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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22화)
10. 상인 (3)


리노는 차분하면서도 상황 판단이 빠른 히나스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히나스 님의 총명하심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 입바른 소리는 하지 마세요. 바보가 아니면 다 알 만한 것을 가지고, 그런 아부할 이유 없으니까요.”
아부에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리노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진지한 얼굴을 한 상대에게 계속해서 미소를 보인다면, 비웃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노가 말했다.
“히나스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가 찾아온 것은 한 가지 거래를 하기 위함입니다.”
“말해 보세요.”
“히나스 님께선 곧 헤이나가의 차남인 세르피어에게로 시집을 갈 것이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리노의 질문에 히나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헤이나가와의 혼사 이야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건만, 한낮 상인이 그것을 알고 찾아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리노는 상대의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생각으로는 그 혼사는 아마 이뤄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겠지요. 문제는 데어만 영주님께서 이 혼사를 통해 무엇을 원할 것이냐는 것이지요. 아마 헤이나 영지의 광산, 혹은 영지 자체일 것입니다.”
“…….”
“그럼 결국 히나스 님은 가세가 기운 영지의 안주인이 되거나 아니면 망한 귀족의 부인이 되겠지요. 그것도 아니면, 쫓겨나던가요.”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고 그 때문에 고민을 하였다. 물론, 나중에는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 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을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혼자 살다 죽고 말 것이다.
“당신…… 이러한 사실을 어찌 알고 있는 거죠?”
히나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리노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지요?”
“중요한 것은 제게는 히나스 님이 세르피어와 혼인을 하지 않고도, 헤이나 영지를 데어만 영주님께 바칠 비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뭐! 뭐라고?”
리노는 말을 끊으며 몸을 뒤로 젖혀 편하게 앉았다. 상대가 미끼를 문 이상, 느긋하게 거래를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히나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정말 방법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상대의 대답에 그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아까 거래를 하러 왔다고 했죠. 그럼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생각 없는 멍청이들 같으면 당장 계약을 하자며 달려들겠지만, 히나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냉철한 모습이 리노를 더욱 기쁘게 하였다. 왜냐하면 멍청한 자들과 손발을 맞춰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예상치 않은 변수가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리노가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말해 보세요.”
“첫째. 바로 세드로나의 목숨입니다.”
히나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싫으신 겁니까?”
“아니요. 싫은 것이 아니라, 제가 세드로나를 줄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요. 그는 아버님이 유일하게 신임하고 믿는 자이니까요.”
리노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싫은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그것도 제가 알아서 취할 테니까요.”
“…….”
그는 히나스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틈에, 두 번째 조건을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바로 헤이나가를 말살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말살을 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게 최대한 피해를 입혀 주십시오.”
정적을 결코 살려 두지 않는 데어만 영주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것은 약속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만, 트라이라는 신비스러운 상인이 그것만을 원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뿐이었다.
“저는 단지 그것만 원할 뿐입니다. 히나스 님께서 약조를 지켜 주신다면, 전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게 깔끔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 모든 공을 독차지하실 수 있겠지요?”
여인은 검은 물결 같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며 은색 가면을 쓴 상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만약, 이 모든 공이 자신의 것으로 인정받는다면, 아버지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더 이상 이런 정치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는 트라이라는 상인이 약속을 지킬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상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거나 배신을 할 시, 가네사 영지는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히나스 양은 문득, 리노의 손에 끼어 있는 녹색 반지를 발견했다. 작은 잎사귀 문양이 새겨진 반지는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바라보고 있자, 뭔가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 듯했다.
히나스가 물었다.
“트라이 경이 끼고 있는 반지는 무엇이지요?”
이에 리노는 손을 들어 반지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은 사비듐이라는 것으로 저의 가문의 상징이자 인장입니다.”
그 말에 여인은 눈을 크게 떴다.
“이름은 들어봤어요. 꽤 재미난 전설을 가진 반지라고 하더군요. 자연의 고요와 지식을 상징하는 반지로, 그에 합당치 않은 자가 끼면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지요?”
“그저 전설일 뿐입니다.”
“맞아요. 그저 전설이지요. 하지만 신의 무기인 아스파트젠들과 동시대의 물건이라 하지 않나요?”
리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 또한 단지 설일 뿐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스파트젠은 신의 힘이 봉인돼 있는 신의 무기이지만, 사비듐은 그저 값비싼 골동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비자금이기도 하지요.”
상인의 익살스러운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사비듐의 전설을 믿는 것인지 히나스는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사비듐이 인정한 당신의 성품을 믿고 계약하지요.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해 주실래요?”

* * *

로그 영주가 가장 신임하는 충신 중 카엘을 비롯해 대여섯 명의 가신들을 데리고 비밀리에 가네사 영지로 들어간 세르피어는, 리노가 알려준 다섯 창고 중 네 곳을 돌아다니며 그곳에 가득 쌓인 곡물들을 직접 확인시켜 줬다.
그와 동행한 자들 중에는 포섭을 위해 계속적으로 접촉을 한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 은연중에 장남인 레언을 지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자를 동행시킨 이유는 조금의 의심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가네사 영지의 상계에 스며들기 위해 만들어진 ‘트라이’라는 이름의 유령 상단에 대한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서류에서부터 창고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상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아봐야겠지만, 잘못하다가는 이 비밀에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있기에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조용하면서도 짧은 시찰을 돌고 돌아온 세르피어는 영주성으로 돌아온 리노를 보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수고했다. 이번에 가서 창고들을 돌아보고 왔는데, 모두 하나같이 놀라는 눈치더군. 하긴, 그 돼지의 탈을 쓴 세드로나의 눈을 피해 가네사 영지의 상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에 가까우니까 말이야. 그것도 넉 달이라는 극히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성과를 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느냐.”
젊은 주인의 칭찬에 리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게 어디 제 능력이겠습니까. 다 세르피어 님께서 뒤에서 밀어주셨으니 이뤄진 것이지요.”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어. 그건 누가 뭐라 해도 네가 이룬 것이니까.”
먼저 자리에 앉은 세르피어가 손짓으로 리노에게도 자리에 앉으라 하고는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어찌 될지 궁금하구나.”
“뭐, 특별할 것 있겠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이번 혼인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약속은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렇지.”
“그럼 혼인은 확정된 것이라 봐도 되니까, 이젠 이후의 일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후의 일이란 무엇이지?”
잠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리노가 세르피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번 혼인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소문을 만들어 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부정적인 견해일 것입니다.”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혼인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며 헐뜯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결국 세르피어에게 하나의 작은 족쇄이자 흠집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무시할 수 있을 정도겠지만……
“예. 무시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러한 소문이 풍성한 상태에서 결혼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그야 그렇겠지만…….”
“그러니 세드로나 님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번에 히나스 님을 모시고 오시라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직접 마중을 나가십시오.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만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도, 세르피어 님께서 최선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또한 성에 머무는 동안, 그분을 위해 성대한 축제를 베푸십시오.”
그 말에 세르피어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녀와 함께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란 말이지?”
“예.”
“그런 연기를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자의 마음은 다 같지 않겠습니까.”
리노의 농담 아닌 농담에, 아직 여자를 경험해 보지 못해 순진한 세르피어는 얼굴까지 빨개지며 말을 돌렸다.
“그런 얘기는 됐고, 이번 일을 위해 텅텅 빈 군량 창고는 언제 채울 생각이지?”
“이미 허락이 떨어진 것과 진배없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번에 돌아가는 즉시, 곡물을 가져와 창고를 채울 생각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세르피어는 가볍게 손을 들어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 일은 알아서 해. 그리고 통행증은 저 위에 있으니, 갈 때 챙기고…….”
리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여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리노의 통행증이었다. 밖에서는 상단 주인인 트라이 경의 행세를 할 수 있지만, 성안에서만큼은 노예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때문에 다시 나가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며 나가려던 리노는 갑자기 돌아서며 말했다.
“참, 그런데 히나스 님을 마중하러 갈 때 헬슨은 데려가지 마십시오.”
“왜지?”
“큰 덩치에 노예 호위를 데려가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세르피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을 따르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집무실에서 나온 리노는 바로 성을 빠져나가지 않고, 헬슨이 묵고 있는 방을 방문했다. 노예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넓은 방이지만, 침대 하나와 작은 옷장만이 초라하게 놓여 있어 더욱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런 방 안에서 헬슨은 바닥이나 벽에 흠집이 생기지 않게, 무거운 도끼를 허공에다 대고 휘두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에 갇힌 맹수가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돌파구를 찾아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많이 답답한가 보지?”
리노는 인사말도 없이 직선적으로 물었다. 이에 헬슨은 도끼를 앞으로 쭉 내밀어 겨누며 답했다.
“아직…… 아직 멀었나?”
“아니, 거의 다 됐어.”
“진짜?”
“그래. 곧 네가 나를 찾아올 때가 올 거야. 그럼 시간이 다 됐다고 알고, 날 찾아오면 돼.”
헬슨이 이를 드러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는데, 다행이군.”
“그래. 다행이지. 우리 둘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