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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4화)
2. 흠집 (3)
스스로 말하고도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보다 더욱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졌다. 그럼에도, 장남이 아니고 타고난 용사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했다. 그리고 힘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사람들의 인식이 증오스러웠다.
세르피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십시오.”
“스스로의 가치?”
“세르피어 님 또한 레언 님과 비교해 주군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저들에게 각인시켜야 합니다. 즉, 저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려 놔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도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 선물을 안겨 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리노는 세르피어의 눈빛이 반짝이며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더 목소리를 높여 설명했다.
“부를 축적하십시오. 하지만 지금처럼 그냥 사업을 좀 잘해서 남는 돈을 뒤로 빼돌리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럼?”
“그 돈으로 사업을 하십시오. 영주님의 이름이 아닌 세르피어 님의 이름으로 상단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십시오. 그리고 필요할 때, 쏟아부을 수 있게 번창시키십시오.”
“먼저 나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 저들에게 호감을 산 다음, 금력으로 저들의 마음을 빼앗아라, 이건가?”
리노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어떻게 할 수 있지?”
“그것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세르피어 님은 온전히 세르피어 님만의 상단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는데 신경을 쓰십시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직, 세르피어 님이 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개인적인 상단을 꾸린다는 것을 레언 님이나 그 측근이 알게 되는 날,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말에 세르피어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럼 대리인을 내세워 일을 진행시켜야겠군.”
이에 리노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다른 신분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른 신분?”
“예. 예를 들면 가루다 왕국의 몰락 귀족 같은 신분 말입니다.”
그러며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가루다 왕국에 관한 책을 보여 줬다. 가루다 왕국은 워낙 약소국이다 보니 지방의 귀족들에 관한 기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신분을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것도 좋겠군. 알았다, 그렇게 하지.”
세르피어가 쉽게 승낙을 하자, 리노는 밝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독 등을 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독은 왜……? 너 혹시 벌써 계획을 세워 뒀던 것이냐?”
놀란 눈으로 묻는 세르피어의 질문에 리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로사가 비밀리에 처형당한 이후로, 레언과 세르피어 사이는 많이 냉랭해졌다. 아직 레언이 동생을 경쟁자로 보거나 견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서였다. 그러다 보니 세르피어의 활동은 점점 조심스럽고 축소된 듯 보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세르피어는 테오르를 비롯한 다섯 명의 호위기사들은 물론 다른 기사들 열 명을 더 대동하여 사냥을 나가기로 했다. 사람들은 그간 레언의 눈치를 보느라 힘들었기에 기분 전환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벌써 해가 졌군.”
반나절 동안 산속을 헤매고도 토끼 한 마리 잡지 못한 세르피어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투덜거렸다. 마치,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모두 세르피어가 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레언일 것이 분명했다.
“세르피어 님. 어찌하시겠습니까? 마을로 내려가시겠습니까?”
테오르의 물음에 세르피어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만 괜찮다면 야영을 하고 싶습니다.”
“예? 정말이십니까?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예. 하도 답답한 곳에 있었더니, 탁 트인 곳에서 하루 밤만이라도 묵었으면 합니다.”
“뭐, 정 그러시다면야…….”
말투도 예전과 같지 않은 것이 그렇게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싶어 조금이나마 동정심이 생긴 기사들은 스스로 알아서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정에 없던 야영이라 그런지 모자란 것이 제법 있었다.
그중 제일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음식이었다. 가볍게 수프를 끓을 수 있게 성에서 나오기 전에 가져온 말린 야채와 고기 등이 있기는 하지만, 엄청난 식성을 자랑하는 장정 16명의 배를 불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테오르가 네 명의 기사를 데리고 음식을 구하러 가기 위해 일어서자, 세르피어가 부탁했다.
“테오르 경. 미안하지만, 술 좀 구해 주실 수 있겠소?”
“예.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려는 마을은 작은 곳이라 입에 맞는 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상관없소. 그냥 적당히 취하고 싶은 것뿐이니 말이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테오르와 기사들은 말을 이끌고 야영지에서 잠시 떨어진 후, 말에 올라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남은 기사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가지고 있던 재료로 당장 허기를 달래 줄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이에 세르피어는 사냥을 나서기 전, 주방에서 특별히 챙겨 준 육포 더미를 꺼내서 수프에 첨가시켰다.
“세르피어 님, 수프 드십시오.”
한 기사가 작은 나무 그릇에 고기 몇 점과 야채가 둥둥 떠다니는 액체를 가져왔다. 하지만 세르피어는 그릇을 받았다 다시 돌려줬다.
“요즘 신경 쓰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입맛이 없구려. 난 나중에 술이나 마실 테니, 경들이나 드시오.”
“하지만 빈속으로 술을 드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테오르 경이 몇 가지 음식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술 드시기 전에 먼저 수프로 속을 달래는 것이 좋습니다.”
기사가 계속 권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릇을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럼 좀 있다 식힌 다음 먹을 테니 경들이나 먼저 드시오.”
“예. 그러시다면…….”
기사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동료들과 함께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몰라도, 수프가 유독 맛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사들이 따듯한 수프로 몸을 녹이고 있던 그때, 숲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부스럭.
부스럭.
‘가다 그냥 돌아왔나?’
아무리 말을 타고 갔다고는 하나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 의아해, 모두 인기척이 난 곳으로 돌아봤다. 그러자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열 명의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험악하게 생기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이 결코 동행으로 받아들여서 좋을 것이 없어 보였다.
기사 중 하나가 나지막한 소리로 불청객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우리가 먼저 왔으니, 그대들은 다른 곳을 알아보시오.”
괴한들은 기사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중 대머리 사내가 수염이 잔뜩 난 큰 체구의 털보에게 물었다.
“그런데 얘기한 것과 다르군. 분명 독에 쓰려져 잠들어 버린 놈들 멱만 따는 일이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저것 때문인 것 같군. 물에 독이 희석돼서 잠이 빠지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며 수프를 가리켰다. 대머리 사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럼 어쩌지?”
“어쩌긴 어째, 죽여야지. 그리고 돈 더 달라고 해야지.”
“역시 그렇지?”
괴한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 준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온몸에 기운이 없는 것이 검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똑바로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살짝 핑 돌며 눈까지 침침해지는 것이, 제법 강한 독에 당한 듯싶었다.
“젠장!”
기사들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기사로서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거나 아니면 강한 상대와 맞서 싸우다 죽는 것이 아니라, 독에 당해 삼류 살수에게 죽는다 생각하니 억울할 만도 했다.
하지만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고 기사로서의 본문은 지켜야만 했다.
“세르피어 님. 저희가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곳을 피하십시오.”
아까 수프를 가져다준 기사의 말에 세르피어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검을 꺼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명령했다.
“뭣들 하시오! 어서 모여서 방어할 준비를 하지 않고!”
“세르피어 님!”
“아까 수프를 먹지 않았기에 가장 멀쩡한 사람은 나요. 이런 내가 그냥 간다면, 그것은 그대들 보고 그냥 죽으라 하는 것과 같소.”
“…….”
“비록 지금은 영지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 사업 분야를 맡게 되었지만, 나 또한 자랑스러운 헤이나가의 아들이오. 어려서부터 검을 잡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검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여도, 나 스스로는 명예로운 기사라 자부하오. 그런 내가 힘을 잃은 동료들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가야겠소? 난 죽어도 그렇게 못하오!”
기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세르피어에게 이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탓이다. 아니, 어쩌면 타고난 장사에 화끈한 성격의 레언과 비교하는 바람에 유약하다는 선입관을 가졌던 것일 수 있었다.
세르피어는 그런 기사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모두 조금만 견디면 되오. 곧 있으면 마을에 갔던 자들이 돌아올 것이오.”
그와 동시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괴한이 외쳤다.
“시간이 없다! 마을에 간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해치운다.”
―이야압!
괴한들의 기합성과 함께 공격이 시작됐다. 이에 세르피어는 가장 앞에 서서 적을 맞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언과 같이 타고난 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단 하루도 검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그의 움직임은 매우 민첩했으며 검은 아주 날카로웠다.
다만, 독의 영향으로 움직임이 활발하지 못한 기사들을 도우며 싸우는 바람에 큰 활약을 펼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괴한들은 더욱 거칠게 몰아붙일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며 부상을 당한 기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오랜 수련과 수많은 전투로 능력과 경험을 겸비한 자들이다. 아무리 독에 당해 몸이 정상적이지 않다고는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게다가 서로 뭉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세르피어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돕자 괴한들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흐르자, 그들도 초조해지는지 점차 공격이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그 소리는 기사들에겐 신의 축복이요, 괴한들에게는 절망을 알리는 나팔 소리였다.
“젠장! 실패다. 모두 후퇴!”
털보의 외침에 대머리가 반박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돈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상관없어. 어차피 놈들이 일을 잘못했기에 실패한 거잖아. 그러니 계약을 어긴 건 저쪽이란 말이야. 오히려 우리가 큰소리를 칠 수 있지.”
그 말에 대머리가 세르피어를 한 차례 노려보고는 땅에 침을 뱉었다.
“재수 좋은 놈이군. 퉤!”
괴한들이 모두 숲 속으로 도망가자 곧이어 마을에 갔던 기사들이 검을 들고 뛰어왔다. 그리고 테오르는 곧바로 적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가 뒤를 쫓으려 했다.
“잠깐! 테오르 경, 그들을 쫓지 마시오.”
“하지만…….”
“부탁이오. 그들을 쫓지 마시오.”
그 말에 테오르의 눈이 빛났다.
‘부탁? 적을 놔달라는 부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