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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9화)
4. 명성 (3)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응? 무슨 말인가?”
일꾼들의 흥얼거리는 콧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비샬바는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헬슨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좀 전까지 만나고 싶어 하던 그것들이 나타났단 말입니다.”
“정말인가?”
“아마 맞을 겁니다.”
“젠장…… 젠장…….”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막상 일이 닥치자 입에서는 욕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며 다리는 사시나무 떨 듯 떨리기 시작했다. 비샬바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지켜 줄 호위가 헬슨 혼자라는 현실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재미나게 구경하던 헬슨이 좀 더 골려 먹겠다는 생각으로 한마디를 곁들였다.
“그리고 지금 이 주변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나타난 것으로 봐서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오.”
상인으로서 전투 경험이 한참 부족한 비샬바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슬슬 이동하기 시작한 헬슨의 뒤를 악착같이 따라가는 것을 보면, 살고 싶어 하는 의지 하나만큼은 인정받아 마땅하리라.

―크아!
―키에엑!
어둠과 동화되어 조심스럽게 접근한 마하마야들은 산양과도 같이 가뿐한 동작으로 마차로 만들어진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음식과 술에 취해,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일꾼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면에 헬슨은 야영지를 벗어나 말들이 묶인 곳으로 가기 위해 거대한 도끼를 한 손으로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는 마족들을 위협했다. 힘은 좋지만 싸움 경험이 미천한 그로서는, 위협적인 무기를 무조건 휘둘러 견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허…… 힘 하나는 엄청나군.”
뒤에 찰싹 달라붙은 비샬바는 헬슨의 힘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노예와 비교할 수 있는 장사는 아마 레언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니, 어찌 아니 놀라겠는가. 하지만 헬슨은 너무 정신이 없어 그런 칭찬을 들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아니, 뒤에서 일꾼들의 비명 소리와 저주에 비샬바의 칭찬이 묻힌 것이다.
아무튼 순식간에 말들이 묶인 장소까지 도착한 헬슨은 도끼를 내려찍어 단 한 번에 가죽으로 된 고삐들을 끊어 버렸다. 그는 말들 중 자신이 탈 한 마리만 남겨 두고 나머지 말들을 쫓아 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비샬바의 기합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으럇! 어서! 어서 달려!”
작은 키에 통통한 살집으로 인해 둔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말에 올라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헬슨은 놀랍기도 하지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기쁘기도 했다.
‘후후, 네놈이 이 짓을 하길 기다렸지.’
그는 잽싸게 돌멩이가 묶인 노끈을 휙휙 돌리더니, 비샬바가 타고 있는 말의 다리를 향해 던져 버렸다.
히이잉―
제법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노끈은 정확하게 말의 다리에 감겨 버렸다. 덕분에 아무 죄 없는 말은 구슬프게 울며 쓰러져야만 했고, 비샬바는 붕 허공을 날아 바닥을 다섯 차례나 구르는 명장면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이에 헬슨은 씩 웃으며 자신의 말에 올라 힘차게 몰았다. 그리곤 다분히 고의적으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비샬바의 머리끄덩이를 낚아채고는 질질 끌며 말을 달렸다. 후담이지만, 다행히도 비샬바는 뒤에서 쫓아오는 마하마야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였다고 한다.

* * *

“이젠 진짜 준비 다 됐냐?”
레언은 심기 불편함을 드러내며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하긴, 말들이 갑작스럽게 설사를 하는 바람에 출전이 닷새나 늦어졌음은 물론, 상행을 가거나 여행을 하던 자들이 마하마야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 하도 똥을 싸대서 뛰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세르피어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일은 걱정 마십시오. 엊그제부터 관리를 철저히 시켜 체력엔 문제없을 겁니다.”
“뭐, 그렇다면야…….”
레언은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곤 세르피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도.”
세르피어가 지도를 건네자 레언은 지도를 펼쳐 보며 물었다.
“저주받은 것들의 이동 경로는 확실한 것이겠지?”
“네. 확실합니다. 그것들에게 당한 마을은 물론 여행자들이나 상단에게 받은 정보를 가지고 작성하고, 추격에 능한 병사들도 보내서 확실하게 확인했으니까요.”
“알았다.”
레언은 지도를 다시 돌돌 말아 안장에 붙어 있는 주머니에 꽂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준비!”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선발된 젊은 기사들은 모두 말에 올라 언제든지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
“출발!”
레언이 가장 앞장서서 말을 천천히 몰자 서른 명의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쟁에 나갈 때처럼 깃발을 세우지도 않았고 많은 병사들이 뒤를 따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레언의 모습은 장엄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이 확실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돌아올 때는 지금 같지는 않을 거야. 결코…….’
상단을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는 대리인인 비샬바가 물건을 잘 전달했다고 보고를 해왔기에, 세르피어가 거는 기대는 컸다. 물론 마하마야가 그 물건들을 사용할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리노가 보여 준 문서와 책들을 함께 확인해 본 결과, 사용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리고 타고난 전투력을 가진 마하마야가 위협적인 철재 무기를 휘두른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간 레언 일행은 분명 패하고 말리라.
‘그리고 레언이 패하고 돌아오면 기회는 나에게 돌아오겠지. 후후.’

한편, 세르피어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레언은 기사들을 이끌고 지도에 적혀 있는 마하마야의 이동 경로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목표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가슴에서는 기쁨의 희열로 가득 차올랐다.
그에게 있어 이번 전투는 하나의 유희였으며 사냥이었다. 패배란 있을 수 없으며 승리와 영광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레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 나선 서른 명의 기사들 또한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마하마야를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인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 승리와 영광만을 생각하며 말을 달린 지 이틀 만에, 목표물이 숨어서 이동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숲에 도착했다.
“이제 적과 가까워졌으니 모두 정신을 차리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마라.”
“그럼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 안 그랬다가는 놈들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하하, 내 생각을 정확히 읽었군. 그러니까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놈들의 흔적을 놓치지 말란 말이야. 빨리 놈들을 제거하고 집에 돌아가 쉬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둘의 대화에 모두들 웃었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기사들의 눈빛은 점점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레언의 말대로 적들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다. 아무리 마하마야란 마족들이 약하다고는 해도, 그것은 무기의 차이 때문이지 전투력의 차이가 아니었다.
말들의 움직임이 아주 자유롭지 못한 숲에서 기습을 당한다면 낭패를 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적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사실에, 모든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언제든지 적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때, 한 기사가 손을 들어 손짓을 했다. 무언가 흔적을 찾은 것이었다. 이에 레언을 비롯해 모든 기사들이 손짓을 한 기사를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확실하군. 놈들의 흔적이다.’
레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짓만으로 흔적을 따라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기사들 또한 그 뜻을 이해하고는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적이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에 최대한 소리를 죽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흔적을 따라 이동한 지 얼마 안 있어 목표물을 발견하였다.
“돌격!”
검게 그을린 피부에 하얀눈을 머리에 문신한 마족을 보자 레언은 적이 도망칠까 두려워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기사들은 그의 명령에 충실하여 말의 엉덩이를 치며 갑작스레 속력을 높였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하마야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활을 들어 시위를 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모두들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마하마야가 사용하는 화살은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것이기에,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을 절대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지금 마하마야가 가지고 있는 화살은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크억!”
“으악!”
철로 만들어진 촉으로 만든 화살이 날아옴과 동시에 선두에서 내달리던 기사들은 곧바로 몸이 꿰뚫리며 낙마하였다. 이 뜻밖의 상황에 놀란 레언과 기사들은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레언의 외침에 한 기사가 대답했다.
“철로 된 화살촉입니다. 놈들이 제대로 된 화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런……!”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하마야는 레언과 기사들을 사냥하겠다는 생각으로 화살을 쏘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모두 방패 장착!”
레언의 명령이 아니어도 기사들은 뒤에 매달려 있던 방패를 찾아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방패를 이용해 화살을 막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피해가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마하마야는 기사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말들을 쏘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모두 말에서 내려!”
후퇴란 단어는 머릿속에 없는 레언으로서는, 말이 쓰러지며 같이 낙마할 경우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두 앞으로 전진! 적과 거리를 좁힌다.”
기사들은 방패를 앞세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거리고 좁아져서 활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유리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레언은 두 번째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쾅!
쾅!
꽈직!
기사들의 방패는 순식간에 부셔졌고, 갑옷은 찌그러지거나 파손됐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검은 마하마야가 휘두르는 철퇴에 부러져 버리거나 아니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놓치기 일쑤였다.
기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적은 언제나 나무로 된 몽둥이만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난데없이 철퇴라니…….
“으아악! 이 저주받은 것들아! 죽어라!”
레언은 자신의 대검을 휘두르며 마족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엄청난 힘을 쉽게 알아본 마하마야는 레언은 철저히 피하며 다른 기사들만을 골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사들은 너무 쉽게 쓰러져 갔다. 마하마야의 뛰어난 전투력과 수적의 불리함도 크게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무기의 존재 유무로 크게 당황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한 기사가 혼자 열심히 대검을 휘두르는 레언에게 외쳤다.
“레언 님! 후퇴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후퇴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여기서 모두 죽고 맙니다!”
“…….”
“돌아가서 더 많은 기사를 이끌고 확실한 계획을 세워 돌아와야 합니다! 아니면 모두 여기서 죽고 맙니다!”
“이……!”
설마하니 저런 저주받은 마족 따위에게 패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기사들을 다 죽게 나둘 수 없는 문제였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자신은 스스로 최악의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 되리라.
이를 꽉 깨문 레언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후퇴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모두 후퇴! 말을 타고 후퇴하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두세 명씩 조를 이루어 서로를 엄호하며 살아남은 말들을 찾아 올라탔다. 그리고는 레언의 뒤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