니콜라스가 스스로 생각해 내게 하면 될 것을…….
* * *
헤이나가의 장자와는 달리 작은 체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세르피어는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쾌쾌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건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당연히 여기고 즐기는 듯 보였다.
니콜라스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 발자국 나섰다. 그리고는 주먹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이며 리노의 도움으로 준비한 환영 인사말을 했다.
“낮은 곳에서도 모든 곳을 관조하며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기회를 기다리는 미래의 지배자 세르피어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모든 경비병이 니콜라스를 따라 인사를 하는 순간, 세르피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지금의 인사는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듯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두 인사를 하느라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세르피어의 표정을 본 자가 없다는 것이다.
어린 귀족 소년은 얼굴 표정을 수습하고는 물었다.
“환영 인사가…… 참으로 거창하군.”
니콜라스는 자신의 환영 인사가 성공했다 여기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름이 뭐지?”
“저는 이곳 경비대장인 니콜라스라고 합니다.”
“좀 전의 인사말은 자네가 직접 지은 것인가?”
“저……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약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제가 지은 것이 맞습니다.”
물론, 세르피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만약, 니콜라스가 그 환영 인사말을 만들었다면 아까 보여 준 기쁜 표정 따위가 없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사말로 자신을 시험하려 든 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세르피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 도움을 받았다는 자가 누군지 알 수 있나?”
“그게…… 리노라는…… 놈입니다.”
“경비병인가?”
“노예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르피어를 동행한 호위기사들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노예는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치부되기에, 평민도 노예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그런데 대귀족에게 그런 노예의 도움을 받아 만든 환영 인사로 맞이했다는 것은, 모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니콜라스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인사말은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놈이 유명한 음유시인에 비견될 정도로 이야기를 잘하기에 아주 약간의 도움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한 호위기사가 화를 참지 못하고 뭐라고 호통을 치기 직전, 세르피어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니콜라스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것들은 전부 어린 소년이라고 들었는데, 그 리노라는 것도 어린 소년인가?”
“아주 어리진 않고 올해 17살입니다. 이곳에서 벌써 8년째 일하고 있거든요. 물론 지금은 덩치가 커져서 굴에는 들어가지 않고 감독관 역할을 하지만…….”
“그런데, 그것이 유명한 음유시인 못지않은 입담을 가졌단 말이지?”
니콜라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그놈의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르피어는 이미 경비병 대장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온통 그 노예 소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리노란 노예가 이것을 노린 것이라면 대성공이라 말해 주리라.
잠시, 리노란 노예에 대해 생각하던 세르피어가 물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9년째 있다고 했는데, 혹시 탈출 시도는 하지 않았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리노라는 놈을 포함해, 어느 놈도 지금껏 단 한 차례도 탈출 시도는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잘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군.”
경비대장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산 주변 곳곳에 물 샐 틈 없이 경비병이 숨어서 지키고 있기도 하지만, 연대 책임 제도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단 한 놈이라도 탈출을 한다면 탈출한 놈과 친했던 놈들 네 명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철저히 감시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도망가 봤자지만…….”
마지막 말에 세르피어는 자신의 질문이 멍청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파너 왕국의 건립과 함께 시작된 노예제도는, 전 왕국의 왕가 인물들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노예란 미천한 신분이 됐다지만 왕가의 혈통이란 이유 때문에 더욱 강한 통제와 감시 아래 두었다. 만에 하나, 단 한 명이라도 도망을 친다면 온 왕국이 나서서 노예를 잡아들여 일벌백계하여 본보기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제는 전 왕가의 망령이 일어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노예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공포로 다스리기 위함이지만…….
“그런데 그것의 입담이 그렇게 좋은가?”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놈이 해 주는 이야기는 정말로 재미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재미난 얘깃거리가 듣고 싶었는데 잘됐군. 오늘 저녁에 부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