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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21화)
10. 상인 (2)


“가네사가의 히나스…… 영애 말입니까?”
“그래.”
알칸씨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히나스 양이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르거니와 장사꾼이라면 가네사의 세드로나를 만나려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해서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리노가 잘못 말했나 싶어 다시 되물었다.
“저, 진짜로 히나스 영애와의 만남을 주선하라는 것입니까? 세드로나가 아니고요?”
“그래.”
“저, 그런데 무슨 일로…….”
순간, 가면 너머로 쏘아 보는 트라이의 시선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칸씨아. 많이 건방지군.”
“아, 아니…… 전 다만…….”
“넌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알려준다. 그러니 그 이상 알려 하지 마라. 알았나?”
“예. 죄,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가린 노인이 들어섰다. 노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알칸씨아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에 트라이는 잠시 후드를 쓴 노인을 바라보고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알칸씨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이만 나가 봐.”
“예. 빠른 시간 안으로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알칸씨아가 인사를 하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은색 가면의 사내가 다시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말이야.”
“예. 트라이 님.”
“괜찮은 활을 하나 구해 봐.”
“활 말씀이십니까? 뭐 때문…….”
또다시 쓸데없는 질문을 하려던 알칸씨아는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트라이의 눈빛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알았습니다. 곧 구해서 가져다 놓겠습니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나가는 알칸씨아를 보며 피식 웃은 바테스는 자리에 앉으며 은색 가면을 쓰고 귀족 연기를 열심히 하는 리노에게 물었다.
“갑자기 활은 왜 구하는 건가?”
“운동 삼아 활이나 연습해 볼까 합니다.”
노예 출신이 운동 삼아 활을 쏘겠다는 대답이 재미있는데, 노인은 하하 웃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방금 알칸씨아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다고 하던데,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히나스 영애와의 독대를 추진하라 하였습니다.
“히나스 영애는 왜 만나려는 것인가?”
“거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래?”
“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바테스의 질문에 리노는 은색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마지막 문을 열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문?”
“예.”
바테스는 답답한지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이마를 가리고 있는, 화려한 문양의 수가 놓아진 띠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가 하는 일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 설명을 들어도 이해도 가지 않아. 도통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야. 그럼에도 세르피어 님이 자네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을 보면 참…….”
“그분의 주변에 사람이 워낙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부족한 만큼 사람이 그리운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사람을 믿기 시작하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리노의 대답에 바테스는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르피어에 대한 의견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크게 관심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리노가 더욱 궁금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자네도 노예라 들었네. 그런데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지?”
“뭐가 말입니까?”
“자네의 귀족 행세 말일세.”
잠시 말을 끊은 바테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리노를 살폈다.
“노예에게는 알 수 없는 비굴함이 있다네. 어려서부터 노예로 길들여지며 몸에 새겨지는 보이지 않는 족쇄지. 한데 자네에게선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아. 마치,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 말에 리노는 그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에 해 줄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람의 성격과 습관을 관찰하여 알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선택을 할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인간들 중 두려운 자들이 없게 된 것이다.
바테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헬슨은 탈옥을 하면서 병사와 기사가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지. 그 때문에 평민이나 귀족을 봐도 비굴해지지 않는다네. 그렇지만 예전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였기에, 그의 행동은 딱딱하고 무뚝뚝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자넨 그런 것이 전혀 없어. 그래서 너무나도 신기하다네.”
“그야 제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리노는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제가 영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테스는 서류를 받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가네사 영지에 본단을 두고 있는 상단들에게 사업장을 조금씩 사들였다는 서류입니다.”
물론 전부 다 위조문서이다. 귀족들은 장인들도 함부로 위조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인장을 사용하지만, 상인들은 그렇지 않기에 문서를 위조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조금만 조사를 해 보면 사실과 맞지 않다는 사실이 들통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위조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모든 것은 끝나 있을 테니 말이다.
바테스 노인이 물었다.
“이것만 세르피어 님에게 가져다 드리면 되나?”
“또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리노는 또다시 종이 두 장을 주며 말했다.
“세르피어 님에게 영주님이 가장 신임하는 분들과 함께 거기 적힌 창고 다섯 곳 중 아무 곳이나 둘러보며 눈으로 확인시켜 주라고 말씀하십시오. 증인이 있어야 영주님도 아무 의심 없이 믿으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종이가 두 개군.”
“다른 하나는 창고를 마음대로 검사할 수 있는 허가증입니다. 형식상으로는 세르피어 님과 이 상단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창고를 마음껏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알았네.”
바테스 노인이 서류와 종이를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리노 또한 따라 일어났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그리고 혹시라도, 뒤를 밟는 자가 있는지 꼭 확인하십시오. 영감님의 신원이 밝혀지는 날에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하하, 나 같은 노인을 누가 주시하겠나. 뭐, 그래도 자네 말마따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나오지 말라는 손짓을 한 노인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뜨거운 태양과 보석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만이 존재하는 세상. 모래사장에 반듯이 누워 있는 리노에게 하얀 안개 같은 형태를 가진 네 명의 존재가 다가와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정하게 머리띠를 하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하얀 천으로 몸을 두르고 허리띠로 고정시킨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존재들이 리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들의 저주에 의해 사라진 아니미언의 지식.
―신들의 분노를 피해 숨겨진 아니미언의 능력.
―아니미언의 영광을 가질 자격을 지닌 자여.
―잊혀진 아니미언의 힘을 찾거라.
너무나도 허황된 꿈임에도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리노는 덤덤하게 물었다.
“아니미언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극한의 이성과 지성.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모든 법칙 위에 서는 자.
―모든 것을 관조하고 진실을 보는 눈을 찾아라.

‘으음…….’
리노는 잠에서 깼다. 하지만 좀 전에 꾼 꿈이 너무나도 생생한 탓인지, 아직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반지 사비듐이 현실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방금 무슨 꿈이지?’
무의식적으로 반지를 만진 그는 좀 전의 꿈을 다시 떠올려 봤다. 사비듐이라는 반지와 은색 가면을 가지고 트라이라는 이름의 상인 역할을 연극한 지 백팔 일째 되는 날에 꾼 꿈이다. 악몽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운 것이,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자신의 계획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감에 따라 긴장하기 시작해서인 듯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다시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에 알칸씨아가 가져다준 활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에 뜨거운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식혀 주는 듯하여, 기분이 한결 나지는 것을 느꼈다.
리노는 깊은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는 화살을 꺼내 활에 얹혔다. 그리고는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넓은 정원에서 고목 하나를 목표물로 삼고 활을 당겼다.
기긱.
활을 당기자 뻣뻣한 활대가 휘어지며 소리를 냈다. 당긴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벌써 팔이 떨려 오는 듯했다. 이에 리노는 심호흡을 한 후, 최대한 조준을 하여 시위를 놓았다.
핑.
화살은 고목을 지나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곳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풀 속에 숨어 잠을 자던 새들이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가는 것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였다.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화살을 뽑아 활에 얹히고는 시위를 당겼다.
―모든 것을 관조하고 진실을 보는 눈을 찾아라.
왜 갑자기 꿈속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두운 밤에 새를 맞추기 위해 시위를 당겼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순간 온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풀벌레 소리가 사라졌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새들도 정지해 있었다.
리노는 정지해 있는 새를 향해 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동시에 멈췄던 시간도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목표물이 있던 허공을 지나,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좀 전에 겪은 이상한 경험 때문에 정신이 없는 까닭이었다.
‘뭐지? 방금……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는데…….’
진짜 시간이 멈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잠시 꿈을 꾼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짧은 이상 경험이 그에게 알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 * *

검은 흑발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히나스 가네사는 데어만 영주의 셋째 딸로,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운 여자다. 하지만 딸, 그것도 장녀가 아닌 차녀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꿈을 접고 영지와 가문을 위한 정치적 전략에 사용돼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바로, 헤이나 영지의 차남인 세르피어와 혼인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집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과 그 영지를 몰락시켜 아버지에게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일에 이용되는 것이 싫었다. 자신의 삶이 아버지의 계획을 위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가문을 위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은으로 만들어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신비스러운 상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녀와 거래를 하기를 원하였다.

“트라이 경이라 했나요?”
히나스의 질문에 은색 가면의 리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얼굴을 가리는 것이 무례인 줄 아오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그대의 얼굴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궁금한 것은 왜 나를 찾아왔느냐 하는 것이지요.”
“히나스 영애를 찾아오면 안 되는 것입니까?
능글맞게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는 리노를 보며 히나스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여자라고 하나 멍청이는 아니에요. 우리 영지에서 장사를 하고 부를 얻으려면 세드로나를 찾아가야 하고, 정치적 배경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아버님을 만나야 하지요. 그런데 경은 전혀 엉뚱하게도 나를 찾아왔어요.”
“…….”
“상인은 거래를 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자지요. 그런 자가 나를 찾아왔다면, 그만한 거래를 하기 위함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