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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5화)
7. 뒤엉키는 실타래 (2)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세르피어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놀랄 것이 뭐 있겠나,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인데. 다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좀 의외였네.”
“그런가요?”
세드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자네를 봤을 때, 성급하게 일을 진행시키다 자멸할 것이라 여겼거든. 그런데 최근에 자네가 보여 준 행보를 듣고는 내 예상이 틀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오늘 보니, 확실히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겠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세르피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스스로의 계획을 나름 완벽하다 여겼었는데, 이제 보니 제법 많은 허점을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노에 이어 세드로나까지 자신의 속내를 어찌 알고 있었겠는가.
‘아니면, 이 둘이 특출한 천재던가…….’
아마 리노를 만나지 않았다면 세드로나의 말대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들은 리노라는 선물을 주었고, 그로 인해 아름다운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드로나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원래 경영 능력과 군주로서의 능력은 다르다네. 그리고 내가 자네를 만났을 때는, 경영 능력은 있으나 군주로서의 자질은 없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능력을 철저하게 숨긴 듯하군. 나도 깜짝 속고 말았어.”
“죄송합니다.”
상대의 칭찬에 세르피어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세드로나가 말했다.
“죄송할 필요는 없어. 자네는 자네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권한이 있는 것이니까. 그래, 나에게 배경이 되어 달라 했는데 정확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네사 영지와 혈연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설마…… 혼인?”
이번에는 세드로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네사 영지와 헤이나 영지 간에는 오랜 분쟁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자신과 세르피어로 인해 잠시 평화로워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휴전일 뿐이다.
그런데 혼인을 하겠다?
정말로 예상에도 없던 부탁이었다.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세드로나는 두꺼비처럼 통통하게 살찐 눈을 가늘게 뜨며 수많은 상황 전개를 유추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세르피어에게 불리한 결말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혼인을 제안해 왔다는 말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후후, 뭔지 모르지만 재미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잘만하면 큰 이익을 챙길 수 있겠고 말이야.’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한 번 잡아먹으려 든다면, 아직 젊은 세르피어 따위를 요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자신했다.
“알았네. 내가 영주님께 건의해 보지.”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둘은 서로 바라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레언의 눈빛에선 언뜻언뜻 살기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강하고 빠른 공격으로 헬슨을 압박해 나갔다. 하지만 상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노예 주제에 대귀족의 장자인 레언에게 맞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격까지 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대련을 시작했을 당시, 일방적으로 당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그만큼 헬슨의 실력이 빠른 속도로 상승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의 실력이 상식에서 벗어난 속도로 높아질수록, 레언의 마음속에선 헬슨을 데리고 영지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꿈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살심만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둘의 대결을 구경하던 대머리 토란트가 물 컵이 담겨져 있는 쟁반을 들고 있는 바테스 영감에게 물었다.
“너는 헬슨이란 아이와 같은 마을에서 왔다고 들었다. 맞느냐?”
“예. 맞습니다.”
바테스는 허리까지 살짝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럼 저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구나.”
“예. 잘 압니다.”
“그럼 한 가지 묻겠다. 네가 보기에 헬슨이란 아이가 레언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보느냐?”
겨울 내내 같이 붙어서 수련을 하고 대련을 했으니, 이제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바테스는 상대의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토란트가 재촉했다.
“네 생각을 말해 보라니까.”
“그게……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솔직한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여전히 머뭇거리던 바테스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헬슨이 레언 님께 호감을 갖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지 토란트의 눈은 크게 떠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보기에 겨울 내내 함께 수련을 하면서 제법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보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헬슨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토란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잠시 말을 끊은 바테스는 헬슨과 레언의 대련을 구경하며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레언 님의 검에서는 살기가 느껴집니다.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강한 의지 말입니다. 멀리 떨어진 제가 느낄 정도인데, 가까이에서 검을 맞대고 있는 헬슨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대련을 하다 보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개도 자신을 아껴 주는 주인과 자신을 싫어하는 주인을 아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희라고 그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아무리 노예라지만 그 정도 눈치도 없지는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노예이기에 더욱 눈치가 빠른 법이지요.”
토란트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보기에도 레언의 검에는 점점 살기가 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헬슨은 빠지지 않고 계속 수련을 하러 오기에, 짐승과도 같은 노예이지만 사내이기에 레언의 무력과 힘에 호감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바테스란 노인과 얘기를 나눠 보니, 자신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저놈이 노예라는 점을 잊지 말았어야 하는데…….’
속으로 자신을 질책한 토란트는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였지?”
“바테스라 합니다.”
“농노였나?”
“예. 관리장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토란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관리장이라면 노예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된 것이지? 내가 알기로는 관리장으로 있으면 여기서 이런 심부름하는 것보다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을 텐데.”
“저놈의 시중을 들라고 끌려온 것이죠.”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표정의 바테스였지만,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씁쓸함은 완전히 숨기지 못하였다. 이를 눈치챈 토란트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자넨 가족이 있나?”
“있었지만 몇 년 전에 발생한 돌림병으로 다 죽고 저만 남았습니다.”
“이런…… 그럼 많이 외롭고 쓸쓸하겠군. 새로 가정을 꾸릴 생각을 하지 않았었나?”
“글쎄요. 얼마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창피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바테스를 보며 토란트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군.”
“예.”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인가?”
“그게…….”
말꼬리를 흐리며 무의식적으로 헬슨을 바라보는 바테스. 토란트는 그러한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헬슨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
“음. 헬슨과 연관돼 있고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세르피어가 그에게 해 준 약속과도 관계가 있는가 보군. 아닌가?”
순간, 바테스의 무표정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토란트는 이런 기회를 놓칠 만큼 애송이가 아니었다.
“말해 봐라.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이 말이 새어 나갔다가는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내가 지켜 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너에게 큰 상을 내릴 수 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말해 보거라.”
이에 잠시 고민하던 바테스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토란트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세르피어 님께서 헬슨에게 한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약속이냐?”
“세르피어 님께서 헬슨에게 약속한 것은 단지 가정을 꾸려 편안한 삶을 약속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럼?”
“그의 자식들을 노예의 속박에서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헛소리!”
토란트는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노예를 풀어 주는 것은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어떻게 풀어 준단 말인가. 그것은 세르피어가 아니라 로그 영주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테스가 말했다.
“법으로는 금지돼 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방법?”
“아이는 태어나면서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평민 집에 보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돈이 좀 들고 하겠지만 그 정도 돈이야 큰 문제가 되지 않지요.”
토란트는 속으로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이 자신의 후손이 잘되길 원하는 것으로 봤을 때, 헬슨이 세르피어를 따를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그럼 지금까지 우리는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군.’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같은 조건을 내세울 수도 없었다. 바테스가 말했듯이, 레언이 품고 있는 살심을 헬슨이 알았다면 절대 마음을 돌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그의 바테스 영감이 들어왔다.
“그런데 자네는 무슨 약속을 받았지?”
“저같이 늙은 노예가 무슨 약속을 받았겠습니까. 그냥 헬슨과 잘 아니까 끌려온 것이지요. 그리고 이대로 헬슨의 시종 노릇이나 하면서 살다 죽겠지요.”
토란트는 바테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늙었다고 하지만, 본능적으로 가족을 꾸리고 후손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리라. 그런데 세르피어가 헬슨에게 한 약속을 알고 나니 어찌 시기와 질투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것도 모자라 어린 노예의 시종 노릇이나 하게 되었으니, 그가 느끼는 박탈감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토란트가 말했다.
“내가 너에게 같은 조건을 내걸겠다.”
“예?”
쨍그랑.
너무 놀란 바테스는 쟁반을 떨어트리고 말았고 물이 쏟아지며 토란트의 신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모가지를 쳐 냈겠지만, 지금은 늙은 노예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지.”
“무엇입니까?”
“세르피어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한 정보를 가져와라.”
“치명적인 약점 말입니까?”
토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 네가 그런 정보를 가져온다면 너에게 여자를 주겠다. 그리고 평생을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게 해 주겠다. 그뿐만 아니라, 네가 자식을 낳게 된다면 평민 가정에 보내서 평민으로 자라게 해 주고 뒤를 봐줘 큰 상단도 꾸릴 수 있게 해 주마.”
바테스는 다시금, 레언과 대련을 하고 있는 헬슨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자신이 토란트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바테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쓸 만한 정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계속 헬슨의 곁에 있어야만 합니다. 대신 나중에 제가 찾아오면 저를 꼭 받아 주십시오. 만약 저를 내치신다면 전 세르피어 님의 손에 모진 고문을 받다 죽고 마니까요.”
늙은 노예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토란트가 씩 웃으며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럼 너의 활약을 기대하마.”

* * *

세드로나와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온 세르피어는 리노를 통해 자신이 없는 동안 상단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았다.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보면 상단은 아무 문제없이 돌아간다 이 말이군.”
“예.”
“하긴 비샬바 녀석이 키는 작지만 일 처리는 철저하지.”
“그리고…….”
리노가 계속해서 보고를 하려 하자, 세르피어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런 보고 따위는 됐다. 너희들이 알아서 잘하는데, 쓸데없이 시시콜콜 보고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세르피어 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셔야…….”
“아, 됐다니까. 그런 쓸데없는 것은 그만 넘어가. 그보다 가네사의 데어만 영주의 반응이 궁금한데, 그것에 대해서 너의 생각을 듣고 싶군?”
이에 리노가 걱정 말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데어만 영주는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지만 매우 치밀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만큼 무식하게 힘으로만 해결하지 않고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경쟁자가 될 만한 자를 모두 죽이고 영주직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