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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24화)
11. 비상을 꿈꾸는 자 (2)


세르피어는 테오르를 비롯한 서른 명의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히나스 양을 마중하기 위해 성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많은 기사들과 병사 그리고 영주민들이 나와서, 환호를 지르며 축복해 주었다. 이것은 그가 사람을 만나 포섭을 하며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소문 덕이었다.
―가네사 영지와 헤이나 영지의 평화.
―그로 다가올 영지의 눈부신 발전.
인간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가장 먼저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세르피어와 히나스의 결혼으로 영지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당연히 환영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영지의 발전으로 이어져 지금보다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데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모두가 기뻐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깊은 고뇌에 빠진 자도 있었다. 다름 아닌 레언과 토란트였다. 그들이 비샬바라는 상인을 잡겠다며 돌아다니는 동안, 세르피어는 상상도 못한 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혼인이 이뤄진다면, 레언의 입지는 모래 위에 세워진 탑처럼 위태로워지고 말리라.
그런 그들에게 한 줄기의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자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바테스의 인사에 토란트는 편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자넨 여기 어쩐 일인가?”
“토란트 님과의 약속 때문에 왔습니다.”
“약속? 지금 날 놀리려고 왔나? 감히 미천한 네놈이!”
토란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역정을 내자, 늙은 노예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찌 제가 토란트 님을 놀리겠습니까. 전 그저 제가 한 약속 때문에 온 것입니다.”
“네가 한 약속? 대체 무슨 말이야.”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세르피어 님을 당장 끌어내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오겠다고. 바로, 그것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치명적인 약점이라…….”
토란트가 버릇처럼 자신의 대머리를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화가 가라앉는 것을 보고는, 바테스 노인이 말했다.
“이번에 세르피어 님과 히나스 님의 혼인 허락을 받게 된 내막을 아십니까?”
가네사 영지의 곡물 시장에 몰래 진입하는데 성공하여 영주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은 극비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적었지만, 토란트는 레언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단 넉 달 만에 너무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 짧은 시간 안에 세드로나란 돼지의 탈을 쓴 여우의 눈을 피해, 가네사 영지의 곡물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 가능하시다고 생각되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바테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혹시,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토란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영주님을 속이는 행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세르피어가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라면……?
“위험한 발언이군.”
늙은 노예는 순순히 인정했다.
“예. 위험한 발언이지요. 하지만 증거와 증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증거가 있단 말인가?”
“엘헤라 도시의 서쪽 외곽에 큰 저택이 있을 겁니다. 그곳에 가십시오. 그곳에 가면 많은 증거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토란트는 너무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정말인가?”
“그곳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 예상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잘했어, 너무 잘했어. 내 말대로 그곳에서 세르피어를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그런 증거가 나온다면 나 또한 너와의 약속을 지키겠다.”
바테스 노인이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가실 때, 기사들을 대동하고 가십시오.”
“그건 왜지?”
“지금 헬슨이 어디에 가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잠시 눈알을 굴리던 토란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 엘헤라 도시에……?”
“예. 그곳에는 헬슨뿐만 아니라 세르피어 님께서 비밀리에 고용한 용병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무력 충돌에 미리 준비를 하고 가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토란트가 하하 웃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도 없지. 레언 님이 정예 기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치면 그딴 놈들은 한 주먹감도 안 될 테니까.”
그러며 벌떡 일어난 토란트는 그대로 레언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에, 홀로 남게 된 늙은 노예는 씩 웃으며 책상 너머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 있는 망토로 눈을 돌렸다. 흑곰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는, 윤기가 흐르면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저거 괜찮겠군.’
노인은 의자에 다가가 토란트의 망토를 팔에 걸친 다음 유유히 집무실을 나섰다.

레언과 토란트의 결단과 행동은 신속했다. 바테스가 방문한 바로 그날 늦은 저녁에 기사들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가 엘헤라 도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일을 서두른 이유는 세르피어가 세드로나와 히나스를 데리고 성에 들어오는 날에 맞춰, 증거물을 가지고 돌아오기 위함이다. 그래야 더욱 극적이고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테스 노인은 레언이 성을 빠져나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흑곰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돌돌 말아 큰 천으로 싸매고는 외출할 차비를 갖췄다. 그리고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농부들 사이에 끼어 성을 나가는 출입구로 향하였다.

“정지.”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늙은 노예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멈춰 세웠다.
“어디를 가냐?”
“엘헤라 도시로 갑니다.”
“통행증은?”
“여기…….”
바테스는 일전에 세르피어에게 받았지만, 다리를 다쳤다며 돌아오는 바람에 사용하지 않은 통행증을 보여 줬다. 그리고 통행증을 확인한 병사는, 성문을 지나갔다는 표시를 하고는 곧바로 통과시켜 줬다. 어차피 세르피어의 심부름으로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기에 더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리라.
그렇게 해서 성문을 나선 노인은 성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숲으로 들어가, 기존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안에서 녹색과 붉은색이 어울려진 고급스러운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테스는 허리춤에 숨겨 둔 머리띠를 꺼내 이마에 묶어 노예 인장을 가렸다. 머리띠에는 금실로 검을 감싸고 있는 넝쿨이 너무 생생하게 수놓아 있어, 품격을 한층 높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란트의 망토를 걸치자, 한순간에 부자로 탈바꿈을 하였다. 겉모습만으로는 더 이상 그를 노예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가 볼까?’
물론 겉치장만 바꾼다고 해서 노예 신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품에는 리노가 만들어 준 새로운 신분이 있었다. 바로 트라이 상단의 고문을 맡고 있는 가루다 왕국의 귀족, 바테스 트라이 경. 이제 이 신분만 있으면 그 어느 곳이든 마음껏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것이었다.

* * *

조상 중에 돼지가 있지 않았을까 의심이 되는 세드로나를 필두로 한 대의 마차와 열다섯 명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기사들 중 열 명은 무리의 외각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붉은 깃이 달린 투구를 쓴 다섯 기사들은 마차 옆에 달라붙어 근접 호위를 하고 있었다.
세르피어는 그 다섯 기사들을 보고는 그들이 누구인지 한번에 알아보고는 살짝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아무도 못 믿겠다는 것인가?’
양 영지의 정식 행사에 개인 기사들을 데리고 온 것은, 부친도 못 믿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냉혈한 같은 부친과 그런 부친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딸. 그리고 미래를 예상하고 계획할 수 있는 노예. 이 세 가지를 잘만 이용한다면 더욱 좋은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세르피어의 인사에 세드로나는 두 팔을 벌리며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 이거 뜻밖이군. 그대가 직접 마중 나올 줄은 전혀 몰랐소. 이거 대단한 영광이군.”
“귀빈을 모시러 오는 일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며 세르피어는 고개를 살짝 틀어, 뒤에 있는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이를 눈치챈 세드로나도 고개를 돌려 뒤의 마차와 붉은 깃을 단 다섯 기사를 확인하고는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히나스 양이 타고 있소.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기사들은 히나스 양의 개인 호위들이오.”
“알고 있습니다.”
“좀 무례한 일인 줄 알지만 워낙 겁이 많은 분이라 동행하게 된 것이니, 그대가 이해해 주시오.”
마차에서 나와 보지도 않는 태도 역시 무례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세르피어는 그런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혼인 허락을 받는 자리에 갑자기 오게 됐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녀를 잘 이용하기 위해서는 환심을 사야 하기에, 절대 나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렇게 속 좁은 놈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의 요청으로 갑자기 오게 됐으니 얼마나 경황이 없겠습니까. 다, 이해합니다.”
세르피어의 말에 세드로나는 기름진 볼살을 긁적였다. 사실은 세르피어의 편지가 있기 전에, 히나스가 데어만 영주에게 자신을 따라 헤이나 영지에 가 보겠다고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뭐…… 이런 오해가 오히려 좋을 수 있겠지.’
그러며 속으로 상대를 비웃던 세드로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고는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아니,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기사를 얼마나 데려온 것이오? 이거, 국왕이 와도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구려.”
이에 세르피어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예? 무슨 말입니까?”
“저기 다가오는 자들 말이오. 그대가 데려온 기사가 아니오?”
세르피어는 세드로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방향에선 많은 무리가 말을 몰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테오르 경!”
세르피어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테오르는 말에 올라타며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준비!”
그러자 서른 명의 기사는 말머리를 돌려 정렬하게 일차 방어진을 형성했다. 테오르는 가장 앞으로 나서서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워낙 거리가 멀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다가오는 자들은 결코 헤이나 영지의 기사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세드로나는 세르피어를 데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외각에서 호위하던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이차 방어진 형성하고, 붉은 깃의 기사들은 마차 앞에 삼차 방어진을 쳤다.

잠시 후, 불청객들이 이백 보 안에 들어오자 하나같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결코 좋은 의도로 온 것이 아님이 확인되자 기사들은 하나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전투 준비! 출격!”
테오르의 명령이 떨어지자, 헤이나 영지의 기사들은 말을 힘차게 몰며 적들에게로 쏟아져 나갔다. 오랜 합동 기마 훈련으로 단련된 기사들을 막는 것은 일개 용병이나 살수들로서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테오르는 이 일격에 적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기세 또한 꺾일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착각이었으며 망상이었다. 적들은 기사들과의 격돌에서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맞받아치며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적들 중에서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큰 체구의 사내의 활약은 대단했다. 처음 격돌할 당시에는 가장 뒤에 쳐져 있었지만, 막상 난전으로 바뀌자 가장 앞에 나서서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헤이나가의 장자, 레언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