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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6화)
3. 맹수 (2)


그 말에, 리노는 잠시 생각하다 노인의 말을 이어받았다.
“허가증이 없으니 어느 마을에 숨어들어가 생필품은커녕 음식조차 구하지 못하겠군요. 그럼, 숲에서만 숨어 지내다 굶주리고 지친 그는 결국 발각되어 잡히고 말 테고요.”
“발각된 것이 아니라 그냥 잡힌 것이지. 경비병들 중에는 추격술이 뛰어난 자가 있다네. 그러니 거리를 두고 편하게 뒤를 쫓다, 지쳤다 생각되면 그때 가서 잡아 오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기사들 중에서도 저놈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일세.”
리노가 피식 웃었다.
“그건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를 어떻게 이깁니까?”
“후후,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자넨 혹시 경기병들이 하는 내기가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바로 저놈이 언제 죽는지 보는 것일세.”
노인은 기둥에 매달려 축 늘어진 헬슨을 보며 말했다.
“처음 잡혀 왔을 때, 경비병들은 헬슨을 저 기둥에 매달아 놓고 천천히 죽이려 했다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저렇게 매달려 있으면 숨쉬기가 곤란해진다네. 그리고 결국에는 숨이 막혀 죽게 되지. 숨이 안 쉬어진다는 것을 느끼며 공포 속에서 천천히 죽는 것이란 말일세.”
“…….”
“하지만 처음 잡혀 왔을 때, 저놈은 기둥에 매달려 열흘을 견뎠다네. 지금까지 닷새를 넘긴 자가 없기에, 신기해서 경비병들이 저놈을 살려 줬지.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잡혀 올 때마다, 기둥에 매달려 있는 기간이 이틀씩 늘어났다네.”
“그럼 이번에는 20일간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이군요. 그리고 20일간 매달려 있어도 죽을지 안 죽을지가 내기의 내용이고요.”
리노는 고개를 돌려 기둥에 매달려 있는 헬슨이란 자를 다시 바라봤다. 정말, 저자야말로 전설에 나오는 영웅에 비견될 만한 괴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잘못된 집안에서 태어난 바람에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부모만 잘 만났으면 온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리라.
“관심이 많은가 보군.”
노인의 질문에 당황한 리노는 헬슨이란 자에게서 얼른 시선을 거두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세르피어 님께선 쓸 만한 자를 거두고 있기에 한 번 말씀드려 볼까 생각 중입니다.”
“후후, 괜한 수고 말게. 저놈은 결코 길들일 수 없는 맹수이니까. 노인의 말이라고 흘려듣지 말게나. 비록 내가 배운 것은 없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으니까.”
‘길들일 순 없어도 이용을 할 수 있는 법이지요. 공동의 이익만 추구할 수 있다면…….’
노인의 충고에 마음속으로만 대꾸를 한 리노가 물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관리장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
“후후, 이제 묻는 것인가? 바테스라고 하네. 꼭 기억하게나.”
“예. 꼭 기억하겠습니다.”
리노의 다짐을 들은 바테스는 허허 웃으며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이른 새벽.
노예 생활이 몸에 배어 일찍 잠에서 깨어난 리노는 짐을 챙겨 들고서,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헬슨이란 자가 매달려 있는 곳으로 갔다. 정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덩치와 얼굴을 가진 헬슨은 축 늘어진 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노가 다가가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눈을 뜨며 살기 서린 눈빛으로 쏘아봤다.
“뭐냐?”
착 가라앉아 쇳소리가 나는 그의 질문에 리노는 보기 좋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견딜 만한가?”
“궁금하면 매달려 보지.”
“난 견디지 못할 것을 잘 아니 됐네.”
능글맞은 리노의 말투에 헬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뭐냐?”
“내 이름을 묻는 것이라면 리노라고 대답해 주지.”
“처음 보는 놈이군. 노예냐?”
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리고 어제 마을에 들어왔지.”
“나에게 볼일 있냐? 아니면 새벽부터 그냥 구경 온 것이냐?”
적개심이 가득 찬 질문에 리노는 피식 웃었다.
“아까도 물었듯이 견딜 만한지 궁금하군.”
“그게 왜 궁금한데?”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너를 내려놔야 하니까.”
헬슨은 순간 말을 잃었다. 노예가 자신을 내려놓겠다니,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크하하! 이거…… 이제 보니 완전 미친놈이군.”
“…….”
“노예인 네가 날 여기서 내려주겠다고? 하하. 이른 아침부터 미친 새끼가 와서 날 웃겨 죽이려는 군. 크크크.”
그러나 리노는 헬슨의 비웃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표정을 유지하며 상대가 웃음을 멈추기를 기다렸다.
“다 웃었나? 다 웃었으면 이제 좀 대화나 좀 나눠 보지.”
“…….”
“이곳에서 여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고 들었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헬슨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탈출을 해서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럴 능력이 있으면 천천히 좀 더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지, 무턱대고 여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지 않아. 마치 무언가에 쫓기거나 눈에 뭐가 씌워진 사람마냥…….”
헬슨은 리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빤히 쳐다봤다. 이에 리노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봤다. 그렇게 다섯 호흡이 지나자, 헬슨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이곳에 엘렌이란 소녀가 있었다. 나와 같은 농노지. 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어. 가족 하나 없는 나를 언제나 챙겨 주며 곁에 있어 줬어. 난 나중에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단 결심을 했었지.”
갑자기 시작된 헬슨의 이야기에 리노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돼지새끼가 나타났어. 그 돼지새끼는 엘렌을 보더니 사가더군. 목표야 뻔했지. 성노……. 하지만 적어도 돈 많은 귀족의 성노라면 좋은 옷을 입고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에,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 줬지.”
다시 고개를 든 헬슨의 눈에서는 좀 전까지 보였던 살기와는 차원이 다른 원한이 사무친 눈으로 리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돼지새끼가 두 달 후, 다시 나타났어. 그리고는 또 다른 여자를 사갔지. 그래서 알아봤더니 엘렌을…… 잠자리가 시원치 않다며 패 죽였다더군. 크크, 그 돼지새끼…… 내 기필코…… 기필코, 내 주먹으로 패서 온몸을 부셔서 죽일 거야. 다리서부터 차근차근…….”
드득. 드득.
그가 꿈틀댈 때마다,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묘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마치 사슬을 끊고 온 세상을 마음껏 활보하려는 맹수의 움직임과도 같았다.
‘아니…… 맹수가 아니라 마수에 가깝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한 리노는 상대가 이성을 잃기 전에 서둘러 대화를 진행했다.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돼지새끼를 죽일 수 있게 해 준다면 나를 위해 일해 줄 수 있나?”
그 말에 헬슨에게서 뿜어지던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그 돼지새끼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냐고 물었다.”
“흐흐, 만약 그 돼지새끼를 죽일 수만 있게 해 준다면 마왕이라도 잡아다 주지. 그런데 그렇게 해 줄 수 있나?”
“좀 시간이 걸릴 수 있어. 하지만 해 줄 수 있지.”
큰 덩치의 헬슨이 자신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무조건 나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거야. 조금이라도 엇나가거나 네 마음대로 행동했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테니까.”
“흐흐, 걱정 마. 그놈을 죽일 수 있게만 해 준다면 너의 충견이라도 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를 보고 있자니, 자신을 잘 따를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바테스 노인의 말마따나, 상대는 절대로 길들일 수 없는 맹수였다.
‘무언가 행동을 제어할 만한 고삐가 필요한데…… 아니, 고삐는 아니더라도 감시할 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잠시 고민하던 리노가 물었다.
“바테스란 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뜻이지?”
“그냥 자네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거야.”
“좋은 분이셔. 아니, 슬기롭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시고.”
그 말에 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처음 바테스를 봤을 때, 느꼈던 것은 참으로 슬기로워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그분은 가족이 있나?”
“내가 아는 바로는 없어. 그런데 왜 묻지?”
리노가 씩 웃었다.
“자네를 데려가기 위해선 그분도 데려가야 할 것 같아서.”
“감시자인가?”
“좋을 대로 생각하게. 그럼, 나중에 다시 보지. 한 가지 부탁하자면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달라는 것일세. 할 수 있겠나?”
“당연히!”
처음에 들은 가라앉은 쇳소리가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대답에 리노는 ‘하하’ 웃고는 경비병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냐? 벌써 가는 건가?”
마을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의 질문에 리노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세르피어 님이 맡기신 일을 빨리 성사시켜야 하니까요.”
“좋은 자세군. 그럼 가 봐라.”
그러며 마을을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어 주려고 할 때, 리노가 경비병을 불렀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탁? 네놈이?”
노예 따위가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고 하니 너무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느낀 리노는 재빨리 부연 설명을 했다.
“제가 드리는 부탁이 아니라 세르피어 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세르피어 님?”
“예. 저는 세르피어 님에게 힘 좀 쓸 수 있는 노예를 찾아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제 헬슨이란 자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경비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놈은 안 된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세르피어 님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그저 힘이 강한 놈을 찾고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헬슨이란 자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 불똥이 우리에게도 튈 수 있어.”
리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걱정 마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 드리고 세르피어 님께서 스스로 숙고하여 결정하실 일입니다. 절대 피해를 입을 일은 없으실 겁니다. 아니, 오히려 큰 포상이 주어질지도 모르지요.”
“포상?”
“세르피어 님이 지금 영지의 모든 사업 등을 관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주었는데, 포상이 없겠습니까? 분명,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경비병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을 보며 리노는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은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렇단 말이지…….”
“예.”
확신에 찬 그의 대답에, 경비병은 잠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리노라 했나? 세르피어 님에게 말씀 잘 드려주게. 나는 대장님을 잘 설득해, 그놈을 잘 보관해 줄 테니까.”

* * *

세르피어는 사냥을 다녀온 이후로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언제나 벽에 걸려 장식구로 전락했던 검을 뽑아 들고는 밖으로 나가,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휘두르기를 하였다.
솔직히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새벽에 일어나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렇게 해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리노의 충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흘 안에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하면 그만둔다.’
어쩌면 그는 속으로 아무런 결과도 얻어지지 않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영지 내 모든 사업과 자신만의 비밀 상단을 만드느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판에 아침 운동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아침 운동은 단 오 일만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놈이 노린 것이 이런 반응이었나? 나쁘지 않군.’
처음에는 시녀와 하인들 사이에서 세르피어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평소 검을 잡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신기해서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기사들 사이에서도 돌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검에 대한 재능은커녕 열정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세르피어를 호의적인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잠깐씩이라도 검을 휘두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사냥 중에 생겼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소문이 곁들여지자 지금까지 세르피어가 수련을 등한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에게 관심이 없어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 착각하였다. 그리고 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진 그 모습에, 점차 호감의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물론 하급 기사들의 호감을 산다고 해서 후계자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그 기초가 중요한 법. 아래서부터 조금씩 바꿔 나간다면 나중에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은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