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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2화)
1. 미래를 읽는 자 (2)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나서서 반대를 했다.
“세르피어 님.”
“왜 그러시오, 테오르 경.”
“상대는 노예입니다.”
“그래서요?”
“그런 것이 만든 저급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그만!”
세르피어는 테오르란 기사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냥 이야기나 한 번 듣자는 건데 문제가 된다 생각하시오? 그런 저급한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더럽혀지고 교양이 떨어질까 봐서? 그럼 내가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유명한 음유시인을 불러달라 해야 옳다고 보시오?”
“…….”
“그냥 저녁에 심심할 것 같다는 생각에 들어 보겠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생각하시오? 아니면 사람들을 보내 저녁때까지 실력 있는 음유시인을 데려오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생각하시오?”
노예가 만든 저급한 얘깃거리를 듣는 것은 귀족으로서 교양 없는 짓이라고 한다면, 이런 오지에서 필요치도 않고 구하지 못하는 것을 찾는 것은 우두머리로서의 자질에 큰 문제가 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테오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그냥 듣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난 꼭 듣고 싶소. 됐소?”
세르피어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결국에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레언에 비해 참을성이 없음을 비교하며 비난하겠지만, 세르피어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잘하려 노력한다 해도, 기사들에게 있어 레언은 타고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 * *
광산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금속 종류와 양을 확인한 세르피어는 일찍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솔직히 그가 한 일들을 보자면 일부러 광산까지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었다. 그럼에도 직접 광산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시키고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식사 준비가 되자 니콜라스가 한 소년을 데리고 왔다. 청년기에 들어서기 직전인 소년은 오랫동안 광산에서 일을 해서인지, 마른 체격임에도 다부져 보였다.
“세르피어 님. 이놈이 리노입니다.”
세르피어는 말도 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는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막사 안에 있는 호위기사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무서운지 고개도 들지 못하는 소년은, 노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청결했다.
“이름이 뭐냐?”
세르피어의 질문에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리노라 합니다.”
“네 입담이 대단하다고 경비대장의 칭찬이 자자하더군. 나도 오랜만에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한 번 해 보거라.”
“어느 내용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십니까?”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에, 이야기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그런 예상을 뒤엎으며, 오히려 당당하게 어느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되묻자 모두 당황했다.
세르피어는 재미있다는 눈빛을 하며 물었다.
“어떤 내용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
리노란 노예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세르피어를 바라봤다.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세르피어 님은 물론 다른 분들도 유명한 음유시인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아니면, 책을 통해서 읽으셨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한 소재의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재미가 없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럼?”
“좀 색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해 보거라.”
세르피어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내용은 한 마을에 사는 어린 소년의 성장을 담은 이야기로 처음에는 충성심이 강한 사냥개를 키워 재물을 지키고, 재산이 불어나자 용병을 고용해 힘을 키우고 나중에는 마물을 물리치고 왕국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훌륭한 음유시인들의 것처럼 학문적 깊이는 없지만, 리노의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니콜라스마저 재미가 없어 하품을 할 지경이었다. 마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용사나 마녀의 저주에 맞서 싸우는 마법사 등 수많은 소재가 있건만, 리노가 선택한 이야기는 힘없는 한 소년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테오르가 비웃었다.
“역시 멍청한 것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 그런지 말도 안 되는 내용이군. 그 소년이 용병을 고용해서 명령을 내린다? 그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이 세상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면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리노는 테오르란 호위기사의 말에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세르피어의 눈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르피어 또한 리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피어는 속마음과 반대로 말했다.
“테오르 경 말대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군요. 이제는 그런 재미없는 색다른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경들도 남아서 듣겠소?”
“아닙니다. 저는 이만 제 막사로 돌아가 볼 생각입니다.”
테오르가 먼저 일어나자 다른 기사들 또한 차례대로 일어나 자신들의 거처로 건너갔다. 그러자 세르피어가 니콜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이만 나가 보지.”
“예? 저도요? 하지만 세르피어 님을 지켜드려야…….”
“하하하! 지금 날 걱정하는 건가? 걱정 말게. 겉모습은 허약해 보여도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검을 연습하고 있다네. 저런 것쯤은 내 상대도 되지 않지.”
그러며 고기와 술을 가리켰다. 가지고 나가서 나눠 먹으라는 뜻이었다.
이에 니콜라스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될 수 있는 한 잔뜩 들고 나갔다.
단둘이 남자, 세르피어가 앉으라 손짓을 하며 물었다.
“좀 전의 이야기도 잘 들었다. 마치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자세히 말해 주더구나.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네가 어찌 알았냐는 것이다.”
“무얼 말입니까?”
노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담담히 되묻자, 세르피어는 피식 웃으며 말해 줬다.
“좀 전의 이야기도 그렇고 아침에 환영 인사말도 그렇고…… 네가 만든 것 다 알고 있으니, 경비대장이 만들었다는 헛소리는 할 필요 없다.”
“…….”
“어찌 알았지? 나의 목표를?”
직설적인 질문에 리노는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환영 인사말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기회를 기다리는 미래의 지배자’란 말은 단순한 칭송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영지의 주인이 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경비병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생각했습니다.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상계로 뛰어든 것일까?”
“목적?”
리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을 바꾸었다.
“목표로 정정하겠습니다. 대체 모든 것을 가진 분이 왜 힘들게 상계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단순히 배우겠다는 입장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큰 성과를 냈습니다.”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은 어찌 알았지?”
“소문도 소문이지만, 광산은 영지의 중요한 곳입니다. 이런 곳을 맡겼다면 그만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세르피어가 계속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리노의 설명은 이어졌다.
“젊고 경험도 없으신 분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성공을 이뤘다는 말은 두 가지를 뜻합니다. 타고난 능력을 갖췄다는 것과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했다는 말이지요.”
“…….”
“저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했을까? 단순히 경험이나 쌓고 세상을 배우자는 목표 때문에? 아니면 더욱 큰 무언가를 위해 일까요? 사람은 뚜렷한 목표가 없으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이지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세르피어는 리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크게 웃었다. 설마하니 노예 출신의―미래를 읽는 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누군들 알았겠는가.
음유시인이 유명한 것은 단순히 지난 역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 그들을 유명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 그리고 관찰력을 이용한 통찰력이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말이 ‘전쟁의 승패를 미리 알고 싶거든 음유시인에게 질문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그런 통찰력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그런 능력을 가진 음유시인을 ―미래를 읽는 자―라 칭하며 귀인 대접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노예, 즉 영주에게 귀속된 짐승이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짐승인 것이다.
“너의 목적은 뭐지?”
“…….”
“너는 어차피 노예다. 그런 능력을 가졌든 아니든 상관없이 노예일 뿐이다. 네 이마에 찍힌 우리 가문의 인장은 지워지지 않는단 말이다. 그렇다면 나보다는 나의 아버님이나 형님에게 손을 뻗었으면 더 좋은 대접을 받았을 텐데…… 왜 나에게 접근한 것이지?”
리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매만졌다. 머리카락을 통해 전해지는 두툴두툴한 상처가 유난히 쓰라리게 느껴졌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리노가 말했다.
“예. 전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오래 편하게 사는 것입니다.”
“응?”
“멍청한 주인은 명검을 팔아먹지만, 똑똑한 주인은 명검을 이용해 약탈을 합니다.”
“하하, 네놈은…… 정말 겁이 없구나.”
그러나 리노는 세르피어의 박장대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제 자식에게는 이 굴레를 물려주기 싫습니다.”
“…….”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먼 미래에 제 자식은 이마에 인두를 지지 않고 평범한 평민의 집에서 평범하게 자라게 해 주십시오.”
세르피어는 웃었다. 어린놈이 벌써 후손을 생각하다니…… 과연 평범한 인간이 아님이 분명했다.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누구도 너를 평민으로 만들어 줄 수 없다. 하지만 아이는 평민이 되게 해 줄 수 있다. 평민 집안 아이와 바꾸면 되니까, 간단하지. 알았다. 내, 약속하지. 네 아이는 평민 집안에서 자라게 해 주겠다고.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한다면 네 아이를 아주 부유하게 자라게 해 주지.”
“감사합니다.”
리노는 곧바로 얼굴을 감추며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고, 세르피어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2. 흠집 (1)
영주성에 들어온 리노는 세르피어의 허락 아래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세르피어의 심부름이나 가끔 할 뿐이었다.
그러자 영주성의 어린 시녀와 하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층민이라 해도 평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예가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놀고먹는 듯 보이니 어찌 불만이 없겠는가.
그중 가장 크게 불만을 품은 사람은, 헤이나가의 장자 레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로사라는 시녀였다. 붉은 머리에 16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가슴을 자랑하는 그녀는, 17세인 레언의 뜨거운 청춘을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시녀라는 신분 말고도 정부라는 비공식 신분으로 인해, 시녀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고 당연히 콧대 또한 덩달아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그녀 앞에 미천한 노예가 알짱거리며 일도 안 하고 매일 노는 모습을 보여 주니 어찌 배알이 꼬이지 않겠는가.
로사는 아래 아이들을 시켜서 리노를 괴롭혔다. 세르피어가 직접 데려온 아이이기에 폭력을 가할 수 없지만, 사람을 괴롭히는데 있어 꼭 폭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침대에 똥을 묻혀 놓거나 옷과 신발에 죽은 쥐를 넣어 두어는 식으로 못살게 굴 수 있었다. 물론, 리노는 그런 괴롭힘에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너희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아느냐?”
외양은 좀 약해 보일지는 몰라도, 어느 누구보다 차갑고 무서운 세르피어의 호통에 로사를 비롯해 다른 어린 시녀와 하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일하던 도중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끌려왔는데,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세르피어가 얼음장같이 서늘한 억양으로 말했다.
“너희는 나를 모독했다. 그것이 너희의 죄다.”
“아니, 저희가 언제…….”
짝―
세르피어는 로사의 변명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형벌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고문관은 기름 먹인 가죽 채찍을 힘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