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리노트라이 1권 (20화)
9. 각자의 꿈 (2)
“세드로나의 눈을 피할 수 있겠느냐? 만약 들키면 가문의 명성에 금이 가게 된다.”
“걱정 마십시오. 직접 나서지는 않고 상단을 이용할 것이니 절대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세르피어의 시선에 로그 영주는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넉 달. 단, 넉 달의 시간을 주마. 그 안에 가네사 영지의 곡물 시장 2할을 장악해서, 네 능력을 증명해라. 네가 그것을 증명하게 되면 한 번 생각해 보마.”
곡물 시장 2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 일의 핵심은 바로 세드로나의 눈을 피해 가네사 영지의 상계에 진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예. 걱정 마십시오.”
자신감 넘치는 아들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로그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 돼지새끼한테는 넉 달 후에 대답을 주겠다며 돌려보내야겠군.”
* * *
로그 영주의 집무실에서 큰소리를 치고 나온 세르피어는 다급하게 리노를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네사 영지에서 세드로나가 왔다. 데어만 영주가 결국 혼인을 허락한 것이지.”
리노가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이미 예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버님께서 혼인을 반대하셨다는 거다. 데어만 영주가 오히려 이 혼약을 이용해 우리 영지에 피해를 입힐 것이라며…… 그래서 미리 계획한 대로 나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 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단 넉 달 안에 가네사 영지의 곡물시장 2할을 장악하라 하셨다.”
리노는 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지금 넉 달이라고 하셨습니까?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냐. 아버님께서 내리신 명인데.”
“지금 상단을 이끌 비샬바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에 세르피어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가장 필요한 이때, 레언에게 꼬리를 밟혀 몸을 숨겨야 했다는 사실이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더 이상 지난 일에 연연해 봤자 시간 낭비였다.
“나도 알아.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직접 말입니까?”
세르피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런 일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결정을 내려야 해. 내가 여기에 앉아서 느긋하게 편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런 일에 상단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노출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르피어 님께서 직접 전면에 나서시다가, 상단과의 관계가 밝혀지는 날이면…….”
그럼 상단의 주인이 세르피어이고 그 자금이 영지의 돈을 빼돌려 마련한 것이 밝혀질 것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여야만 되는 것이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사람이 없는데…….”
“휴…… 하는 수 없지요. 그럼 이쪽 일은 어떻게 하지요?”
“이쪽 일? 이쪽에 할 일이 있나?”
세르피어의 반문에 리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저번에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부터 서서히 영지의 사람들을 포섭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이번 일만 완벽하게 처리하면 그만 아닐까?”
리노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영주님께서 가네사 영지의 곡물 시장 2할을 선점하면 후계자로 임명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혼인을 허락한다고만 하셨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든든한 배경이 생기면 내가 다음 후계자가 될 공산이 크다고도 말씀하셨지.”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일 뿐, 그렇게 된다는 확정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레언 측에서 데어만 영주가 이 혼인을 이용해 나중에 광산을 빼앗으려는 계획이다라는 여론을 조성한다면, 많은 가신들과 기사들이 세르피어 님을 반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주님이 독단으로 세르피어 님을 후계자로 임명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에 세르피어가 언성을 조금씩 높이며 반박했다.
“하지만 내가 가네사 영지의 곡물 시장 2할을 선점으로써 오히려 내가 가네사 영지를 장악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아닌가.”
“그것은 장악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지, 장악한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세르피어 님께서 사람들을 포섭하고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 등을 알려서 지지자를 늘려가야만 합니다.”
“이…….”
너무 복잡하고 꼬여 가는 상황에 잠시 성질이 난 세르피어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리노의 말이 다 맞기에 뭐라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어쩌라는 것이지?”
“길은 두 가지입니다. 이대로 세르피어 님께서 상단을 이끌면서 위험을 감수하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상단을 맡기던지 말입니다.”
“하지만 맡길 만한 자가 없지 않은가.”
이에 리노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방법?”
“바로 제가 가는 것입니다.”
“네가? 하지만 네 신분으로 어찌하려는 것이냐?”
“세르피어 님께서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주신다면, 얼굴쯤은 가면으로 가리면 되니까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상단에 가 있을 뿐, 모든 일은 알칸씨아를 내세울 테니 발각될 가능성도 적습니다.”
세르피어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중용 한다지만 겨우 노예를 믿고 상단을 맡길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리노는 그런 세르피어의 표정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뛰어난 상인과 견줄 수는 없지만, 세르피어 님께서 이익을 포기하고 자금만 밀어주신다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때부터 천천히 모든 것을 정상화시키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세르피어는 말도 없이 깊은 고민이 시작됐다. 노예라는 신분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신뢰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단호히 반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주변에 일을 맡길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세르피어는 결국 모험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길어야 몇 개월이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게 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갈 틈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도망간다 해도 노예의 신분으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좋다. 해 보지, 리노.”
“예.”
“너에게 상단 운영을 맡기마. 자금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줄 테니, 넉 달 안에 일을 성공시켜라.”
“예.”
불안하기는 하지만 결국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 세르피어가 물었다.
“필요한 것은?”
“우선 자금이 더 필요합니다. 상단이 지금 천천히 거래를 철수하고 여기저기 뿌려진 자금을 회수하고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큰 돈을 투입할 여력은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르피어도 동의를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가 돈을 빼돌리고 그것으로 이익을 창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가네사 영지의 거대한 곡물 시장 2할을 빼앗기에는 부담감이 있었다.
“방법은 영지의 자금을 이용하는 것밖에는 없어.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큰 자금을 빼돌리게 된다면 분명 아버님께 들키고 말 것이라는 거지. 그럼 분명히 지난 기록과 상단에 대한 검사가 이뤄질 테고, 결국 모든 것이 들통나고 말 거야.”
이에 리노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방법인데?”
“바로 군량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군량을?”
리노가 창가로 다가가 영지성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성내에는 약 반년치의 곡물만 저장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사나흘 거리에 있는 창고에 나뉘어 저장되어 있지요. 그 이유는 성은 물론 영지 곳곳으로 빨리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분은 다름 아닌 세르피어 님이십니다.”
세르피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그 곡물을 팔아서 자금을 만들고, 그것으로 가네사 영지의 곡물 시장을 공략하자는 말인가?”
“예. 제법 많은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저희가 곡물을 싸게 팔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피해를 좀 줄일 방법은 있지. 가네사 영지의 상단들이 거래하는 영지에 싼값에 넘기면, 가네사 영지 내에는 곡물들이 넘쳐 날 테고, 그럼 자연스럽게 곡물 가격은 내려갈 테니까.”
리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받았다.
“가격이 떨어지면 상단을 이용해 시장을 조금씩 사들이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가네사 영지에서 가져온 곡물로 다시 창고를 채우면, 영주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시겠지요.”
세르피어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 방법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지, 몇 차례 고개를 흔들더니, 리노에게 말했다.
“좋아. 네 방법대로 해 보지. 그럼 이곳 일은 내가 맡아서 할 테니, 넌 상단으로 가서 그쪽 일을 맡아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세르피어 님께 보고를 드리기 위해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구 염두에 두고 있나?”
“바테스 노인이 제격이라 생각됩니다. 늙은 노예가 오가는 것에 큰 관심을 둘 자는 없을 테니까요.”
“알았다. 그리고 또?”
“인장이 필요합니다.”
이에 젊은 주인은 품에서 나뭇잎 문양이 새겨진 녹색 반지를 꺼냈다. 얼마 전에 리노가 가져온 것이 도로 그에게 돌아간 것이다.
“여기 있다. 중요한 것이니 잃어버리지 말고.”
“걱정 마십시오. 제 분신처럼 여기겠습니다.”
“단지 그것이 인장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지는 사비듐이라는 것으로, 자연의 고요와 지식을 상징하는 귀한 물건이다.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잠시, 말을 끊은 세르피어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반지는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해에 우연찮게 구한 것으로 무서운 전설이 있지.”
“전설 말입니까?”
“그래. 주인으로써 합당하지 않은 자가 끼고 있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전설이 있지. 그러니 너무 오래 끼고 있지는 말라고. 하하하!”
전설은 전설일 뿐, 리노는 세르피어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색이 신비스럽고 아름답지만, 그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반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니,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삶과 인생을 열어 줄 열쇠가 될 테니까.
10. 상인 (1)
붉은 빛깔이 도는 머리와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이 인상적인 사내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어두우면서도 너무나도 차갑고 적막한 집무실로 들어섰다.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자신이 사용하던, 따듯하고 정감이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은색 가면을 쓴 차가운 새 주인이 차지한 이후로는 으슥한 지하 감옥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기피하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붉은 머리의 사내는 힘없는 직원으로써 상단 주인의 부름에 어찌 응하지 않겠는가. 그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슬픈 눈을 하고 들어가는 수밖에……
“트라이 님. 부르셨습니까?”
알칸씨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자, 은색 가면으로 이마와 눈 그리고 왼쪽 뺨 절반을 가리고 있는 트라이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그야 당연히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알칸씨아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듯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말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가네사 영지에서 활동하는 상단들의 사용하지 않는 창고를 비싼 값에 단기간 임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장 버려야 할 썩은 곡식들을 무작정 사들이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오히려 가네사 영지에 있는 상단들이 이런 미친 짓을 하는 트라이 상단에게 고마워하며 협조할 일이었다.
트라이는 그런 알칸씨아의 말투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물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하라고 한 것은?”
“그것도 완벽하게 해 두었습니다. 총 다섯 군데에는 좋은 곡물을 앞에 채워 놔서, 창고에 있는 물건 절반 이상을 검사하지 않는 이상 썩은 곡물은 찾지 못할 겁니다.”
“잘했군.”
기분 좋게 미소를 지은 트라이가 알칸씨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한 가지 내릴 명령이 있어서다.”
“예. 말씀하십시오.”
“넌 내일 당장 가네사로 가서 데어만 영주의 영애인 히나스 양과의 독대를 주선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