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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7화)
8. 도마뱀 꼬리 (2)
세르피어는 입을 꾹 다물고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리노의 말마따나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고, 그 좋은 예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리노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배신을 한 자는, 비샬바의 측근이 아니라 중간 간부직에 있는 자인 것 같습니다. 만약, 측근이 배신을 했다면 기사들이 비샬바를 찾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르피어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선은 비샬바와 그의 심복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겠군.”
“예. 그리고 그 밑에 있던 자들은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상단과 나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게 돼.”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비샬바가 돌아올 때까지 맡아 일할 수 있는 자를 임시로 앉히면 되지요. 대신 세르피어 님의 신분이 탄로 나면 안 되니까 서신 등을 통해 지시를 내리셔야 되겠지만, 임시니까 상단에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하던 세르피어는 더 좋은 방안을 찾아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하는 수 없지. 그렇게 하지.”
이에 리노가 말했다.
“대신 세르피어 님께서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뭐지?”
“지금 저들의 모든 신경은 비샬바를 찾는데 쏠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상단의 중간 간부들을 처리하고 했다가는 꼬리를 밟힐 위험이 있습니다.”
세르피어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이지?”
“저들의 눈을 속여 주십시오.”
“어떻게?”
리노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럴 때, 세르피어 님께서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저들은 분명 세르피어 님만을 주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헬슨과 제가 직접 상단에 가서 그쪽 일을 처리할까 합니다.”
“하지만 저들이 너와 헬슨에게도 감시를 붙이지 않을까?”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저들도 드러내 놓고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인원도 제한돼 있을 겁니다. 때문에 이미 비샬바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내보낸 자들과 세르피어 님의 뒤를 쫓는 자들만으로 벅찰 것입니다.”
하긴, 대놓고 감시를 하거나 뒤를 쫓다가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면 동생을 시기해서 음모를 꾸미려 한다는 오해만 살 것이다. 그러니 리노의 말대로 레언 측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생각보다 적으리라.
‘후후, 역시―미래를 읽는 자―란 다르단 말이야.’
짧은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을 예상해 내는 리노가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세르피어가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저들의 움직임에 대해 어찌 알았지? 저들도 나름 은밀히 움직였을 텐데 말이야?”
이에 리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하, 원래 이런 일은 아랫것들이 더욱 민감한 법입니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 해도, 출전 준비를 위해 무기와 갑옷들을 손질하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마른 음식을 챙겨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바로 아랫것들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알았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 * *
세르피어는 리노의 계획에 따라, 새벽에 급하게 영주성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예상대로 레언 측의 사람들이 조심이 그 뒤를 밟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무런 증거가 없기에 레언 측에서도 조심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리노와 헬슨은 모두가 세르피어에게 눈길이 쏠려 있는 틈을 이용해, 은밀히 영주성을 빠져나와 비샬바를 찾아갔다.
“아니, 자네들이 여긴 무슨 일인가?”
갑작스런 방문에 깜짝 놀란 비샬바는 동그란 토끼 눈으로 둘을 올려다봤다. 이에 리노가 품에서 세르피어의 서찰을 꺼내 건네며 대답했다.
“레언 측에서 상단의 존재를 알아채고 지금 비샬바 님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뭐? 아니, 어떻게?”
너무 놀라 사색이 된 비샬바의 질문에, 리노는 세르피어에게 했던 설명은 모두 되풀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비샬바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 밑에 있는 놈들은 내가 붙여 준 호위들이 철저히 감시하기에 배신했을 가능성은 없단 말이지.”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연락을 취할 방법은 수십 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밀서를 보내는 방법도 있지요. 아무리 비샬바 님께서 붙여 놓은 호위가 하루 종일 감시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막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작은 키의 비샬바가 계속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하자, 리노는 기어코 세르피어의 이름을 들먹였다.
“이것은 세르피어 님께서 내린 결론입니다.”
“음…….”
그가 모시는 주군이 내린 결정이다. 그러니 그것이 잘못되었더라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으리라.
비샬바가 자신의 이중 턱을 손톱으로 긁적이며 물었다.
“그래, 세르피어 님의 명령은 무엇이지?”
“지금은 세르피어 님께서 레언 측에 약간의 혼선을 주고 있지만, 새벽쯤이면 레언이 보낸 자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안으로 비샬바 님과 상단에 연관된 측근을 피신시키라 하였습니다.”
“어디로?”
“세르피어 님께서 이미 숨어 있을 곳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리노의 대답에 비샬바는 또다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르피어를 모신 지 제법 됐지만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대단하군. 그분이 이런 일을 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어.”
미소를 지어 보인 리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중간 간부들은 남김없이 제거하라 하셨습니다.”
“모두 다?”
“예.”
비샬바는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이 급할 때에 누가 배신자인지 조사하는 일은 멍청한 짓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배신자를 살려 둘 수 없으니, 의심 가는 자를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리라.
“그들을 제거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시간이 촉박합니다.”
“걱정 마. 나도 만약을 위해, 그들에게 내가 가장 신임하는 전사들을 호위로 붙여 준 것이니까. 그들은 단지 중간 간부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시를 하고 이럴 때에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거든.”
그러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턱을 높이 치켜든 비샬바가 물었다.
“그런데 상단 운영은 어떻게 할지 말하셨나?”
“예. 우선 상단에서 오래됐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겁이 많고 소심한 자 한 명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라 하셨습니다. 그럼 세르피어 님께서 서찰로 상단 운영에 대한 명령을 내리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비샬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상단을 위해서는 최고의 선택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무리 없이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상단 자체가 이익을 내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헤이나 영지의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세워졌기에 적자만 내지 않으면 최종 목표는 달성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기에 괜히 배신할 수 있는 자를 내세우는 것보다 소심해서 시키는 일만 하는 멍청한 꼭두각시 인형이 필요한 것이었다.
“음…… 세르피어 님께서 원하는 인물에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인물이 있군.”
“누굽니까?”
“알칸씨아라고 머리는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고 욕심도, 욕망도 없는 놈이 있어. 그놈을 내세우면 되겠어.”
리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세르피어 님에게 말씀 드려서 임시대리로 임명한다는 서찰을 가져와야겠군요.”
이에 비샬바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왜냐하면 이것이 내게 있거든.”
그러며 그는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 나뭇잎 모양이 새겨진 녹색 빛깔의 반지를 보여 줬다. 반지를 돌려 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세르피어의 가짜 신분을 나타내는 인장을 비샬바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일을 처리하는데, 일일이 세르피어 님에게 허락을 받을 수 없기에 나에게 맡기셨지. 그러니 임명장은 내가 만들면 되는 일이야. 자네는 그저 나중에 이것을 잘 전해 주면 돼.”
리노는 무척이나 놀랐다. 저것만 있으면 지금 상단을 훔쳐서 달아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중요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고 믿는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비샬바가 음지에 몸을 숨기고 있다지만, 세르피어에게는 둘도 없는 심복이자 충신인 것이다.
‘역시…….’
비샬바가 녹색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리노의 내면에서는 더욱 날카로운 살기가 강하게 피어올랐다.
그날 저녁. 비샬바는 알칸씨아에게 임시 대리인으로 임명한다는 서찰을 보내는 한편, 열두 명의 중간 간부들을 급히 호출했다. 그리고 연락을 받은 그들은 단 한 명의 호위만을 데리고 은밀히 모임 장소로 이동하던 중, 하나같이 살해당했다. 바로 그들이 등을 맡기던 호위무사에게 당한 것이다. 비록 상단에서 보낸 호위라고는 하지만, 제법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기에 믿고 의지하였다. 때문에 살해당한 자들은 하나같이 아무런 반항도 못해 보고 고이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샬바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돌아오게 된 호위무사들에게 가족들을 이웃나라로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 부탁을 하고, 네 명의 측근과 함께 리노와 헬슨을 따라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이 길이 맞나?”
너무 갑작스럽게 도망치는 바람에 생각 없이 따라 나섰지만,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숲으로 깊이 들어가자 비샬바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흔히 이런 깊은 숲은 시체를 비밀리에 처리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리노는 그런 비샬바에게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이 길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깊은 숲에 사람이 없을 것 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곳에 숨을 곳을 예비하신 것이지요.”
말을 듣고 보니 일리는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을 곳을 만들어 놓고,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인장까지 맡겼던 세르피어를 믿어 보자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
리노는 한숨을 크게 내쉬는 비샬바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 뒤를 따르는 네 명의 사내를 탐색했다. 상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던 그들은, 비샬바와는 달리 상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큰 덩치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검을 든 모습이, 젊었을 적 제법 칼 밥을 먹어 본 무사들 같았다.
‘어쩌면 비샬바가 젊었을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용병이나 호위무사일 수 있겠군.’
그리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나이가 들자 상단에서 한자리씩 꿰차게 된 것일 수 있었다. 이유가 어쨌던 간에, 리노의 계획에 없던 변수임이 분명했다. 상단의 총책임자인 비샬바만을 만나 봤기에, 다른 자들 또한 상인 출신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헬슨이 저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 리노는 네 사내를 빠르게 살펴본 후,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헬슨에게 눈짓으로 저들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헬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아니, 오히려 눈빛으로 저런 늙은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냐며 화를 내는 것 같이도 보였다. 그러며 그는 당장에라도 저들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는 듯, 도끼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아주 살짝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리노가 작게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헬슨이 저렇게 자신감을 보이지만, 쉬운 길을 두고 힘들 길을 갈 필요가 없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야영을 하고 모두 잠이 든 사이에 일을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