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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2화)
5. 도전자 (3)
너무나도 당당한 세르피어의 대답에 가신들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도 귀가 있기에, 사냥터에서 목숨을 걸고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던 소문을 들은 터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겁쟁이가 아닌 슬기로운 우두머리의 모습으로 비춰진 것이다.
로그 영주가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네 계획을 말했으면 되는 것 아니느냐?”
“예. 하지만 저의 계획은 단순한 추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계획을 내세워 설득할 수 없어 그리한 것입니다.”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난 그대가 ‘나를 싫어해서 그런가?’ 했소. 이렇게 완벽한 계획이 세워졌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이에 세르피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계획이 좋다 하여도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이 뒤따라 주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지요.”
잠시 말을 끊은 그는 뒤돌아서서 자리에 앉아 있는 가신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선 저는 참으로 행운아였습니다. 물론 여기 계신 카엘 님과 휘하에 계신 기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번에 저를 따라나선 기사들과 병사들은 모두 제 역할을 충분히 해 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헬슨이 말입니다.”
“헬슨? 그가 누구더냐?”
아버지의 질문에 세르피어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제가 데리고 있는 노예입니다.”
순간, 회의장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찌 평민도 아닌 귀족의 입에서 노예 따위를 칭찬하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세르피어는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음유시인처럼 차분하면서도 재미나게 헬슨의 전적을 말했다.
여섯 번의 탈출. 그리고 여섯 번의 형벌. 그럼에도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힘과 지구력. 세르피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일개 노예의 것이 아닌,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이야기라 불러 마땅했다.
세르피어가 말했다.
“지금껏 광산에 가면서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농노 마을에 머물게 된 것도 우연이지만, 처음 헬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를 길들일 수 없는 맹수 같은 노예라 하였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결과는…….”
“…….”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저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곁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젠 스스로를 저의 충견이라 자청하고 있습니다.”
카엘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의 충성을 받기 위해 조건을 제시하셨소?”
“혹시, 그를 평민으로 해 주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했는지 질문하시는 것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국법으로 금지돼 있는 것을 어길 생각도 없거니와 그런 거짓말로 받는 충성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충성을 받아낸 것이오?”
“그냥…… 잘 먹고, 잘 입게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허…….”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운명적인 인연―
노예 중에 그런 힘을 가진 장사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여 여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 맹수가 조건 없이 세르피어를 따르게 된 것 사실을, 신의 안배가 아니고서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허허, 대단하구려. 아무래도 신들이 세르피어를 사랑 하는가 봅니다.”
카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그 영주만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말이 더 커지기 전에 재빨리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하였기에 상을 내리고 싶은데, 무엇을 원하느냐?”
세르피어는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저를 믿고 따라 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약간의 포상과 함께, 같이 만찬을 즐길 수 있게 술과 음식을 원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내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네가 원하는 것이다.”
“저는 됐습니다.”
“왜 그리 말하느냐?”
세르피어는 잠시 머뭇거리다 회의장 안에 있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진정한 힘이란,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힘이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의 합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번 일은 저 혼자의 공이 아니라 모두의 공입니다. 그렇기에 저 혼자만 큰 포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로그 영주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가 알고 있는 세르피어는 똑똑하지만 욕심도 많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강한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모습에선 전혀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지의 사업을 맡아 일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리도 변했단 말인가?’
영주가 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하며 아무 말이 없자, 카엘이 나서서 세르피어에게 물었다.
“세르피어. 그대는 한 사람의 힘이 위대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그럼 지금은 전설이 된 수많은 영웅들의 그 힘과 무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물론, 한 영웅이 가진 무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전설이 된 영웅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런 영웅들이 일개 살인마였다면 어찌 됐을까요? 분명, 수많은 군사와 기사들에게 쫓기다 살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절대 한 나라를 일으키고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화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오.”
“그들이 영웅으로 추앙받고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무력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가 구심점이 되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힘이 모였기에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의 대답에 카엘은 크게 웃으며 영주에게 말했다.
“영주님. 이거, 오늘 제가 세르피어에게 큰 가르침을 받고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그 영주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점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갈 뿐이었다.
6. 진정한 시합의 시작 (1)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 계획을 세우기 위해 회의장으로 향하는 토란트는 불안하다는 듯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대머리를 자꾸만 문질렀다. 그리고 이러한 버릇은 세르피어가 마하마야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돌아온 날부터 시작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날 저녁 모임에 대한 소문을 들은 다음부터다.
토란트는 그날 영주의 초청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회의장 근처에 있었던 하인과 시녀들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세르피어는 타고난 달변가처럼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 나가면서도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을 늘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모든 계획을 세운 자신은 낮추며 오히려 일개 노예인 헬슨의 활약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고 하나같이 모두 입을 모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헬슨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호위기사나 병사들을 통해 헬슨이란 노예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들었을 것인데, 세르피어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자 궁금증이 폭발한 것이다. 이에 세르피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헬슨의 과거와 만나게 된 과정, 그리고 특별한 조건 없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 일화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신이 세르피어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토란트가 이리 확신하는 이유는, 제삼자를 통해 전해들은 자신 또한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이 아니고서야 어찌 짐승 같은 노예 중에서 헬슨 같은 자가 태어날 수 있으며,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 같은 노예가 갑자기 세르피어의 충견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신의 안배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토란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레언이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영웅이라 굳건히 믿고 있는데, 도전장을 내민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레언에 비해 절대 빠지지 않는 조건을 갖고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한 해를 마감하는 추수가 끝나고 새해를 알리는 혹독한 겨울이 오면 레언을 소영주로 세우자고 건의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회의를 시작하지.”
로그 영주의 말에 따라 지루한 회의가 진행됐다. 주변 영지의 동향과 왕성에서 내려온 새로운 정책 등, 큰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영지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 방안들이 나왔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제법 지나자 로그 영주는 이만 회의를 마치고자 했다.
“자,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면 이만 끝내지.”
그 말에 모두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였다. 바로 그때, 회의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던 토란트가 손을 들었다.
“건의할 것이 있습니다.”
“뭔가?”
모두 다시 자리에 착석하자 토란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곧 있으면, 사람이 인생을 마감할 때 그동안 쌓아 온 덕을 거둬들이듯 한 해를 마감하는 추수 계절이 끝납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태어나듯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고통의 겨울이 옵니다.”
“…….”
“그리고 새해가 되면 레언은 18살의 성인입니다. 그래서 건의 드리고자 하는 것은, 새해에는 레언을 후계자로 세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회의장 안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에 토란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이제 성인이 된 레언을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은 결코 관례에 어긋난 일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술렁대는 것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세르피어의 존재 때문이리라.
로그 영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자 카엘이 나섰다.
“음…… 헤이나가의 후계자 임명은 급한 일이 아니니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카엘의 말에 많은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하며 나섰고, 토란트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딱딱해졌다. 그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만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낙심하기에는 일렀다. 왜냐하면 이 땅의 주인인 로그 영주가 아직 자신의 뜻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그리 생각하니, 토란트 경의 건의는 다음으로 미루지.”
믿었던 로그 영주까지 난색을 표하며 등을 돌리자, 토란트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하하. 얘기 들었나?”
상단에서 올라온 서류를 잔뜩 가지고 집무실에 들어선 리노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방긋방긋 웃고 있는 세르피어에게 되물었다.
“무얼 말입니까?”
“토란트가 형님의 후계자 임명을 건의했었다더군.”
그 말에 리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건의는 기각됐겠군요.”
“어? 알고 있었나?”
세르피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리노는 고개를 저었다.
“몰랐습니다.”
“그럼 어떻게 맞췄지?”
“만약, 그 건의가 받아들여졌더라면 세르피어 님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을 수 없으니까요.”
“크하하하. 역시…… 역시 리노야. 대단해.”
“제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세르피어 님의 연기가 너무 어설펐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요. 아니, 어설펐다고 말하기도 그렇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기쁜 마음을 표출하기 위해 웃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러한 세르피어 님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나쁜 소문이 퍼지고 말 겁니다. 그러니 주의하십시오.”
리노의 질책 아닌 질책에도 세르피어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알았어. 하지만 오늘만은 즐기고 싶다고. 지금까지 형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 중 기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거든.”
마치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리노가 말했다.
“우선은 급한 불을 껐군요. 한 3, 4년의 시간을 벌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겨우 시간을 벌었다고 평가하다니…… 너무 야박하군.”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대로 모든 것이 고정된다면 결국, 영주님도 그렇고 가신들도 그렇고 장자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장자의 힘이니까요.”
찬물을 끼얹는 리노의 발언에 세르피어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그럼 앞으로 그 장자의 힘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단 말이군.”
“예. 하지만 그러한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지?”
리노가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