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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25화)
11. 비상을 꿈꾸는 자 (3)


‘잠깐! 레언? 혹시, 설마…… 레언?’
테오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거구의 사내가 휘두르는 검은 확실히 레언이 사용하는 대검과 비슷했다. 그리고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체격과 그 힘…… 그것은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세르피어 님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따위 습격을 강행한 것인가? 기사로서의 명예도 내팽개쳐 버리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 테오르는 레언이라 짐작되는 자를 향해 말을 몰았다.
“레언!”
우렁찬 고함과 함께 내려친 테오르의 검은 상대의 대검에 쉽게 막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상대는 오히려 힘으로 밀어붙이며 역공을 시작했다.
“크윽!”
거대한 망치로 내려치는듯한 힘에 몸이 휘청거리자, 테오르는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에서 뛰어내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키며 이어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려는 찰나, 뒤에서 기습적으로 날아온 또 다른 적의 검에 목을 내놓고야 말았다.

“테오르 경!”
세르피어는 자신의 호위대장 테오르가 무기력하게 목이 잘리는 것을 보고는 말을 전장으로 몰았다. 그 모습에 세드로나도 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고, 이차 방어진을 치고 있던 열 명의 기사가 세르피어의 뒤를 쫓아 전장으로 빠르고 이동하였다.
바로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언제나 마차를 호위하고 있어야 할 히나스의 개인 호위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적을 빨리 제압하기 위해 공격에 가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장에 도착한 붉은 깃의 기사들은 갑자기 아군을 배후에서 기습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 이 무슨……?”
세드로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너무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다 마차 안에 있는 히나스를 떠올리고는, 그녀에게 따지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누군가 그의 옷을 잡아 당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느 새끼가…… 어? 히나스 양!”
자신을 짓밟고 있는 마부. 그리고 그 너머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히나스를 보고, 세드로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왜 이러는 것이오?”
두꺼운 볼살을 부르르 떠는 세드로나를 내려다본 흑발의 여인이 냉소를 지었다.
“왜? 왜냐고 묻는 건가요? 자신의 잘못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왜냐고 묻는가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요?”
“나를 이용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이 잘못이 아닌가요?”
그 말에 세드로나는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영지를 위한 일이오! 그대도 잘 알지 않소! 가네사가의 여식으로써 가문과 영지의 부흥을 위해서는 당연히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을……!”
이에 히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가문과 영지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희생을 해야지요.”
“그걸 알면서…….”
“그리고 그것은 당신에게도 포함되는 의무 사항이지요.”
“…….”
“전 오늘 당신의 희생시킴으로써 헤이나 영지를 빼앗을 거예요.”
“미친…….”
퍽!
세드로나의 입에서 욕이 다 나오기도 전에 마부의 발이 그의 입을 짓이겨 버렸다. 히나스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믿지 못하겠다고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이미 헤이나 영지에는 사용할 군량이 남아 있지 않지요. 그리고 당신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명분을 갖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요. 어때요? 완벽한 계획 아닌가요?”
차분하지만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설명한 흑발의 여인은 다시금 전쟁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당신을 죽일 때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때까지 저 싸움 구경이나 실컷 하세요.”

한편, 전장에 뛰어든 세르피어는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대검을 휘두르는 사내를 향하여 직선으로 말을 몰았다. 테오르를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상대에게 달려드는 무모한 행동은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붉은 깃이 달린 투구를 쓴 히나스의 호위기사들이 배신을 함으로써, 승기를 완전히 빼앗긴 상황이었다. 앞에는 적이 있고 뒤에는 배신자들이 있는 이상, 이대로는 그저 싸우다 죽는 길밖에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의 승패를 바꾸는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적의 우두머리를 잡는 것. 그리고 그 우두머리란 다름 아닌, 저 대검을 휘두르는 레언이었다.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허름한 옷을 입었다지만, 저 대검만은 어떻게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모두 레언을 죽여라! 저자를 죽여야만 살 수 있다!”
세르피어의 외침에 기사들은 하나같이 대검을 휘두르는 자에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복면인들은 그런 기사들을 저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단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세르피어와 기사들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꾸준히 앞으로 전진하여 목표를 코앞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이서 상대를 확인한 세르피어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 너는…….”
일반 기사들도 휘두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처참히 날려 버리는 무시무시한 힘. 그것은 누가 봐도 레언이었다. 테오르도 그렇게 생각했고, 세르피어도 처음엔 형님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얼굴을 가렸다 한들, 가족끼리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지금 가면을 쓰고 대검을 휘두르는 자는 레언이 아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헬…… 커억!”
공교롭게도 세르피어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명치에서부터 퍼져 가는 극심한 고통에 말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는 화살을 볼 수가 있었다.
‘누, 누가…….’
그는 빠른 속도로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부릅뜨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약 사십 보 밖에 은색 가면을 쓴 사내가 활을 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리……노?’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을 노예로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구해 줬고, 모든 것을 주었건만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젠장…… 젠장…….’
입을 열어 저주를 하고 싶었으나,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씩씩’ 날 뿐 말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복면인의 검이 세르피어의 심장에 박히며, 마지막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활 솜씨가 많이 늘었군.”
화려한 수가 놓인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있는 바테스의 칭찬에 리노는 그저 쓴 미소를 지었다. 겨우 사십 보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명궁수가 십여 발을 쏠 시간에 겨우 한발 쏴 맞추는 것을 가지고 칭찬을 받으니,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눈금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겠지.’
리노는 활에 새겨진 미세한 눈금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손가락 마디 정도의 넓이로 새겨진 이 눈금은 그가 연습을 하며 알아낸 활의 각도와 살이 날아가는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리노는 활을 어깨에 비껴 메며 말했다.
“세르피어가 쓰러진 이상, 곧 끝날 겁니다. 전 먼저 갈 테니, 일이 끝나면 헬슨과 함께 약속 장소로 오십시오.”
이에 바테스 노인이 기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럼 헬슨도 데려가기로 결정한 것인가?”
“솔직히 데려갈지 말지 아직도 고민이지만, 어르신께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 어쩔 수 없지요.”
“하하, 잘 생각했네. 저 아이를 데려가기로 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걸세.”
그 말에 리노가 피식 웃으며 말에 올랐다. 헬슨 때문에 후회를 할지 안 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믿고 일을 맡길 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바테스 노인만큼 합당한 자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안목과 침착함을 가졌음을 느꼈다. 그 때문에, 헬슨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일부러 데려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레언 측을 오가며 맡긴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이도 많고 가족도 없으니, 자신을 배신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자금도, 신분도, 믿고 일을 맡길 사람도 갖추었다. 이제는 목표를 향해 비상하는 일만 남았다.’
말을 몰며 전쟁터에서 멀어지는 리노의 눈빛은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당신의 주인은 어디 갔지요? 아까 저기서 활을 쏘던 것 같은데.”
히나스 가네사의 질문에 바테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먼저 가셨습니다.”
“그런가요? 인사도 없이 가서 섭섭하네요.”
그녀의 말에 노인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조용히 사라지시겠다고 하셨으니, 그 말을 지키기 위함이지요.”
“아직 확인을 못했는데, 어떻게 일이 끝났는지 알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헤이나 영지의 군량 말이에요. 아직, 확인 못하였는데 당신의 주인이 약속을 지켰는지 어찌 알겠어요. 안 그래요?”
노인은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달리 확인시켜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저희 측을 믿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수밖에는…….”
“그냥 믿어 달라? 상인들은 그렇게 거래를 하나요?”
“신용이야말로 상인의 큰 자산이니까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바테스의 대꾸에 눈을 치켜뜨던 히나스는 갑자기 입을 가리며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대 또한 그대의 주인과 똑같군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고집하며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자신감. 알았어요. 믿지요. 제가 손해인 것 같지만, 믿어 드리죠.”
바테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히나스는 마차에 오르기 위해 신형을 돌리며 마지막 부탁을 했다.
“아, 그리고 당신 주인에게 말하세요.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나와 손잡고 일해 보지 않겠냐고요.”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검은 머리의 미녀를 태운 마차가 멀어지자, 바테스 노인과 헬슨 단둘이 남았다. 노인은 수십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전장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 복수는 좋으셨습니까?”
“예. 세드로나의 목을 베는 순간, 가슴 언저리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내려놓은 느낌입니다.”
“다행이십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시고 본분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 테니까요.”
헬슨이 피식 웃었다.
“본분으로 돌아간다…… 노예로 돌아가란 말입니까?”
그 말에 바테스는 바로 언성을 높였다.
“헬슨 님! 헬슨 님은 카스티쟈가의 마지막 후계자이십니다. 그러니 왕가의 부흥이라는 본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왕가의 부흥이라…… 오래 전에 망해 버린 왕가를 어떻게 부흥시킨단 말입니까?”
“리노를 이용하십시오. 그의 곁에서 기호를 엿보다 모든 것을 빼앗으십시오.”
“상단을 빼앗으란 말입니까? 겨우 그것이 왕가의 부흥입니까?”
바테스가 고개를 저었다.
“리노란 자는 단순히 상단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자가 아닙니다. 제가 비록 그보다 배운 것이 적고 머리도 나쁠지 모르지만, 사람 보는 눈만큼은 최고라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무슨 방법을 써서든 고위 귀족의 자리까지 올라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나보고 훔치라?”
“그렇습니다.”
헬슨은 노인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지금…… 저희에게 자유를 준 은인을 배신하라는 말입니까?”
“리노란 자 또한 세르피어라는 은인을 배신하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 그래. 제가 그 자리를 빼앗았다 칩시다. 그 다음은 뭡니까?”
질문을 언뜻 이해하지 못한 바테스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헬슨이 다시 설명했다.
“귀족이란 신분을 찾은 다음, 뭘 해야 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반역을 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지금의 왕을 죽일까요?”
“…….”
솔직히 해 줄 대답이 없었다. 귀족이 된다 해도 왕가를 일으킬 방법 따위는 그에겐 없었던 것이다.
“하실 말이 없나 보군요.”
“그야…….”
“귀족 자리를 빼앗고 끝이라면, 리노의 곁에서 도우면서 나중에 보상을 받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어찌 차이가 없겠는가. 왕가의 존귀한 혈통이 진짜 노예의 밑에서 하수인을 하는 것이거늘.
하지만 헬슨은 단호했다.
“바테스 경. 경의 가문이…… 지금까지 왕가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은 리노의 등에 비수를 꼽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바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 있었다. 바로 헬슨이 ‘아직은’ 이란 말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돌리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그 ‘무언’가를 찾는 것이 바테스의 사명이 될 것이다.


<『리노트라이』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