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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3화)
6. 진정한 시합의 시작 (2)


“지금부터 영지의 재산을 줄이고 세르피어 님의 재산을 늘리십시오. 그리고 세르피어 님의 상단의 영향력을 늘리십시오. 세르피어 님이 사라지면 영지가 큰 곤란에 처할 정도로 말입니다.”
“설마…… 나중에 경제력으로 협박을 하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차선책이지요.”
“그럼 왜 그렇게 하라는 건가?”
리노는 창가로 다가가 점점 추워지는 바깥 공기를 마시며 대답했다.
“여우는 도망갈 구멍을 여러 개 만드는 법. 세르피어 님의 재력은 만약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음…… 그럼 영지의 돈을 빼돌리는 것 말고, 진짜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지?”
“처음에 세르피어 님이 생각하셨던 방법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입니다.”
세르피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자네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요. 이제는 레언 님과 비슷한 위치에 서셨습니다. 그러니 돈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투자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너무 드러내 놓고 하시면 안 됩니다. 천천히, 한 사람씩 포섭해 나가셔야 합니다.”
“음…….”
세르피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리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으로 포섭하는 것 외에도 더 큰 일을 추진하셔야 합니다. 바로 세르피어 님만의 든든한 배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만의 배경?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나의 배경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리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배경은 레언 님께서는 절대 빼앗을 수 없는 배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르피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것이 존재하나?”
“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바로 처가라 하지요.”
“처가?”
리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주 든든한 배경을 가진 부인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레언 님께서 절대 빼앗지 못할 아주 든든한 배경이 될 것입니다. 세르피어 님께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군사도 지원해 줄 수 있는 배경 말입니다.”
“혹시……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이라도 있는가?”
“예.”
이미 욕망의 포로가 된 세르피어는 리노의 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디인가?”
“바로, 가네사 영지입니다.”

* * *

“그러니까…… ―헤이나가의 후계자 임명은 급한 일이 아니니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했단 말입니까?”
분명히 똑똑히 들었으면서도 되물은 레언은 토란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아직 젊기에 당장 후계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렇기에 후계자 임명을 미룬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일 따위는 없었다.
정작, 레언이 화가 난 것은 ‘레언의 후계자 임명’을 미룬 것이 아니라 ‘헤이나가의 후계자 임명’을 미루었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즉, 그 후계자가 자신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반대를 했단 말이지요?”
“다는 아니네. 일전에 세르피어가 마족들을 토벌하고 왔을 때, 저녁 모임에 초대받아 이야기를 들은 가신들만이 반대한 것이네.”
토란트의 위로 아닌 위로에 레언은 쓴 미소를 지었다. 당시 초대받은 자들은 모두 로그 영주가 가장 아끼는 가신들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모두 반대했다면, 전부 다 반대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분들이 반대한 이유를 아십니까?”
“신이 아닌 이상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헬슨이란 노예의 존재 때문인 것 같네.”
“노예? 지금 노예라 했습니까? 허, 허…….”
토란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언은 기막히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소리를 질렀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노예? 지금, 제 명예와 권위가 노예 따위에게 흔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명예도 인성도 없는 그 짐승 같은 것 때문에?”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귀족이, 그것도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는 말을 듣는 자가 노예와 비교된다는데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헬슨은 일반 노예와는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일반 노예가 아니네.”
“일반 노예가 아니면 온몸에 금덩이라도 붙인 노예란 말입니까?”
“세르피어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는…… 신에게 힘과 재능을 받고 태어난 자네. 레언, 자네처럼…….”
레언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마냥 모든 사고방식이 정지해 버린 것이다.
토란트의 말이 이어졌다.
“믿기 힘들겠지만, 함께 갔던 병사들이나 기사들의 증언도 일치하다네. 그의 힘과 전투 능력은 인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나같이 말하였다네.”
레언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혼자 조용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를 제거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네.”
“왜 쉽지 않단 말입니까? 노예 따위를 죽이는데, 무슨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토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허락을 받아야 하네. 왜냐하면 이젠 그는 세르피어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세르피어는 분명 허락을 하지 않을 것이고.”
뿌드득.
토란트는 이를 가는 레언을 보며 계속 말했다.
“그렇다고 자네가 공개적으로 대결을 요청해서 싸우다 죽일 수도 없는 일이네.”
그건 당연했다. 도전이란 하수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약, 레언이 대결을 요구한다면 스스로를 노예와 같은 수준에 놓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귀족으로서 명예를 버리는 행위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레언이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럼 방법은 암살밖에 없겠군요.”
언제나 때려 부수고 죽이는 얘기만 하는 레언의 말에 토란트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차선이지, 최선책은 아니라네.”
“그럼 최선책은 무엇입니까?”
“누군가를 굴복시키고 그 위에 서기 위해서는 꼭 죽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죽이지 않으면?”
“빼앗아 오시게.”
전혀 예상에 없던 대답이었는지 레언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빼앗아 오다니, 무엇을 빼앗아 오란 말입니까?”
토란트는 뒤돌아서서 방 안을 천천히 거닐며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세르피어가 갑자기 부상한 것은 단순히 저주받은 마하마야들을 토벌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그에게 모자란 힘, 무력을 얻었기 때문이네. 그리고 그 힘이라는 것은 바로 헬슨이고.”
“…….”
“만약, 자네가 헬슨을 빼앗아 온다면, 그의 충성을 받아 내고 휘하에 둘 수 있다면 자네는 단숨에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자네를 반대하지 못할 것이네.”
레언은 잠시 생각했다. 비록 노예지만 자신과 비교될 정도의 힘과 무력을 가진 자를 충견으로 데리고 있을 수만 있다면, 미래에 그의 지위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굳건할 것이며 그의 영지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철옹성이 될 것이다.
‘후후, 나쁘지 않은걸.’
처음에는 노예 따위가 자신과 비교된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죽이고만 싶었다. 그런데 지금 토란트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자신만의 명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레언이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당장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토란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말인가?”
“예, 지금 당장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이에 토란트가 말렸다.
“하지만 그전에 헬슨이란 노예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이미, 세르피어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란 말일세. 그런데 이렇게 무턱대고 갔다가는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다네.”
하지만 레언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뒷조사하고 생각하는 것은 계집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사내라면 당연히 정면 돌파를 해야지요. 그리고 아무리 명예 따위가 없는 노예지만, 나와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이라면 당연히 사내다운 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자에게는 쓸데없는 말보다, 직설적으로 대하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그러며 먼저 나가버리는 레언을 보며 토란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 것이,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듯했다.
‘하긴…… 저렇게 꾸밈없고 순수한 모습이 레언의 매력이지.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저런 모습에 헬슨이란 노예가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 * *

부웅. 쿵!
부웅. 쿵!
세르피어의 거처 뒤뜰은 헬슨이 휘두르는 도끼가 바람을 가르고 나무를 부수는 소리로 가득했다. 마하마야들을 토벌하고 돌아온 이후, 그는 세르피어의 배려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수련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목표는 세르피어에게 충성을 하는 것 따위는 아니었다. 그저 복수의 때가왔을 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이 부수는 통나무들을 씹어 죽여도 시원찮은 가네사 영지의 세드로나라 생각하며 열심히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짝. 짝. 짝.
갑작스런 박수 소리에 흠칫 놀란 헬슨은 본능적으로 도끼를 앞으로 내세워 방어 자세를 취하며 뒤돌아봤다.
“호, 반응이 제법 좋군. 노예니 배우지는 않았겠고, 본능인가?”
헬슨은 자신과 비교해 절대 작다고 할 수 없는 큰 덩치의 청년을 보고는 한눈에 상대의 신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레언 헤이나!’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그는 빠르게 도끼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귀족들은 노예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과 감히 말을 건네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레언이 그 모습을 보면서 씩 웃었다.
“신체적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눈치도 제법 좋아 보이는군.”
“…….”
“넌 내가 누군 줄 아느냐?”
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레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를 안다니 다행이군. 하긴, 너 덕분에 요즘 편치 않은 유일한 사람이니 모를 수 없겠지.”
가시 돋친 레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헬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하게 도발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대꾸하거나 성질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은, 상대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는 신분의 차이 때문이다.
잠시 이를 악 다물며 속으로 화를 억누른 헬슨이 말했다.
“지금 세르피어 님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헤이나 영지의 장자, 레언이었다. 동생인 세르피어가 있든 없든 그에겐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나도 안다. 그리고 난 동생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아니다.”
“…….”
“난 나의 명예에 도전하는 건방진 노예를 보러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