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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23화)
10. 상인 (4)


잠시 말꼬리를 흐린 리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을 조용히 있다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복수가 끝나면 어찌할 것인가?”
“글쎄. 그것까지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상황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하긴, 지금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그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헬슨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하지만 아마도, 자넬 따르지 않을까 싶군.”
“나를?”
의외의 대답에 놀란 리노가 되묻자, 헬슨이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서 지금까지 기다린 것도, 어쩌면 너를 믿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한 번 믿은 이상 계속 믿고 싶군. 뭐, 솔직히 더 말하자면 복잡하게 머리 쓰는 것도 싫고…….”
그러며 헬슨은 쑥스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면서도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일전에 본 길들일 수 없는 맹수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리노는 혼돈을 느꼈다.
처음 헬슨을 봤을 때, 리노는 자신의 일을 돕기 위한 도구로 적절하다 생각했었다. 세상이라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지도뿐만 아니라 충분한 도구도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하마야와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 길들이고 이용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당시, 도끼를 휘두르던 헬슨의 모습과 눈빛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이었지 절대 남에게 지배를 당할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헬슨이 보여 주는 모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것과 같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이, 리노로 하여금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헬슨이 가진 전사로서의 능력이 안타까워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버려야 할지 아니면 거둬야 할지…….’
리노가 속으로 갈등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바테스 노인이 들어왔다. 늙은 노예는 방 안에 있는 두 인물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헬슨에게 눈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리노를 향해 반갑게 말을 붙였다.
“안 그래도 자네를 만나고 싶었는데, 잘됐군. 나와 좀 얘기를 나누지.”
그러며 방의 주인에겐 아무런 인사말도 없이 먼저 돌아서서 나서자, 리노도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복도를 따라 나란히 걷는 와중에 리노가 물었다.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오늘 헬슨을 왜 찾아온 것인가?”
바테스 노인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질문을 해 왔다. 이에 리노는 자신의 말을 못 들었나 보다 생각하고는 노인의 질문에 답했다.
“어떻게 지내는지도 보고 좀 더 서로에 대해 알고 싶기도 하고…… 뭐, 한마디로 그냥 들렀습니다.”
“더 알고 싶다…… 왜 더 알고 싶은 건가?”
“제가 추천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계속 드는 생각은 그를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노인은 허허 웃었다.
“자넨 별것을 다 걱정하는군. 혹시 그의 과거 때문인가? 그렇다면 걱정 말게. 그는 자신에게 먼저 해를 가하지 않으면 배신하는 그런 아이는 아니니까 말일세. 왜냐하면 그 아이는 큰 욕심이 없거든.”
‘욕심이 없다…….’
바테스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리노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네.”
“무엇입니까?”
“혹시 자네는 선조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선조요?”
리노가 말뜻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노인은 볼을 긁적이며 천천히 설명했다.
“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자네의 행동과 말투는 노예에게는 너무 어울리지 않게 기품이 있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 같은 노예라면 우리와 다른 무언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지.”
“…….”
“그래서 혹시 자네가 옛 귀족의 후손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자네도 알다시피 아르파너 왕국의 노예는 옛 왕가인 카스티쟈 가문과 그들을 따르던 귀족으로부터 시작하였다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후손들은 비밀리에 교육을 받는다고 하더군.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이에 리노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말이군요. 그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정말로 아무런 연관이 없나?”
“정말입니다. 전 그냥 노예일 뿐입니다. 어려서 따로 광산에 보내어져서 그곳에서 쭉 지냈으니까요.”
“하지만 자네 선조가 옛 귀족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말에 리노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래도 자네 뿌리와 연관 있는 일인데…….”
“옛 왕가나 귀족 따위에 저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조금의 감정이나 동정심도 깃들지 않은 차가운 대답에 바테스 노인은 미간을 아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음…… 관심도 없으니 애정 따위도 없겠군.”
“그런데 그런 질문은 왜 하시는 것입니까?”
이에 노인은 얼굴을 다시 활짝 피며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단지, 자네가 혹시 옛 귀족의 후예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이야?”
“무슨 말이죠?”
“자네가 옛 귀족의 후손으로써 옛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느니 하는 이상한 계획을 갖고 있나 싶어서 말일세. 해가 될 만한 것은 미리미리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나.”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알았네. 그럼 난 자네만 믿지.”
그러며 돌아서는 바테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며칠 있다 자네에게 가겠네. 그러니 자넨 먼저 상단에 가 있게나. 그리고 헬슨…… 괜찮은 아이네. 어쩌면 나보다 더 쓸모 있을지 모르지.”



11. 비상을 꿈꾸는 자 (1)


세드로나가 히나스 양과 함께 헤이나 영지를 방문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올 무렵, 상단에 갔던 바테스 노인이 리노의 서찰을 가지고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가네사 영지에서 곡물을 들여오는데, 뜻하지 않는 검역 같은 사소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세르피어에게 허가증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언제나 꼼꼼히 챙기는 리노가 이런 것을 미리 챙기지 않은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한창 바쁜 세르피어는 깊게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해서 그는 허가증과 함께 바테스 노인이 다시 성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행증을 새로 발급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늙은 노예는 결국 성을 나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성내에 있는 시장을 가로지르던 중, 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부딪히며 발목을 삐는 바람에 먼 길을 가지 못하게 된 탓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세르피어는 결국 헬슨을 보내기로 하였다. 탈출을 시도했던 옛 과거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믿고 일을 맡길 심복이 없는 그로서는 상단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 *

똑.똑.똑.
엘헤라 도시의 서쪽 외곽에 홀로 세워진 거대한 저택에 도착한 헬슨은 굳건히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렸다. 버려진 건물처럼 모든 창은 닫혀 있고 인기척 하나 들려오지 않기에, 잘못 찾아왔나 하는 의심도 들었으나 인근에 다른 저택이라고는 없기에 실수를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질 않자, 헬슨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뒤돌아 나가려 했다.
달그락.
바로 그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문이 천천히 열리며 은색 가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헬슨은 상대를 한눈에 알아봤다. 비록, 함께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고 서로 친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 자를 어찌 몰라볼 수 있겠는가.
“이곳에서 상단 주인 역할을 한다더니, 이제 보니 문지기였나 보군.”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에, 은색 가면을 쓴 리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곳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본단을 옮기느라 사람이 없어서 그래. 지금은 나만 남은 상황이거든.”
짧게 설명을 한 리노는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하고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로 헬슨을 안내했다. 그리고는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리 준비돼 있는 가면과 후드를 서랍에서 꺼내 건네줬다.
“우선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게. 그리고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네.”
“어디를 간다는 거지? 내 통행증으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 말에 리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자네의 새로운 신분이네. 내 상단에서 고용한 호위지. 이것만 있으면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말에 헬슨의 두 눈이 번뜩였다. 노예인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 이렇게 간단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리라. 그 눈빛을 놓치지 않은 리노가 이마에 새겨진 노예 인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노예를 속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노예 인장이지. 이것만 없으면 가짜 신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라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성공한 노예가 없는 것이지? 인두로 찍은 인장 따위는 뜯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상처가 남겠지. 노예 인장이 찍히는 곳에 공교롭게 상처가 있다면 누구든 의심을 하겠지.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신분증이지. 그런데 어느 누가 노예에게 새로운 신분증을 만들어 주려 할까?”
헬슨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짐승 취급을 받는 노예 따위를 도와주려는 넓은 아량을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문을 푼 그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그러자 리노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건물 뒤쪽에 있는 후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간 후, 뒤뜰 구석에 숨겨 있는 마차에 다가갔다.
“모여 있는 곳으로 갑시다.”
갈색 망토와 후드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마부에게 예의를 갖추는 리노의 모습이 의아한 헬슨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물었다.
“마부에게 왜 예의를 갖추는 거지? 혹시 너의…….”
“쉬.”
리노는 재빨리 헬슨의 입을 막았다. 비록 작게 말을 하고 있지만 상대가 듣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하는 말만 들어. 알았어?”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노는 자신이 앉은 의자 아래에서 거대한 검을 한 자루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헬슨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검은 레언이 사용하는 대검을 따라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검을 헬슨에게 건네준 리노가 말했다.
“자넨 내 상단에서 고용한 용병일 뿐이야. 내가 특별히 뽑아 보내는 것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는 다른 자들을 만날 거야. 그들 또한 자네처럼 얼굴을 가리고 신분을 숨기고 있어. 그러니 그들의 신분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말고 자네의 신분을 알려줘서도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리노의 말에 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만나러 가는 자들은 아마도 마부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단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리노가 마부에게 예의를 갖춰 말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차는 도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창고에 도착했다. 헬슨은 리노를 따라 마차에서 내려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수십 마리의 말과 복면을 한 무사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사내들의 수나 그 살벌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바로 그들이 보여 주는 태도와 자세 때문이었다. 비록 허름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이 보여 주는 강한 신념이 엿보이는 눈빛과 절도 있는 움직임은 절대 용병의 것이 아니었다.
‘저들은 기사다. 그것도 정규 기사야.’
헬슨이 상대의 신분을 어렴풋이 알아챘을 무렵, 복면을 한 무사들 중 한 사내가 다가왔다. 비적처럼 검은 천으로 얼굴 하관을 가리고 후드를 눌러쓴 그는, 헬슨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리노에게 물었다.
“이 사내요?”
“그렇소.”
“체격은 비슷하군. 그런데 그 무거운 것을 휘두를 수 있겠소?”
사내가 대검을 가리키자, 리노가 입꼬리를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마시오. 이 친구도 무식한 도끼를 무기로 사용하니, 저 정도 검을 휘두르는 덴 문제없을 것이오.”
다시금 헬슨을 위아래로 훑어본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쓸데없이 입을 열어,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오.”
“그 또한 걱정 마시오. 내가 절대 입을 열지 말라고 말해 뒀으니까. 그저 그대들은 일이 모두 끝나면 세드로나를 이 친구에게 인계하면 끝나는 것이오.”
리노의 말에 사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솔직히 외부인과 함께 일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불안함 감이 있지만, 그대가 그렇게 자신하니 믿어 보겠소.”
그러고서 사내는 다시 동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가 바닥에 앉아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에 리노가 뒤돌아서며 헬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으니 즐기라고. 물론 자네의 신분이 들통나지 않게 조심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헬슨의 눈빛은 무섭게 빛나며 점점 혈광으로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