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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6화)
7. 뒤엉키는 실타래 (4)
세르피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모습을 확인한 리노는 계속 설명을 이었다.
“그는 분명 이번 세르피어 님의 제안을 기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르피어 님이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든 간에,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헤이나 영지를 빼앗을 명분과 기회를 얻으려 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르피어 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제안을 했다면, 그가 끼어들지 못하게 뭔가 대책을 세워 놨다고 여기지 않을까?”
“후후,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그는 호전적이면서도 머리 쓰기를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자들의 단점이 바로 도전 정신과 자만이지요. 그는 세르피어 님이 무슨 대책을 세워 놨던 상관없이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오,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그가 어떤 방법으로 나를 뒤흔들려 할까? 그것도 생각해 봤나?”
리노는 씩 웃었다. 지금 세르피어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가진 장난감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장난감인지 다시 한 번 느끼고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리노는 그런 세르피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가장 오래됐으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여자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분명 세르피어 님과 혼인을 맺게 하려는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닐 것입니다. 똑똑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야망도 크면서 데어만 영주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여자일 것이 분명합니다.”
“데어만 영주에게 그런 딸이 있나?”
리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딸들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기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 중에 알맞은 자가 없으면, 괜찮은 아이를 양녀로 들여 세르피어 님과 혼인시키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기분이 나빠지는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세르피어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데어만 영주는 세르피어 님께서 영주직에 오를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적극적으로 후원해 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세르피어 님께서 영주직에 오르면 그때부터 계획을 진행시키겠지요.”
“무슨 계획일까?”
“그야 저도 모르지요. 그때, 가네사 영지와 저희 영지의 구도, 병력 등을 고려해서 방법이 바뀔 것입니다. 병력 차이가 많이 나면,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무력을 앞세워 쳐들어올 겁니다.”
“병력 차이가 없으면?”
리노가 씩 웃었다.
“여자란 가시를 지닌 장미 같은 존재이지요. 역대 수많은 왕들이 여자의 손에 놀아나거나 아니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에 세르피어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여자 따위에게 당할 것이라 생각하나?”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일은 너무 먼 미래의 일이고 변수도 많아 정확히 이야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리노가 한 발 물러서자 세르피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참, 그나저나 헬슨은 어찌하고 있지?”
“지금도 레언 님께 찾아가 매일같이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네 계획대로 돼 가고 있나?”
리노가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제 계획은 틀어진 것 같습니다.”
“왜?”
“헬슨의 연기가 너무 어설프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성과를 얻어내기 힘들 듯합니다. 그래서 이만 접을까 생각 중입니다.”
“이런…….”
세르피어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헬슨을 이용해 형님인 레언을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크게 때려 주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가 무산됐다니 너무 아쉬운 것이다.
“뭐, 하는 수 없지. 그럼 앞으로의 형님의 행보는 어찌 되리라 생각하나?”
“그게……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다? 네가?”
세르피어가 좀 놀랍다는 듯 되묻자, 리노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변명을 했다.
“예. 솔직히 레언 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곤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대로 무력을 앞세워 이곳을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영주님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테니까요.”
리노의 설명에 세르피어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그러니까…… 형님의 행동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란 말이지?”
“예. 제가 모르는 정보가 더 있지 않은 이상은…….”
“그럼 모르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만에 하나, 그분이 화풀이로 헬슨에게 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레언 님도 큰 타격을 받겠지만, 세르피어 님의 손실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제서야 세르피어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헬슨은 자신만의 보검이 되어야 할 자이기에 절대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형님께 가지 못하게 해야겠군.”
“너무 갑작스러우면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외부 쪽 일을 맡기면서 천천히 빼려고 합니다.”
“음…… 알았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세르피어의 허락에 리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8. 도마뱀 꼬리 (1)
바테스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벌건 대낮에 대담하게도 토란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는 듯한 그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토란트는 얼른 문을 닫으며 호통을 쳤다.
“아니, 자네 미쳤나? 보는 눈이 많은 이때, 이렇게 찾아오면 어떡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바테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 같은 늙은 노예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 같은 것이 모두 귀가하고 아무도 없는 늦은 시간에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면 오히려 수상하게 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환한 낮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 토란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노예 따위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지, 그는 마지막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영주성에서는 네가 알지 못하는 눈들이 더욱 많은 법이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더욱 조심하거라.”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너무 눈에 띄게 왔군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바테스는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게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토란트는 알았으면 됐다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지?”
“세르피어 님께서 갑자기 헬슨이 레언 님과 함께 수련하는 것을 막는 바람에 올 수가 없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을 보니 좋은 정보라도 알아냈나 보지?”
이에 바테스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말해 봐.”
“비샬바.”
바테스는 아무런 설명 없이 던진 이름 하나를 던졌다. 이에 토란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누구지?”
“상인입니다.”
“…….”
“그리고 음지에서 세르피어 님의 일을 대행하는 자로, 진정한 심복 중 심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토란트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바테스란 노예가 뭔가 가져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일찍 좋은 정보를 가져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다.
“그자를 잡으십시오. 그럼 세르피어 님을 한 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얻으실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 아느냐?”
바테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비리입니다.”
“비리?”
“세르피어 님이 맡고 계신 일과 비샬바란 자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토란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지지 세력이 없는 세르피어가 가장 쉽게 접근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금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영지 내 대부분의 경제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다.
그럼 그가 영지의 부가 아닌 자신의 부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비리 축적.’
즉, 영지의 돈을 빼돌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금은 비샬바란 상인을 통해, 세탁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서류는 조작돼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비샬바란 놈을 꼭 잡아서 자백을 받아 내야 해. 아니면 그놈이 가진 진짜 장부를 찾아내던가.’
토란트는 너무 흥분해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김새는 알고 있습니다. 우연찮은 기회에 한 번 본 적이 있으니까요.”
토란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비샬바란 놈을 찾기는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푼다면 생각보다 쉬운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놈만 찾아낸다면 세르피어는 단번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영지의 돈을 빼돌린 사실이 탄로 난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지지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겁도 없이 영주 자리를 탐낸 세르피어를 어떻게 짓밟을까 상상하던 토란트가 물었다.
“그런데 너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이지? 너 같은 노예가 알게 할 만한 일은 아닌 듯한데 말이야?”
바테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지요.”
“운?”
“예. 토란트 님도 아시겠지만, 세르피어 님은 영지 내에서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직접 하십니다. 그리고 비샬바를 만나는 것같이 은밀한 일을 할 경우, 호위기사를 데려가지 못하기에 헬슨만을 데려갑니다. 그러다 보니 운 좋게 저도 따라가 본 적이 있지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요즘 하급 기사들 중 세르피어에게 호감을 보이는 자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충성을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영지의 돈을 빼돌리는 비리 장면은 어떻게든 숨기려 할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군. 정말로…… 하하하!”
* * *
“큰일 났습니다.”
큰소리로 외치며 허둥지둥 들어온 리노를 물끄러미 바라본 세르피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큰일났다는 것이지?”
“아무래도 레언 님 측에서 세르피어 님이 만드신 상단의 존재를 알아챈 것 같습니다.”
쾅!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세르피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놈들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이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어제부터 레언 님 측에서 약간 어수선한 움직임이 보이기에, 기사님들을 통해 알아봤더니 비샬바란 상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라 하였습니다.”
세르피어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혹시 이름만 같은 자가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확고한 리노의 대답에 세르피어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제가 보기에, 정확한 증거 같은 것은 없고 단지 비샬바란 이름과 세르피어 님과는 무슨 관계인지 정도만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만약 더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조용하게 사람을 풀어 잡아들이려 하지 않고 기사들을 보내어 소란을 떨며 잡아왔을 것입니다.”
세르피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레언의 입장이고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워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은 뒤, 모든 것을 폭로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어찌 안 것이지?”
“누군가 밀고하였을 것입니다.”
“누가”
“저희 아니면 상단에 있는 인물들 중 한 명이겠지요.”
저희란 바로 리노를 비롯해 헬슨과 바테스 영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르피어가 보기에 리노와 헬슨은 결코 자신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바테스란 늙은 노예를 제외하고는……
“그럼 바테스란 놈이?”
이에 리노는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반대 의견을 냈다.
“제가 보기엔 상단의 인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왜지?”
“바테스 노인이 세르피어 님을 배신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단에 있는 자들은 비샬바의 충복들이라 배신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리노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