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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4화)
6. 진정한 시합의 시작 (3)


헬슨의 얼굴은 딱딱한 돌덩이마냥 굳어져 버렸다. 처음부터 말투가 적의가 담겨 있다 싶었는데, 역시나 악의를 품고 온 것이었다.
‘놈이 어떻게 나올까? 날 죽이려 할까? 아니면 그냥 날 불구로 만들려고?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놈을 그냥 죽여 버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하지만, 그의 몸은 언제든지 옆에 세워 놓은 도끼를 잡을 수 있게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레언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난 말을 길게 꽈서 하는 것은 질색이라 길게 말하지 않겠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에게 와라.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너의 목숨을 나에게 맡겨라. 그럼, 세르피어가 네게 해 주는 것의 배를 주겠다.”
놀란 헬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레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아직 앳된 눈빛을 간직하고 있는 레언의 얼굴에서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레언. 헤이나가의 장자…… 이자라면 나의 복수를 이뤄 주지 않을까?’
솔직히 같은 노예인 리노만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야망을 위해 세드로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르피어에게 복수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언이라면…… 자신의 복수를 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지팡이를 짚고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바테스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아닌가?’
그가 유일하게 믿고 조금이나마 존경하는 바테스의 모습에 헬슨도 따라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 따를 마음이 없습니다.”
그 말에 레언의 얼굴은 굳어 버렸다. 하지만 아주 잠시 후, 그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아마 네가 바로 마음을 바꿨다면 오히려 난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네놈의 모가지를 쳐 버렸겠지. 하하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웃어댄 레언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내일부터 나의 연습장에 와서 수련해라.”
“예?”
“난 당장 네놈의 마음을 얻을 생각은 없다. 대신, 내 곁에 두고 천천히 나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너도 나를 가까이서 지켜봐라. 그리고 세르피어와 비교해 봐라. 누가 네놈의 주인으로서 합당한지를…….”
레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갔다.

“저자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헬슨은 어느새 다가온 바테스 영감에게 물었다. 이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세르피어보다 믿음직스럽지. 하지만, 저자에게는 큰 기대를 할 수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자의 목소리에서…… 경멸이 느껴지더군.”
바테스 영감의 말뜻이 이해하지 못한 헬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후, 자네는 아직 모르겠나 보군. 하지만 나처럼 오랜 시간을 살다 보면, 그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만 들어도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지. 그리고 저자는 속으로 자네를 경멸하고 있네. 하긴, 헤이나가의 장자로서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자신이 노예의 충성을 받아내려 한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운 것이겠지.”
“그럼 왜……?”
바테스는 쭈글쭈글한 오른손으로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쩌면 세르피어 때문이 아닐까 싶군.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네의 복수를 돕기 위해 옆 영지와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네.”
“하지만…….”
“어쩌면 자네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것을 이용해 급부상하고 있는 동생을 떨어트리려 하겠지. 그리고 그 여파로 자네는 노예 주제에 귀족을 살해할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할 테고 말이야.”
“…….”
“귀족들을 믿지 말게. 특히, 자네의 신분이 언제든 죽여도 상관없는 노예라면 더욱더.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필요할 때 사용하는 사냥개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리노가 우리들을 소개할 때, 충견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언어 선택이 아니네. 바로 저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확히 알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네.”
하지만 헬슨은 바테스 영감의 의견에 불만이 있는지 곧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리노를 믿는다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그는 저와 같은 노예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예를 믿으라니…….”
“후후. 그래, 그도 노예지. 그렇기에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야. 왜냐하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대체 무슨…….”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나도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하니 해 줄 말도 없네. 그저 리노와 가까이 하며 그를 따르라는 말밖에는…….”
그러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자네 리노와는 무슨 문제가 있었나?”
“아니요, 왜요?”
“그게…… 저번 마하마야 토벌에서 돌아온 이후, 그가 자네를 바라보는 눈빛이 좀 멀게 느껴지더군.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서먹해지지 않게 자네가 더 노력하게나.”
“대체 왜 그래야 합니까?”
헬슨은 자존심이 좀 상했는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바테스 영감은 그저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그냥 내 말을 따르게. 나이 먹은 노인의 충고를 따라서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일세. 그리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리노를 찾아가 레언이 찾아왔던 일을 알려주게나.”

* * *

리노는 자신을 찾아온 헬슨의 이야기를 듣고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러니까 레언이 자네에게 같이 수련하자고 제안을 해 왔단 말이지?”
이에 헬슨이 약간 투박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회유하러 온 것이 아닐까?”
“후후. 회유하러 왔다고 해서 갈 자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사실은 중요한 것이 되지 않지.”
“왜 그리 장담하지?”
“자네가 그자를 따라가게 된다면 복수는 물 건너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이렇게 날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리노를 잠시 강하게 노려보던 헬슨이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이제 난 어찌해야 하지?”
그 말에 리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미리 예상하지 못하였던 상황이라 그럴 것이다.
잠시 후, 눈을 뜬 리노가 어딘지 모르게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은 레언과 함께 수련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같이 연기를 해 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세르피어 님에게는 뭐라 하지?”
“그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말해 놓을 테니까. 단지 자네는 그의 곁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면서 내가 해달라는 일만 해 주면 돼.”
헬슨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설마, 살인 같은 일은 아니겠지?”
“왜? 살인할 자신이 없는 것인가?”
“살인이 자신 없는 것이 아니라 개죽음당하기 싫을 뿐이다.”
그 말에 리노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아니니까. 적어도 너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전까지는 그런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을 거니까 말이야.”
이에 헬슨도 씩 웃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지는 않고 있나 보군.”
“당연하지.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인데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그리고…….”
“…….”
잠시 말을 끊은 리노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
“자네의 복수가 나의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거든.”
뜻밖의 대답을 들은 헬슨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의 복수가 계획의 일부란 말인가. 그리고 노예 주제에 무슨 계획이 있단 말인가. 정말 보면 볼수록 신비한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는 녀석이지. 그런데 바테스 경은 대체 저런 녀석에게서 무엇을 봤기에, 그냥 따르라는 것이지? 혹시 그는 저 녀석의 계획을 아는 것일까?’
요즘 들어 바테스 영감도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헬슨이었다.



7. 뒤엉키는 실타래 (1)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기운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세르피어는 가네사의 2인자라 불리는 세드로나를 방문했다. 물론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노예 두 명을 선물로 데리고 직접 찾아간 것이다.
“하하, 세르피어! 갑자기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나? 그것도 빈손이 아닌, 아주 귀한 선물을 가지고서.”
살이 쪄서 코가 파묻힌 세드로나는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도 무척이나 아름다우면서도 색기 넘치는 두 노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여자 노예들은 남자와는 달리 손등에 인두를 찍기 때문에 얼굴이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
세르피어는 그런 세드로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겨울 내내 찾아오시지 않기에, 선물이 필요하겠거니 생각하고 이렇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역시 자네는 사람을 기쁘게 할 줄 안단 말이야.”
그러며 두 노예에게 다가가 얼굴에서부터 가슴, 허리까지 두 손으로 훑어 낸 세드로나가 탄식을 했다.
“아, 이 아름다운 것들을 보라고…… 이 아름다운 것을 건들지 못하게 하다니. 우리 영주님은 정말로 너무하단 말이야. 앞뒤가 너무 꽉 막혔어.”
돼지같이 생긴 사내의 투정 아닌 투정에 세르피어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데어만 가네사 영주는 자신의 노예들을 성노로 삼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물론, 노예의 인권 따위를 걱정해서 금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노예는,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주는 가축이었다.
그런 가축을 성노와 같은 사적인 문란한 놀이에 사용하기 시작하면 영지에 들어오는 돈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 여겼기에 금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돼지같이 생긴 세드로나는 옆에 붙어 있는 헤이나 영지에 가서 성노를 사 와야만 했던 것이다.
두 노예의 몸을 잔뜩 주물러댄 세드로나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역시 자네는 사람 마음을 읽을 줄 안단 말이야.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제가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읽겠습니까, 그저 세드로나 님과 마음이 통하는 것이지요.”
“후후, 그럴지도 모르겠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세드로나는 뒤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녀들은 두 노예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드로나를 오랫동안 모신 자들이기에, 저녁에 재미를 볼 수 있게 씻기고 새로운 옷을 입히는 등 완벽하게 준비를 해 놓으리라.
“안으로 들어가지.”
세드로나를 따라 넓은 집무실에 들어선 세르피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시녀들이 나타나 차와 간단한 음식들을 내오자 둘은 사소한 이야기와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 따위를 물으며 차를 즐겼다.
그리고 차가 다 식어 떫은맛만 남았을 무렵, 세드로나는 지금까지 보여 준 성욕에 미친 변태의 모습을 지우고는 말했다.
“자, 이제는 본론을 말해 보게.”
“무얼 말입니까?”
세르피어가 능글맞게 웃는 얼굴로 되묻자, 세드로나는 두툼하게 살이 찐 볼을 실룩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보여 준 웃는 가면을 벗어 던진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르피어를 응시했다.
“자네는 내가 이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나?”
“…….”
“아니지. 아니야. 자네가 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럼 지금 나를 데리고 말장난하면서 시험해 보고 싶다는 말인데, 그러면 안 되는 것이야. 돈 버는 능력은 자네에게 미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 보는 눈만큼은 자네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니까 말일세.”
그러며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자, 세르피어가 하하 웃으며 답했다.
“하하, 역시 세드로나 님에게는 숨길 수 없군요.”
“…….”
“예. 맞습니다.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디, 말해 보게.”
이번에는 세르피어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배경이 되어 주십시오.”
“배경?”
“제가 영주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속마음을 처음으로 드러낸 세르피어는 상대가 깜짝 놀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드로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