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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8화)
8. 도마뱀 꼬리 (3)
하지만 리노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내들이 오랜 경험에서 얻은 날카로운 직감이었다.
“잠깐. 이제 그만 가지.”
한 사내가 갑자기 나서며 행보를 중지시키자, 리노와 헬슨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내가 둘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말했다.
“더 이상 같이 갈 필요 없이, 자네들은 그 숨어 있어야 하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 주고 돌아가게.”
“하지만 저희는…….”
“꼭 우리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나? 그리고 이렇게 숲 속 깊이 들어왔는데, 잡힐 염려도 없는 것 같고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결코 리노와 헬슨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레언이 수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듯 자신들을 제거하면 편이 세르피어에게는 더욱 안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리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어제 저녁부터 계속 걸어서 너무 피곤하니, 우선 야영할 곳을 찾아보죠. 방금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깊이 들어왔으니, 잡힐 위험은 없어 보이니까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가셔야 할 곳을 알려드리고,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아니네. 내가 보기에 지금 헤어지는 것이 좋을 듯하네.”
그러며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는 사내. 모든 계획이 틀어졌음을 확신한 리노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헬슨.”
그의 짧은 외침에, 헬슨은 비호와도 같은 속도로 앞으로 달려들며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사내는,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불구하고 뒤로 훌쩍 물러서며 간발의 차이로 헬슨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첫 공격이 실패함과 동시에 네 사내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고서 헬슨을 둘러쌌다.
“늙은이라고 무시했는데, 미안해지는군.”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헬슨은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적에게 둘려싸여 있음에도 여유로웠다. 그만큼 자신의 승리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내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샬바 님. 저희가 막는 동안 도망가십시오.”
사내는 담담히 외치지만, 그 뜻은 한마디로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 비샬바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헬슨이 곁눈질을 하며 리노에게 말했다.
“저놈은 잡을 수 있겠나?”
“글쎄…….”
“그래도 몸에 소궁을 숨기고 다니는 것은 장식용은 아니겠지?”
“…….”
“그럼 저놈은 자네에게 맞기지.”
리노는 온몸을 감춰 주는 망토 속에서 세 뼘 정도 길이의 소궁과 정강이에 숨겨 놓은 화살을 뽑아 들고는 느긋하게 비샬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광산에서 노동을 하며 자랐기에 지구력에서는 뒤쳐지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부터 뒤를 쫓는다 해도, 뒤룩뒤룩 살찐 장사꾼 정도야 쉽게 따라잡으리라.
하지만 일부러 힘들게 뒤를 쫓을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사거리가 겨우 이십 보밖에 되지 않는 소궁을 가지고 힘겹게 뛰면서 사냥할 필요도 느낄 수 없었다.
‘사냥은 기다림의 미덕이라 하지 않던가.’
지금 비샬바가 달리고 있는 방향은 달이 기울고 있는 동북으로 숲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참을 달려야 함은 물론, 숲을 벗어나도 농노 마을들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동남 방향에는 비샬바가 살던 도시가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리노는 비샬바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냉소를 지어 보인 후, 동남 방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헉! 헉! 놈을 떨쳐 낸 건가?’
달이 떠 있는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던 비샬바는 더 이상 뒤를 쫓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은 당장 터질 듯이 방망이질을 하고 머리에서는 비가 쏟아지듯 흘러내려, 당장 바닥에 누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헬슨이란 놈이 쫓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없음을 잘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려 한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리노와 헬슨이 자신을 죽이려 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을 죽여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세르피어가 유일했다. 중간 간부까지 모두 다 처리한 지금, 자신만 사라진다면 상단과 세르피어를 연관시킬 그 어떠한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쯤 도망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가족들은 용병들을 고용해 덤으로 죽이겠지. 후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너를 믿고 따른 나를 이렇게 버리겠다? 좋아. 그런 너의 결정을 후회하게 해 주마.’
이를 간 비샬바는 사방을 살폈다. 지금 달려가던 방향에는 농노 마을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바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바로 그가 있던 도시가 있는 방향이며, 지금쯤 레언이 보낸 자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진을 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를 지켜 줘야 할 호위가 되겠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비샬바는 자신의 손에 있는 녹색 반지를 만졌다. 이것만 있으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상단의 모든 사업과 돈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금 중 절반가량만 가지고도 레언과 아주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어차피 그에게는 세르피어를 몰락시킬 자신의 증언이 더욱 중요할 테니 말이다.
결정을 내린 비샬바는 방향을 바꿔서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달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 그럴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동이 터 올 무렵, 숲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입구에 도착한 비샬바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지금과 같은 속도를 유지한다면 해가 중천에 뜰쯤에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레언의 보낸 병사들과 만나게 된다면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가 막 숲을 벗어나려는 찰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오래 기다렸다.”
푹.
리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샬바는 지상에 강림한 마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가 목소리에 반응을 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것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크아악!”
내장을 헤집어 놓는 듯한 고통에 비샬바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리노는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메기며 다가왔다.
“예상대로 움직여 줘서 고맙긴 한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그 때문에 내 예상이 틀렸나 싶어 이곳을 뜰 뻔했어. 뭐, 다행히 마지막엔 나타나 줬지만…….”
“네, 네놈이 어떻게…….”
“왜? 내가 네놈을 찾아내리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인가? 하긴, 세르피어가 나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아마 네놈이 나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나도 좀 골치가 아파졌을지 몰라.”
“커헉! 느, 능력?”
처음 듣는 말에 비샬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나를―미래를 읽는 자―라고 하지.”
그 말을 들은 비샬바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리노란 노예가 세르피어의 곁에서 총애를 받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미래를 읽는 자―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비샬바가 피를 꾸역꾸역 뱉어 내며 물었다.
“그럼 세르피어가 갑자기 상단을 차리고 일을 크게 벌리기 시작한 것도 다 네놈 덕분이겠군.”
“그렇지.”
리노의 덤덤한 대답에 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세르피어의 갑작스런 변화에 일찌감치 눈치를 챘어야 했던 것이다.
비샬바가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세르피어는…… 영주가 될 수 있는 것이냐?”
이에 리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시위를 힘껏 당겼다.
“많이 알고 죽으면 더 억울할 수 있으니, 그만 가.”
팅.
시위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화살은 깃만을 남겨두고 비샬바의 흉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헬슨은 피가 묻은 도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이에 리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뭍은 흙먼지를 털어 내며 맞이했다.
“많이 늦었군. 그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대단했나 보지?”
헬슨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흥! 끝내기는 일찍 끝냈어. 다만,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좀 헤맸을 뿐이지. 그런데 비샬바는 어떻게 됐지? 혹시 놓쳤나?”
리노는 손을 들어 흙무더기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 묻었어.”
“오, 그래? 난 혹시 비샬바를 놓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약간 의외라는 듯한 그의 말에 리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에 헬슨은 무안한 듯 혼자서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뒤에 따라붙었다.
“전에부터 궁금했는데, 너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이지?”
리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대답했다.
“알 필요 있나? 나는 너의 복수를 도와주면 되고, 그동안 너는 나의 말에 따라 주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네 말이 맞지만 그래도 알고 싶군.”
“피곤하게 서로 알 필요 없잖아.”
“나를 못 믿는 건가?”
이에 리노가 걸음을 멈추고는 헬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너는 나를 믿나?”
헬슨은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자신도 리노를 믿지 않는데 리노가 자신을 믿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 바테스 영감이 곁에 없었다면 아주 오래 전에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다.
얼굴 표정에서 대답을 확인한 리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헬슨은 다시 뒤에 따라붙으며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왜 저 도시로 돌아가는 것이지?”
“알칸씨아란 자를 만나 보기 위해서.”
“왜?”
“준비할 것이 있거든.”
“혹시 돈을 훔치려는 것이 너의 목적인가?”
헬슨의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에 리노는 크게 웃었다.
“돈이 내 목적이라고? 하하하. 노예가 돈이 어디에 필요하지?”
그러자 헬슨은 시뻘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하란 말이야!”
“하하, 화내지 말라고. 그리고 지금 알칸씨아를 만나러 가는 것은 바로 너를 위해서니까.”
“나를 위해서?”
헬슨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최종 목표는 바로 세드로나란 녀석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알칸씨아가 자신의 복수와 어떻게 연관이 된단 말인가.
리노는 비웃음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히 힘들게 머리를 굴릴 필요 없어. 그리고 나를 믿지 않아도 돼.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해 줄 수 있어. 지금 알칸씨아를 만나고 상단의 일을 앞당기면, 그만큼 네 복수의 시간도 가까워진다는 것을…….”
솔직히 헬슨의 입장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두 얼굴을 보여 주는 리노를 믿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느껴졌다. 그런 만큼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됐다.
“상단을 마음대로 휘두를 방법은 있나?”
“있지.”
“어떻게?”
“이것이 지금 내 손에 있으니까.”
그러며 리노는 품에서 녹색 반지를 꺼내 보여 줬다.
* * *
“누구십니까?”
늦은 시간에 갑자기 방문한 불청객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알칸씨아는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을 찡그리며 투박한 말투로 물었다. 이에 후드를 깊이 눌러써 얼굴을 숨기고 있는 불청객은 아무 말도 없이 반지가 껴 있는 오른손을 보였다.
알칸씨아는 상대의 갑작스런 행동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욕을 하려 했다. 그러나 욕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의 머리는 불청객이 손에 끼고 있는 녹색 반지에 정교하게 새겨진 잎사귀문양을 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