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리노트라이 1권 (19화)
8. 도마뱀 꼬리 (4)
“아이고, 주인님께선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아니, 내 정신 좀 봐.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후드를 눌러쓴 불청객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됐다. 내가 온 것은 첫 번째 명령을 내리기 위함이다.”
“예? 아, 예. 그것이 무엇입니까?”
“넌 어제 비샬바에게 편지를 받았겠지?”
“예. 갑작스럽게 저를 상단 대리인으로 하신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아이처럼 눈을 크게 떠 보인 알칸씨아는 그 서찰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후드를 쓴 사내가 말했다.
“일이 복잡해져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일이 좀 더 복잡해질 것 같다.”
“이런, 얼마나 더 복잡해졌기에…….”
“그것까지는 네가 알 필요 없다. 다만, 그 문제 때문에 상단의 이름을 바꾸고 본단을 옮길 생각이다.”
“어떻게……?”
알칸씨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자 후드를 쓴 사내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나의 가문, 나의 성을 따라 트라이 상단이라 상호명을 바꿔라. 그리고 예전 상호명과 비샬바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려라. 만약, 누가 물어도 모른다고 하여라.”
“예? 아, 예.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단 이름을 바꾸게 됐다고, 보고를 해야 합니다. 지금 저희 상단이 헤이나 영지에 있으니, 이곳 영주에게 보고를 해야겠지요.”
이에 사내가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예.”
“그리고 비샬바가 편지를 통해 거래처를 줄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너는 그대로 하되, 언제든지 상단의 본단을 옮길 수 있게 준비를 하여라.”
사내의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알칸씨아가 갑자기 손을 들고는 물었다.
“저, 그런데 어디로 옮기실 예정이십니까?”
“가루다 왕국이다.”
알칸씨아는 타국이라는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상단 주인이 가루다 왕국 출신의 귀족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다만, 타국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두렵고 귀찮을 뿐이었다.
“예. 그럼 저는 상단의 규모를 점점 줄여 가며 언제든 가루다 왕국으로 옮길 수 있게 준비를 하겠습니다.”
후드를 눌러쓴 사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사용되고 있는 상단에 나의 거처를 마련해라.”
“예? 주인님의 거처를 말입니까?”
“그래. 나중에 완전히 상단을 옮길 때까지 내가 이곳에 와 있을 예정이다.”
“그럼 아예 저택을 하나 빌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알칸씨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 오래 있을 것이 아니니 그럴 필요 없다.”
“뭐, 그러시다면야…….”
대부분 돈 좀 있는 사람은 언제나 과시하길 원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데, 전혀 그렇지 아니한 주인을 보고 있자니 좀 특별하고 신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드를 쓴 사내가 몸을 돌이키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오마. 그때까지 내가 명령한 것을 모두 끝내 놓길 바란다.”
“예. 걱정 마십시오.”
처음으로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인사를 한 알칸씨아는 유령처럼 조용히 떠나가는 상단의 주인을 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마치, 잠자다 꿈이라도 한바탕 꾼 것처럼 조금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 우리 상단의 주인이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내가 진짜로 상단의 대리인이 되긴 됐나 보구나.’
한편, 알칸씨아의 집에서 멀어진 리노는 답답한 후드를 훌렁 벗으며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휴…… 이제 모든 준비를 거의 끝났다. 이젠 돌아가서 상단의 이름을 트라이로 바꾸는 서류만 작성하면 돼.’
물론 그 일은 세르피어가 모르게 해야겠지만, 힘든 일이 전혀 아니었다. 현재 대부분의 서류 검토를 리노가 하고 세르피어는 도장만 찍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힘들 것 같다면 가짜 서류를 만들어 몰래 인장을 찍으면 되는 일이었다. 현재, 리노는 세르피어의 모든 거처와 집무실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서류에 도장을 몰래 찍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힘든 것은 그것을 가지고, 내가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지.’
바로 그것을 위해서 데어만 영주의 힘이 꼭 필요로 했다.
‘자, 이제 일은 다 끝나 간다. 이젠 마지막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모든 것은 나의 계획대로 되는 거야. 나의 계획대로…….’
9. 각자의 꿈 (1)
뒤룩뒤룩 살찐 얼굴로 언제나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세드로나지만, 데어만 영주와 독대를 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해졌다. 그러한 모습에 어떤 자들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같다고 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데어만 영주는 절대적인 군주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포식자이며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르피어란 애송이와 나의 딸 중 한 명을 혼인시키란 말이냐?”
“예, 예. 세르피어가 그런 부탁을 해 왔습니다.”
“난 그 애송이의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난 네 생각이 듣고 싶은 것이다.”
단상 위에서 사자 같은 위엄으로 바라보는 영주의 모습에 세드로나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제 생각 또한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세드로나는 깊이 숨을 들이켜 조금이나마 가슴을 진정시킨 후, 집에서 수십 번 연습해 온 대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세르피어는 지금 영주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언과는 달리 뒤를 봐주는 배경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영주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대가는?”
“아직 말은 없었지만 아마도 저희 영지에 아주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데어만 영주의 눈은 가늘게 떠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세드로나는 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따위 사업은 영주님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제가 세르피어의 제안을 영주님께 말씀 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 혼약을 이용해 저희가 빼앗긴 광산을 되찾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데어만 영주는 약간의 호기심을 보였다.
“어떻게?”
“사내가 세상을 움직인다면 여자는 사내를 움직일 수 있는 법입니다. 영주님의 셋째 따님이신 히나스 양의 미모라면 세르피어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만약 성공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명철함이라면 안에서부터 저희를 도와, 모든 상황이 저희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때, 저희가 군을 움직여 광산을 다시 빼앗으면 됩니다.”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으나 낮지도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해볼 만한 일입니다.”
“좋군.”
세드로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기간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데어만 영주는 좋다는 긍정적 표현을 한 것은, 그가 얼마나 광산에 집착하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기에 데어만 영주는 실패했을 경우, 가네사 영지가 떠안게 될 피해에 대해 물어봤고 세드로나는 이미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실패하더라도 세르피어가 내놓을 사업만으로도 제법 큰돈을 벌어들이게 될 테니 전혀 피해 볼 것은 없습니다.”
하긴, 지금 도움이 필요한 것은 세르피어였다. 그리고 데어만 영주가 후원자가 되어준다 하여도 정식으로 영주 후계자로 임명되고 자리에 오를 때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한다. 그동안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은 얻어내고, 히나스가 조금씩 내부에서부터 분란을 일으킨다면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됐다.
“좋아. 한 번 해 보지. 물론 히나스가 이 일을 승낙하느냐가 문제지만…….”
“…….”
세드로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데어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히나스를 시집보낼 것이다. 그리고 헤이나 영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조종할 것이 분명했다.
* * *
레언과 토란트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비샬바란 상인을 찾아 은밀히 영지곳곳을 뒤지고 있을 무렵, 로그 영주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바로 가네사 영지의 모든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세드로나였다. 가네사 영지에서 사신을 보내게 되면 언제나 광산을 둘러싼 분쟁이 그 목적이었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이 돼지같이 생긴 세드로나가 찾아온 이유는 믿기지 않게도 데어만 영주의 셋째 딸 히나스 양과 세르피어의 혼인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어졌다. 일부는 데어만 영주가 혼인을 통해 화해를 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다른 자들은 오히려 이것이 함정일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로그 영주는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세르피어가 데어만의 여식과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 배경을 업고 자신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리라. 그런 상황에서 이 혼인 자체가 데어만의 계략이었다면, 몇 백 년의 역사를 가진 헤이나가는 모든 것을 잃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으리라.
해서 로그 영주는 결정을 미루고는 늦은 시간에 세르피어를 비밀리에 불러 독대를 하였다.
“이번에 가네사 영지에서 세드로나라는 돼지 같은 놈이 사신으로 온 사실을 아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이유도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저와의 혼약에 관한 것이지 않습니까.”
하긴, 영주성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테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세르피어의 대답에 로그 영주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 제가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제가 세드로나에게 비밀리에 먼저 제안한 것인데.”
“네, 네가?”
“예.”
로그 영주는 도대체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진지한 아들의 눈빛 때문에 차마 언성을 높이지 못하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냐?”
세르피어는 부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네사 영지와의 분쟁은 정말로 오랫동안 지속돼 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저희 영지는 언제나 불안함에 싸여 있어야 했고, 그로 인해 영지의 발전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영토가 반이 넘게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저희 아르파너 왕국에 존재하는 영지들 중 토지개발이 가장 늦는 영지 중 하나일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세르피어는 다시금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점을 바꾸려고 합니다. 넓은 영토와 광산까지 갖춘 헤이나 대영지가 아직까지 아르파너 왕국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왕실에서 요직을 차지하지 못하는 현실을 타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가네사 영지와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로그 영주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진실이 어떤 것이든 세르피어가 내세운 명분은 너무나도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명분에 앞서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은 바로 생존이었다. 그렇기에 영주는 맹목적으로 동의를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영주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데어만 영주를 장인으로 모시게 되고 두 영지 간의 사이를 평화롭게 변화시킨다면, 아마 내 후계자는 네가 될 공산이 클 것이다.”
“…….”
“하지만 난 그 이후가 걱정이다. 내가 죽고, 만약 네가 이 영지를 물려받고 나서도 저들이 가만히 있을까 하는 걱정을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데어만은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는 영혼도 팔아먹을 자다. 그런 자를 상대로 네가 영지를 지켜 낼 수 있을지 불안하구나.”
데어만은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혈족 수십 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 독사 같은 자이다. 그런 자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세르피어의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그런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한 세르피어가 반박했다.
“아버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직접 당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이에 세르피어는 고개를 숙여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럼 제가 증명해 보일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제가 데어만 영주에게 쉽게 당할 자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 오히려 제가 가네사 영지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냐?”
마른침을 삼킨 세르피어는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가네사 영지의 경제 구조는 무척이나 단조롭습니다. 바로,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많은 곡물이 전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때문에 데어만 영주가 농노들을 다른 일이나 유흥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금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리고 가네사 영지에서 나는 곡물 중 3할은 세드로나가 직접 관장하고 나머지는 아주 친분이 두텁고 신임하는 상단으로 하여금 거래를 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쁜 마음을 품고 곡물 시장을 가지고 장난을 치게 되면, 가네사 영지의 경제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제가 흔들리면 발전이 느려지며 군사력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르피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속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영주에게 단호히 말했다.
“제가 가네사 영지의 기반인 곡물 시장을 장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