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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1화)
5. 도전자 (2)


영주민들은 마흔일곱 개의 머리를 줄로 묶어 마차로 끌고 돌아온 세르피어를 환성으로 맞이했다. 어쩌면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레언이 실패한 일을 더 적은 인원만으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성공시켰기에 더 열광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런 분위기 속에 로그 영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직접 나가 세르피어와 일행을 맞이했다.
“장하구나.”
영주의 첫마디에 세르피어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군례를 올렸다.
“모두 다 아버님께서 도와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냥 입바른 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직 어리기에 작은 승리에도 들떠 있으리라 여겼건만,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하긴, 언제나 이렇게 냉철하기에 영지 내 모든 사업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렇게 전술에도 능하고 직접 전투에 나설 만큼 용감한 것을 보니 영주로서 자질도…… 음?’
순간, 로그 영주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언제나 장남인 레언의 곁에서 참모로써 도와주는 세르피어를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문무를 겸비한 영주의 자질을 가진 아들로 바라보는 자신을 보고는 당황한 것이다.
‘이거…… 잘못하면 골치 아프게 될지 모르겠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세르피어를 좋은 자질을 가진 후계자로 바라봤다면, 가신들 중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있을 것이 뻔했다. 이런 때에 잘못했다가는, 두 형제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영지는 두 쪽으로 갈라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 간악한 가네사 영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
마치 당장 무슨 사단이라도 벌어질 것 같이 초조해진 로그 영주는 세르피어에게 ‘영주직에 욕심이 있냐’고 단도직접적으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알아볼 수 없는 문제이기에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조용히 일을 무마시키거나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나중에 집무실로 들르거라. 이번 일에 대해 좀 자세히 듣고 싶구나.”
“예, 알겠습니다.”
세르피어는 대답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안색이 좋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로그 영주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곁에서 모신 가신들 중, 눈치 빠른 이들 또한 쉽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주성 중앙광장에 마하마야의 머리들을 효시한 세르피어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하인들을 내보내고는 리노에게 물었다.
“아까 아버님의 표정이 이상하더군. 왜 그런 거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계획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야?”
그 말을 들은 리노는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영주님의 입장에서는 이번 세르피어 님의 승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승리를 승리만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흔히 낙천적이고 깊은 생각이나 고민을 하기 싫어하는 부류의 인물들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리노는 창가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세르피어 님의 능력을 레언 님의 참모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인물들은 생각은 있으나,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모자란 자들이지요.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소심한 인물이던지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면 기쁨보다 흐뭇한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꿀꺽.
세르피어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설명한 두 가지 예는 모두 해당되지 않기에, 점점 긴장감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창밖의 영지 내 풍경을 바라보던 리노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세르피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세르피어 님의 능력을 좋은 군주의 자질로 보고, 후계자 자리를 두고 레언 님과 경쟁할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레언 님만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에서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은 영지에 큰 풍파를 가져올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표정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럼…… 아버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다는 말이냐?”
리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신이 아닌 이상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그분께서는 세르피어 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난 준비가 끝나지 않았어. 이대로 경쟁했다가는 깨지고 말 것이라고.”
스스로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르피어는 확실히 뛰어난 자임이 분명했다.
리노가 말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영주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가신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셨듯이 아직은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고 정면 승부를 보기에는 매우 불안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레언 님은 타고난 용사이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지금까지 저희가 한 일은 레언 님을 낮추고 세르피어 님을 높임으로써 섣불리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으니까요.”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 가는 리노의 설명에 푹 빠진 세르피어가 곧바로 물었다.
“그럼?”
“헬슨을 이용하십시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세르피어가 되물었다.
“헬슨을?”
“예. 이번 마족 사냥의 모든 계획은 세르피어 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허험.”
낯뜨거운지 세르피어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리노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제 세르피어 님의 지략에는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나 무력에 있어서는 레언 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레언 님과 비교해도 될 만한 용자가 세르피어 님의 충견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지략과 무력을 두루 갖춘 자라고 할 것이다.
리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의 활약상은 테오르 경과 많은 병사들이 봤습니다.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지요. 그러니 그를 이용하십시오. 노예지만 타고난 무력과 전투력을 가진 자가 세르피어 님의 말이라면 지옥에도 뛰어들어 갈 충견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각인시키십시오.”
그 말을 듣고 있던 세르피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형님이 헬슨에게 결투 신청이라도 하면? 헬슨이 뛰어나가는 것은 알지만 아직 형님에게 비교하면 어린아이에 불구하다고.”
리노가 씩 웃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는 거지?”
“왜냐하면 헬슨은 노예이니까요. 충견은 될 수 있어도, 명예를 건 결투 상대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헬슨은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레언 님도 어쩌지 못하는 실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세르피어 님이 그를 잘 돌봐 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세르피어의 얼굴엔 알 수 없는 희열이 일어났다.
신이 내린 용자.
되살아난 전설.
흔히들 레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레언과 비견되는 노예가 자신의 충견이라 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리노는 세르피어가 잠시 동안 마음속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기다렸다 말했다.
“그리고 세르피어 님께서는 스스로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대신 아까도 말했듯, 헬슨의 존재를 잘 이용하셔야 합니다. 단지 그의 능력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난 과정도 극적으로 잘 살리셔야 합니다. 마치 신들이 세르피어 님을 위해 점지해 줬다는 듯이 말입니다.”
“신들이?”
“예. 생각해 보십시오. 레언 님이 왜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것입니까? 바로, 신들의 선택을 받고 태어난 용자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르피어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리노가 이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신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에 크게 흔들립니다. 그러니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세르피어 님을 선택하여 헬슨 같은 용자를 노예로 보내어 세르피어 님의 충견이 되게 하였고 이 모든 것이 신이 점지하신 운명이자 숙명이다―라고 느낄 수 있게 말입니다.”
“운명이자 숙명이라…… 하하, 참으로 좋은 말이구나. 그래, 그래. 네 말대로 이 모든 것이 신들이 내게 안배한 운명이자 숙명이지.”

* * *

회의장에 들어선 세르피어는 주변을 둘러봤다. 일반 회의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가신들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 로그 영주가 가장 신임하는 자들만 부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중 카엘과 눈이 마주친 세르피어는 살짝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를 하자, 그 또한 잔잔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비록 자신을 제외시키고 작전을 추진하였지만, 그 어떠한 피해도 없이 대성공한 것이 기특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카엘과 눈인사를 마친 세르피어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영주가 앉아 있는 단상 앞에 가 섰다. 그러자 로그 영주가 매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할 텐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워낙 좋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따라가 준 덕분에 저는 한 일이 없어서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에 로그 영주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부른 이유는 우리 모두와 이번 작전에 대해 좀 듣고 싶어서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로그 영주는 이번 작전을 세우게 된 배경에 대해 들으며, 둘째 아들의 속마음을 엿보고 싶은 것이었다.
세르피어가 물었다.
“정확히 무엇을 듣고 싶으신 것입니까?”
“우선, 어떻게 해서 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듣고 싶구나. 네가 혼자만의 힘으로 해 보겠다고 했을 때, 무슨 계획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기사들을 활용했으면 더 안전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아버지의 진솔한 말에 세르피어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대답했다.
“제가 이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형님이 가져온 귀중한 정보 덕분입니다.”
“정보?”
“예.”
세르피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받은 마족들이 철재 무기를…… 그것도 신앙의 문제로 검같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무기가 아닌 철퇴 같은 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철퇴 같은 것은 마을을 습격하여 얻을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분명 무기 상인을 습격하였을 것이라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무기 상인들이 있는 도시나 마을은 마하마야 따위가 쉽게 습격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상행을 가는 무기 상인을 습격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 수긍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철퇴 같은 무기를 마하마야가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르피어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저주받은 것들은 그 무기를 가지고 그 무시무시한 기사들을 물리쳤습니다. 아무리 무지한 것이라지만, 이 정도 되면 그것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강력한 무기를 보유한다면 기사들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상행을 떠나는 화물 마차에 큰 관심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강력한 무기를 더 많이 보유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힘이 더 강해질 것이니까요.”
이렇게 듣고 보니 참으로 간단한 추리였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를 보고 못 보고가 둔재와 천재를 나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로그 영주가 물었다.
“그런데 왜 카엘과 함께 가길 거부한 것이지? 같이 갔으면 승리를 더 확신하지 않았겠느냐?”
세르피어는 고개를 돌려 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엘 님 같은 분과 어찌 함께 가기 싫었겠습니까. 오히려 저에게는 영광이지요. 다만, 많은 수의 기사와 동행할 수 없었기에 그리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많은 수의 기사가 동행한다면, 위장을 하기가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장이 허술하였다면, 마하마야를 함정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뒤를 쫓아가 백병전을 벌여야 했을 것이며, 그럼 적든 크든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요.”
“그럼 너는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냐?”
“피해를 입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책이 있음에도 하책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기는 싫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