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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10화)
5. 도전자 (1)
“하하하, 오늘 형님의 얼굴을 너도 봤어야 했어. 주인에게 혼이 난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서 고개도 못 들고 있는 꼬락서니는 정말, 나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가관이었단 말이야. 하하하!”
회의장에서 돌아온 세르피어는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긴,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과 기대의 눈빛을 받으며 승자의 자리에만 있던 레언이 처음으로 실패한 역사적인 모습을 봤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버님께서 형님을 바라보는 그 눈빛, 실망에 가득 찬 눈빛, 너무 좋았어. 하기야 아무리 아끼는 자식이라지만 기사 서른 명 중 절반을 잃고 패배하여 돌아왔는데, 절대 좋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겠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
리노는 너무 흥분해서 계속 말을 늘여놓는 세르피어를 조용히 바라보다, 잠시 틈이 생기자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누가 마하마야를 잡으러 가게 되는 겁니까? 세르피어 님이십니까?”
“그래. 내가 간다.”
“잘됐군요. 그럼 병력의 차출은…….”
“그런데…….”
세르피어는 갑작스럽게 리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면 누구랑 가는 것입니까?”
“카엘이란 분과 간다. 너는 모르겠지만 아버님이 가장 믿는 가신 중 한 명으로 백전노장이지.”
리노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럼…… 이번 사건을 통해 세르피어 님은 두 번 다시없을 기회를 잃게 되겠군요.”
“무슨 말이지?”
“이번 일의 정확한 목표는 세르피어 님의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레언 님이 실패한 일을 완벽하게 처리함으로써 세르피어 님이야말로 다음 영주 자리에 어울리는 실력과 능력을 갖춘 인재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세르피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가서 성공하면 되지 않나?”
리노는 고개를 저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어린아이가 강한 용사와 함께 숲으로 가서 호랑이를 잡아옵니다. 용사는 사람들에게 어린아이가 호랑이를 잡았다며 칭찬을 합니다. 세르피어 님께서는 그 말을 듣고서는 뭐라 생각하시겠습니까?”
“…….”
세르피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본인도 알고 리노도 알고 있었다.
리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 말을 들은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용사가 죽였다고 생각할 겁니다. 진실이 어떻든 상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에는 아이는 호랑이를 잡을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네 말은, 이번 마하마야 사냥을 성공한다 해도 사람들은 내가 아닌 카엘이란 분의 공으로 볼 것이란 말인가?”
“예.”
단호한 대답에 세르피어는 심각하게 고민하다 물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지?”
“우선은 영주님께 말씀 드려서 이번 일을 혼자만의 능력으로 해결하겠다 하십시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다면 분명 기사들을 나에게 주지 않을 것이 뻔하단 말이야.”
그 말에 리노는 오히려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기사들은 필요 없습니다. 세르피어 님께서는 호위기사 다섯 명과 일전에 같이 사냥을 갔던 기사 열 명 그리고 병사 서른다섯 명만 데리고 가면 됩니다. 호위기사야 세르피어 님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들이니 문제없을 테고, 병사 서른다섯 명쯤 차출하는데도 문제없으실 겁니다.”
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병사야 기사들만큼 중요성이 없기에, 그 정도라면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병사들을 데리고 마하마야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처음 상행을 이용해 놈들에게 철재 무기를 준 것 자체가 하나의 함정이니까요.”
리노의 알 수 없는 말에 세르피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이지? 자세히 말해 봐.”
“그것들은 세르피어 님이 보낸 상행을 털어서 철재 무기를 얻었습니다. 그것도 신앙적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는 칼이나 창이 아닌 화살과 철퇴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기사들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습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화물 마차를 이끌고 가는 상행을 본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승리에 취한 마족은 앞뒤 분간하지도 못하고 달려들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상행 자체가 함정이라면?
레언이 적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패배했듯이, 마족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약탈하러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당하고 말리라.
‘무서운 놈.’
세르피어는 소름이 끼쳤다. 단순히 무기를 제공하기 위한 계획인 줄 알았던 것이, 함정을 파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두렵게 느껴졌다. 그러는 한편 너무나도 든든했다.
‘후후. 이놈이 내 곁에 있는 이상, 레언은 결코 나의 상대가 될 수 없어.’
세르피어는 다음 날 부친을 찾아가 이번 일을 혼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선포했다. 로그 영주가 화를 내며 반대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레언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못미더운 둘째가 성공하리라 전혀 기대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세르피어가 자신의 호위기사를 포함해 단 열다섯 명의 기사와 서른다섯 명의 병사만을 이끌고 가겠다는 말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병사의 목숨이 하찮아서가 아니다. 얼핏 보기에 무모해 보이는 결정을 내렸다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 여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허락을 받아 낸 세르피어는 화물 마차 다섯 대와 기사 열다섯 명, 병사 서른다섯 그리고 노예 둘이라는 볼품없는 인원을 이끌고 첫 출전을 하였다.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은 차남의 객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주를 제외하고 단 한 명, 대머리 토란트만은 다른 눈으로 바라봤다.
―도전!
그렇다. 그가 바라보는 세르피어는 스스로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형인 레언에게 도전을 하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이었다면 지금은 그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독사같이 간교한 세르피어를 바라보는 토란트의 눈빛은 아주 무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다섯 명의 마부가 아무런 호위도 없이 다섯 개의 화물 마차를 이끌고 이동하고 있다. 그래도 걱정은 되는지 큰 길만을 따라 움직이던 다섯 대의 마차는 해가 지자 사방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넓은 공터에 마차를 나란히 정차시켰다. 그러고서 모닥불을 피워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는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했다.
열기에 고기가 노릇노릇 구워지자 마부들은 단도로 고기를 얇게 썰어 먹으며 가죽 주머니에 담아 온 술로 목을 축였다. 배가 부르고 술기운이 올라오자 처음 경계심 가득한 눈빛은 사라지고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고 모닥불도 처음의 세기를 많이 잃어 갈 무렵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걸음에는 신중함이란 없었다. 마치 맹수가 자신의 영역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당당했다.
―저주받은 것들이 출몰했다! 모두 도망쳐!
마부 중 아직 경계를 내리지 않은 자가 있었는지 재빨리 마하마야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마부들은 고기와 술을 버리고는 말을 타고 부리나케 도망쳐 버렸다. 그 모습에 저주받은 마족들은 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느긋이 다가와 버리고 간 고기와 술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홉이나 열씩 모여 각각 다섯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이미 화물 마차를 빼앗은 경험 때문인지 저주받은 마족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얻은 무기들로 기사들까지 쫓아 버린 기억이 되살아나 내심 그런 무기들이 더 들어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쾅!
화물 마차의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온 마족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곱 명의 병사들이 쏜살같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크아악!
갑작스런 공격에 마하마야들은 당황했다. 아무런 방어구도 없고 주변에 엄폐물이라고는 하나 없는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돌아서서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활을 든 병사들은 도망치는 마족들을 한 마리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반백에 가깝던 마족의 수가 절반가량으로 단번에 줄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각 마차에 세 명씩 타고 있던 기사들은 재빨리 내려와 문에 깔렸던 마족의 숨통을 끊어 버린 후, 뒤로 물러난 마족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병사들도 창을 들고 기사들을 따랐다.
더 이상 화살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하마야들도 철퇴를 휘두르며 기사와 병사들에 맞서 싸우자, 주변은 금세 난전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방패를 들고 만반의 준비를 한 기사와 긴 창으로 거리를 두고 견제하는 병사들의 합공에 마족들은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특히 우람한 덩치가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큰 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몰아치는 헬슨 앞에서는 마족의 전투력은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의 힘과 무기의 위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도끼를 무기로 사용해 본 경험이 없는 무경험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공격은 너무나도 적절했으며 날카로웠다.
‘타고난 전사…… 신이 내린 천재……!’
혼자 마차 위에서 바라보던 리노의 생각이었다. 얼마 전 비샬바란 자와 함께 갔을 때 처음 도끼를 무기로 사용해 봤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은 벌써 수십 년간 수련을 한 전사처럼 완벽에 가깝게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생각보다 큰 그릇이군.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가 보기에 헬슨은 비록 노예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신들의 축복을 타고난 용사였다. 그런 자는 누군가 자신의 위에 군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휘하에 두었다가는 배신당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리라.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인가?’
모든 것을 의심하며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꿈꾸는 목표가 높은 만큼 더욱 냉철하고 모든 일에 철저해야 하리라. 안 그러면 그는 망상에 사로잡히다 한 줌의 흙이 되고 말리라.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지. 절대…….’
리노는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려 오는 손에 힘을 주며 조준을 했다. 그리고 적과 아군이 뒤섞인 난전 속에서 하나의 목표물을 찾아냈다.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철퇴를 휘두르는 마하마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관찰을 하다 보면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도 하나의 법칙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팅!
―크악!
긴 호흡 끝에 쏜 한 발이 세르피어를 향해 돌진하던 마하마야의 복부에 꽂혔다. 그는 자신 발 앞에서 고꾸라지는 마족을 보고는 리노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한 번 씩 웃은 다음 다시 검을 들고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 건가?’
어린 나이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싸우는 세르피어의 모습에서 본 적도 없는 헤이나 영지의 주인인 로그가 떠올랐다. 그가 들은 바로는 로그는 타고난 기사로 물러설 줄 모르고 위험을 즐기는 인물이라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이 세르피어에게도 이어진 듯했다.
‘후후, 하지만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거늘…….’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은 리노는 두 눈을 빛내며 다시금 활의 시위를 힘껏 당기며 새로운 목표를 찾아 눈을 굴렸다.
잠시 후. 갑작스러운 기습에 전의가 꺾이고 기사와 병사들의 적절한 합공과 도끼를 든 괴물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몇몇 살아남은 마하마야들은 무기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야영지를 벗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타고 도망쳤던 마부들이 나타나 뒤를 쫓았다. 그러고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긴 창을 가지고 등가죽을 꿰뚫어 버렸다. 이로써 결국 마하마야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척살할 수 있었다.
“하하! 대승이군, 대승이야!”
세르피어가 크게 웃으며 다가오자 리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너도 수고했다.”
그때, 테오르가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오, 테오르 경도 수고 많았소.”
“저,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테오르가 곁눈질로 저 멀리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헬슨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저자? 헬슨 아닌가? 내가 데려온 노예이고.”
“그건 압니다. 하지만 저놈의 실력이…….”
즉,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지만, 호위기사 대장을 할 정도 되는 인물이 헬슨의 실력을 보지 못하였을 리가 만무했다. 이에 곁에 있던 리노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던 세르피어를 대신해 대답했다.
“헬슨도 그렇고 저도…… 충견입니다.”
“충견?”
뜻 모를 말에 테오르가 되물었다.
“예, 충견…… 세르피어 님의 충견입니다.”
“그러니까, 너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세르피어 님의 충견이란 말이지?”
“예. 그리고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나게 해 준 신께 저는 감사드립니다.”
리노의 대답에 세르피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정확한 답변이군. 경도 들었다시피 저들은 나의 충견이오. 그것도 신이 내게 준 충견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