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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3화)
2. 흠집 (2)
‘후후, 역시 멍청한 계집은 독이라더니만…….’
그는 고통 속에 비명을 질러대는 로사를 바라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로사란 계집은 형벌이 끝난 후, 형님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할 것이다. 그럼 생긴 것만큼 다혈질이고 멍청한 레언은 분명 자신에게 따져 물으러 올 가능성이 컸다. 아니, 꼭 와야만 했다.
‘그래야 네놈에게 흠집을 낼 수 있으니까.’
세르피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사의 비명 소리와 채찍질 소리가 합창을 이루는 고문실에서 빠져나와,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향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에 존재하는 작은 독방 앞에 이른 그가 안을 향해 말했다.
“괜찮나?”
그러자 철문으로 완전히 가려진 독방 안에서 리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많은 준비를 해 주신 덕분에 편안합니다.”
“그 비좁고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곳이 편안하다니……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군.”
“그래도 횃불 덕분에 어둡진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제법 지낼 만 합니다. 이대로라면 처음 계획한 열흘이 아니라 20일 정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봐서 기한을 늘리십시오.”
그 말에 세르피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꼭 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세르피어 님의 뜻을 더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동안 서재에서 가져온 책이나 마저 읽겠습니다.”
세르피어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자연히 그려졌다. 리노란 노예는 확실히―미래를 읽는 자―란 칭호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을 읽고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엿보는 능력을 갖췄다. 그런 능력을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활용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마음이 든든했다.
‘진정한 충견을 얻었군. 후후.’
기쁨 마음을 겨우 억제한 세르피어는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책이냐?”
“음…… 가루다 왕국의 역사와 국가 정치에 관한 책입니다.”
“가루다 왕국?”
어찌 모르겠는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약체 국가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외교만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는 나라이거늘.
“정말로 재미없는 책을 가져왔구나.”
“하지만 배울 것은 많을 것 같습니다.”
“그건 왜지?”
“세 왕국과 국경선을 마주하는 약체 국가가 그렇게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그만큼 처세술이 좋다는 뜻이니까요.”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세르피어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엔 딱히 배울 만한 점이 없는 국가이지만, ―미래를 읽는 자―는 배울 게 많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그럼 나는 이만 간다.”
“좋은 결과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지. ―미래를 읽는 자―가 만들어 준 계획인데…… 하하하!”
* * *
세르피어는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 벌인 사업과 앞으로 개척해 나갈 새로운 계획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아버지이자 영주인 로그 헤이나를 비롯해 가신들이 모인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보고가 시작된 지 한참이 흘러, 회의장 문이 쾅 열리며 일반 어른보다 머리가 하나쯤 더 큰 레언이 들어섰다.
“너!”
씩씩거리는 레언을 향해, 세르피어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좀 늦으셨습니다.”
어찌 늦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회의 시간에 맞춰 로사 등을 풀어 줬는데…… 레언은 분명,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로사를 보고는 회의 시간도 잊었으리라.
레언은 회의장에 있는 아버지나 가신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세르피어를 향해 곧바로 다가가더니 멱살을 잡으며 물었다.
“너! 왜 그랬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로사를 고문했느냔 말이다! 네가 데려온 노예를 좀 괴롭혔다고 해서, 고문을 해? 노예 따위 때문에……!”
그 말에 영주는 물론 가신들 모두 세르피어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노예를 데려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일 잘하는 노예를 부리는 것은 고유의 권한이니 문제될 것은 없지만, 노예를 아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짐승이기 때문이다.
이에 세르피어는 정색을 하며 레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은 중요한 일로 보고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사적인 대화는 나중에 나누지요.”
그러나 레언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적인 일? 이것이 사적인 일이라고? 내가 로사를 아끼는 것은 너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 로사를 미천한 노예 때문에 고문을 한 것은, 네가 날 그만큼 업신여긴다는 뜻이지 않고 무엇이냐!”
상대가 화를 조금도 다스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자, 세르피어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와 가신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 결과, 모두 하나같이 레언의 입장에 동의하며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후후, 그래…… 레언은 너희들의 기대주이니, 지금은 그의 말이 다 옳게 들리겠지. 하지만 그것을 내가 조금씩 깨 주지.’
지금 이 상황을 가장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세르피어 자신임을 안다면 그들의 표정은 어찌 변할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극을 해야 할 시간이기에, 그는 얼굴 표정에 신경을 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실망입니다.”
전혀 예상에 없던 대답이었는지 레언은 물론 회의장 안의 모두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뭐가 실망스럽다는 것이지?”
“형님께서 그런 미천한 것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이 실망스럽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계집 하나에게 홀려 이성을 잃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니…….”
“그 무슨……!”
하지만 세르피어는 레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형님께선 내가 노예 따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제가 영지 내에서 맡은 일들이 그냥 어린이 놀이로 생각하십니까?”
“그럼 왜 그랬느냐?”
“그년이 나를 모독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체 무슨 말이냐?”
그는 레언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가신들과 영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깨끗이 씻어 놓으라고 보낸 산양 가죽 신발과 아버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자 가죽 등이 찢기고 똥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로사란 계집년이 한 짓임을 알았습니다.”
세르피어는 고개를 획 돌려 레언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런데 형님은 그런 미천한 계집의 거짓말에 속아 이리저리 휘둘려서 결국엔 이런 회의장에서 이런 난동을 부립니까? 아니면 형님은 제가 그 로사란 계집보다 하찮게 보이는 겁니까?”
“아니, 난…….”
레언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특히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버지와 다수의 가신들을 보니, 정말 쥐구멍에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가신들 중 레언을 가장 지지하는 토란트란 대머리 중년이 세르피어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노예는 어디 있나?”
“벌을 받고 있습니다.”
“벌?”
“노예 주제에 내 물건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지 못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요. 그런 것들을 덕으로 다스릴 만큼, 전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하 감옥 독방에 가둬 뒀습니다. 생각은 열흘만 가둬 두려 했는데, 아무래도 20일은 둬야겠습니다.”
너무 비좁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대소변을 해결할 공간도 없는 독방에 20일 동안 가둔다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하는 세르피어의 모습에 모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마치 레언과 세르피어가 뒤바뀐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세르피어의 발언으로 레언은 미천한 신분의 여자에게도 휘둘리는 멍청이란 선입견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이에 지금까지 조용히 관망하던 영주, 로그가 장남인 레언을 불렀다.
“레언.”
“예, 아버님.”
“네가 할 일을 알고 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에 로그는 실망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년을 죽이란 말이다.”
“예?”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되묻는 모습에, 로그 영주는 이제 얼굴을 확연히 구겨 버렸다.
“왜? 못 죽이겠느냐?”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수많은 수하를 인도하고 넓은 영지를 다스려야 할 대귀족이, 계집의 세 치 혀에 휘둘린다는 것은 더 없는 수치다. 진정한 통치자는 강한 힘뿐만이 아니라 냉철한 결단력과 과감한 판단력을 요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너는 그년을 죽여야 한단 말이다.”
그 말에 레언은 마지못해 ‘예’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대답을 한 이상 죽일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세르피어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의 일로 영지의 후계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던 레언에게 흠집을 냈다는 것이다.
‘후후, 작은 흠집이 틈새가 되고 그 틈새는 어느새 큰 균열이 되어 버리겠지.’
* * *
이십 일간 옥에 갇혀 있다 나온 리노는 같은 기간 동안, 편히 쉬면서 몸을 추슬렀다. 아무리 준비를 했고 편의를 봐 줬다고는 하나, 몸을 움직일 공간조차 없는 좁은 독방에 갇혀 있다 나왔으니 몸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세르피어가 독서를 즐기며 쉬고 있던 리노를 불렀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세르피어는 자신 앞에 놓인 문서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광산에서 난 광물을 거래한 대금이 들어오는데, 예상치를 뛰어넘더군.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데, 누구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돈으로 매수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이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에 들뜬 세르피어의 얼굴엔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리노는 오히려 착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뜸을 들인 리노가 물었다.
“만약, 누군가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주는 사람과 금광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목숨을 걸고 따르라고 한다면 누구를 따르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세르피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야…… 금광을 가진 자가 아닐까?”
“왜입니까?”
“금화 주머니를 가진 자가 계속해서 나에게 돈을 줄 능력이 되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 대답에 리노는 엄숙한 표정을 고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금광을 가진 자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그리고 현재로는 레언 님이 금광을 가진 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세르피어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달리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군.”
“하지만 사실입니다.”
“자넨 내가 저들의 충성을 사기 위해 푼돈을 쓸 것이라 보는가?”
“큰돈이겠지요. 그리고 분명, 세르피어 님의 제안을 받은 자들은 마음이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왜냐하면 세르피어 님이 준 돈은 영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레언 님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한 짓이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화를 억누르는 것이 역력한 세르피어를 보며, 리노는 이야기 하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대영주를 모시는 두 기사가 있습니다. 한 기사는 마음이 너무 곧아서 기사도를 따라 삽니다. 그리고 다른 기사는 욕심이 많아 기사도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쫓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작은 영지의 영주가 나타납니다. 영주는 처음에는 기사도를 따라 사는 기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합니다. 어찌 될 것 같습니까?”
명확한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이야기로 대답을 하는 리노의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대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당연히 다른 영주의 제안을 거절했겠지.”
“그렇겠죠. 그래서 그 영주는 이번에는 욕심이 많은 기사에게 접근을 했습니다. 돈으로 그 기사의 충성을 사려고 합니다. 얼마나 필요할까요?”
세르피어는 빨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흔히 돈을 많이 주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충성하고 모셔야 하는 대상이 다르기에, 그에 따른 명성 또한 달라진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 확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리노가 대신 답했다.
“아마 엄청난 금액이 필요로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욕심이 많은 자라 하여도 기사입니다. 자신이 처음에 한 충성 맹세를 저버리고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되는 일인 만큼 거대한 금액을 요구하겠지요.”
“즉, 그 작은 영지의 별 볼일 없는 영주가 나란 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