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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5화)
2. 흠집 (4)


세르피어는 테오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치 않고 부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치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에 당했으니, 우선은 부상자들을 마을로 옮겨서 치료하는 것이 먼저요.”
“독이요? 아니, 대체 무슨…….”
“그런 것이 있소. 그건 나중에 말합시다.”
테오르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왜 괴한들을 쫓지 말라 했는지도.

* * *

한편, 세르피어와 기사들이 마을로 이동하고 있을 무렵, 열 명의 괴한은 깊은 숲에 위치한 동굴 안에서 한 사내를 만나고 있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물론, 젖은 장작으로 인해 많은 연기를 피워내고 있는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저 체격이 그리 크지 않고 쉰 목소리가 너무 인상적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베일에 가려진 사내가 털보 사내에게 물었다.
“일은?”
“완벽히 이행했소.”
“사상자는?”
“부상자 몇 있지만 죽은 사람은 없소.”
“세르피어는?”
“다치지 않았소. 그리고 우리의 완벽한 연기 덕분에 이참에 영웅이 될 것이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드를 쓴 사내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대금이다.”
그러며 던지자, 털보가 주머니를 받아 곧바로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흐흐, 반짝반짝하는군.”
금화를 하나 꺼내 깨물며 히죽 웃는 모습에 다른 괴한들도 덩달아 웃었다. 후드를 쓴 사내가 말했다.
“이번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발설하면 안 된다.”
“아, 걱정 마시오. 어디 이런 거래 한두 번 해 봤소.”
대머리 사내의 말에 후드를 쓴 사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품에서 작은 주머니 아홉 개를 더 꺼냈다. 그리고는 털보를 제외한 다른 사내들에게 하나씩 던져 줬다.
“뭐요?”
대머리의 질문에 후드를 쓴 사내가 말했다.
“그대들의 침묵에 대한 대가.”
사내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가 다섯 개씩 들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돈을 잘 주는 고용인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이 사내와 일을 더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후후, 관대하구려.”
“그만큼 그대들의 침묵을 요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완벽하게 일을 이행한 것에 대한 감사라 생각하게.”
“처음에 당신을 봤을 때는 믿어도 될까 많이 의심했는데…….”
“지금은?”
“지금은 당신과 같은 고용주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심되오.”
그 말에 후드를 쓴 사내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크크, 아마 나 같은 고용주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걸세.”
“나도 그리 생각되오. 하지만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소. 우린 언제나 그곳에 있으니, 또다시 일이 있으면 찾아 주시오.”
“그러지.”
“그럼, 우린 먼저 가 보겠소.”
괴한들이 굴을 빠져나가자 사내는 후드를 벗어 넘겼다. 그러자 쉰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직 앳된 모습의 노예 소년, 리노가 나타났다. 그는 방금 괴한들이 나간 굴 입구를 바라보며 품에서 검은 알약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약을 혀 아래에 놓고 조금씩 녹이기 시작한 그는 아주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굴을 나섰다.
“이…… 이…….”
굴 밖에는 열 명의 괴한이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숨을 거뒀는지 작은 경기만 일으키고 있었으며, 털보와 다른 두 사내만이 리노를 죽일 듯 노려볼 뿐이었다.
리노는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후후, 젖은 장작으로 연기가 피어나는 모닥불을 핀 나를 보고 속으로 비웃었겠지. 멍청한 놈이라고…… 안 그래? 하지만 그것이 독연이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야. 왜냐하면 너희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수룩한 내 모습에 애송이라고 확신했을 테니까.”
그는 친절하게 설명을 하면서 허리춤에 숨겨진 작은 단검을 꺼냈다.
“사람은 믿을 동물이 아니지. 특히, 이번 일이 세르피어의 자작극이라는 것을 아는 네놈들은 더더욱. 이 정보만으로 큰돈을 만질 수 있는데 네놈들이 비밀을 지켜 줄 것이라 믿는 바보가 있을까?”
“죽…… 일…… 놈…….”
“미안하지만 바빠서 네놈들을 묻어 주지 못하겠구나. 광산에 서찰을 전해야 하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일을 맡은 상황이라서 말이야. 서찰을 전하는 일보다는 내가 이런 일에 끼어들었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시간적 현재 부재 증명을 해야 하거든.”
“이…….”
“대신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게 숨통은 확실하게 끊어 주지. 이렇게…….”
푹!
리노의 단검은 털보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러자 털보는 거품을 문 입을 통해 피를 몇 차래 토해 내더니 이내 숨을 거뒀다. 리노는 이어 다른 아홉 사내에게도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이미 숨을 거뒀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저 모든 일을 확실히 하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만약’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 *

테오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독에 당했던 기사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린 결론은, 영주성 내에서 누군가 세르피어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믿기 싫었지만 답은 이미 나온 상황이었다.
‘레언……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동생은 물론 기사들을 독 따위에 당해 죽이려 했단 말인가?’
현재, 세르피어를 따라 사냥에 나선 기사들은 모두 분개했다. 영지 내에서 기사들은 물론 모두가 레언을 영주 후계자로 생각하며 따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동생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시키려 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 반면, 세르피어는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기사들을 ‘동료’라 부르며 함께했다는 사실에 깊은 친밀감과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본 세르피어의 검은 결코 겉멋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검을 수련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세르피어 님도 그자들을 보낸 것이 레언임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뒤를 쫓지 말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나마나 형의 허물을 감싸 주려는 것이 목적이리라. 죄인들이 잡히면 그 죄상을 밝힐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레언의 죄목이 드러날 것이다. 그럼 레언은 지금과 같이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영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리라.
‘세르피어 님은 분명, 영지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셨을 거야.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리라. 그만큼 가벼운 것이 입이고 빠른 것이 소문이니까.
‘그나저나 우리가 세르피어 님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긴 지금까지 레언만을 바라보며 세르피어 님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으니 모를 수밖에.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사업도 잘하셔서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도 좋으신데…….’
한 번 호감이라는 것이 생기니 지금까지의 나쁜 선입견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좋게 보이기 시작했다.



3. 맹수 (1)


헤이나 영지는 물론 다른 영지도 노예가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금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노예가 허락을 받고 혼자 여행을 할 시에는 허가증을 필요로 한다. 이 허가증에는 단순히 누구의 노예이며 누구의 허락으로 나왔는가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경로까지 나와 있다. 그렇기에 그 경로에서 벗어나면 탈출한 것으로 간주하고 곧바로 잡거나 아니면 사살해 버린다.

‘귀찮군.’
리노는 광산을 하루거리에 둔 농노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허가증을 경비병에게 내밀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을을 들를 때마다 허가증을 제시하고 길을 가나 나오는 초소를 지날 때도 허가증을 보여 줘야 했다.
특히, 노예를 혼자 먼 곳으로 심부름을 보내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이라 그런지 경비병들은 더더욱 꼼꼼히 살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그는 노예이기에 귀찮다거나 불쾌하다는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됐다. 그저 순진한 얼굴로 웃을 수밖에는…….
“조용히 있다 가거라. 아니면 모가지가 허전해질 것이다.”
한참을 확인한 경비병은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했고, 그 말에 리노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환한 미소로 화답을 했다. 그러자 상대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사라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모습에 리노는 속으로 상대의 단순함을 욕하면서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빠른 걸음으로 마을 안으로 사라져 줬다. 하지만 막상 마을 안에 들어서자 갈 곳이라고는 아무 곳도 없었다. 농노 마을이기에 여관 같은 곳도 없거니와 경계심이 많은 농노를 아무나 붙잡고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우선 관리장을 만나야겠군.’
관리장이란 농노 마을의 촌장 같은 것으로, 일전에 리노가 광산에서 감독관이었던 것과 비슷한 직분이다. 아무리 짐승 같은 취급을 당하는 노예라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경비병들이 나서게 된다면 노예들은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이 관리장이다. 단순히 농노들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중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하룻밤 묵을 곳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경비병에게도 부탁해 볼 수는 있겠지만, 노예 따위에게 신경 쓸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나 좀 전의 경비병처럼 거만한 자에게 그런 부탁을 하면 욕이나 먹고 매나 벌 확률이 컸다.
해서 리노는 한산한 거리를 따라 걸으며 가끔 보이는 지친 얼굴의 농노들에게 관리장의 위치를 물어 찾아갔다.
“반갑네. 내가 이곳 관리장이네.”
“안녕하십니까. 리노라고 합니다.”
하얀 머리가 세월의 지혜를 말해 주는 듯한 노인은 리노를 반갑게 맞아 줬다.
“세르피어 님의 심부름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단 말이지? 대단히 신임을 받고 있나 보군. 그러니 그렇게 출세를 할 수 있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리노가 겸손히 대답하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 없으면 그 운이라는 것도 잡을 수 없는 법이지. 특히나 노예에게는…….”
순간, 노인의 눈이 그 어느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듯했다. 이에 리노는 아무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즉, 더 이상 길게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 무언의 뜻이었다. 아무리 배운 것이 없다 하나,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과 말을 섞다 보면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두려운 것이었다.
그런 리노의 뜻을 알아챈 노인은 조용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마을 뒤에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비어 있는 창고가 있네. 그곳에서 묵고 가게나.”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느긋한 걸음의 노인을 따라 마을 뒷골목을 지나던 리노는 저 멀리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것은 다섯 개의 기둥으로 그 용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에 좀 더 힘을 주고 자세히 관찰하니, 그 기둥 중 하나에 사람이 매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농노입니까?”
리노의 질문에 노인은 시선을 돌려 기둥이 세워진 곳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탈출을 시도하다 잡혔다네.”
“바로 죽이지 않았나 보군요.”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기 중이니 죽일 수 없지 않나.”
“내기?”
리노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강하게 드러내자 노인은 다시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설명했다.
“저놈 이름은 헬슨이라네. 올해로 19살인가 20살인가 그러는데, 타고난 장사라네. 그리고 이번까지 합해 총 여섯 번 탈출을 시도했다네. 아니지, 마을에서 완전히 벗어나 숲에 숨었으니 성공했었다고 해야 하나?”
“예?”
무덤덤하게 말하는 노인과 달리 리노는 경악했다. 자신처럼 특별히 이동할 수 있는 허락을 받지 않은 노예가, 스스로의 힘만으로 탈출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노인이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놀랍지?”
“탈출에 성공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뭐, 다시 잡혀 오니 소문이 날 이유가 없는 것이지.”
잠시 걸음을 멈춘 노인은 가만히 서서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놈이 가진 힘과 타고난 근성을 안다면 이상할 것도 없는 노릇이지. 아마도 이곳에 있는 경비병들 중 저놈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자는 없을 걸세.”
“그런데 어쩌다 잡힌 것입니까?”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 없이 숲에서 생존하는 것은 힘든 일일세. 특히나 맹수나 괴수가 우글거리는 곳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