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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트라이 1권 (8화)
4. 명성 (2)


짧게 대답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은 세르피어의 마음은 겉모습과는 달리 편치가 않았다. 레언에게 마하마야 척살을 맡기셨다는 것은 그만큼 믿고 의지한다는 무언의 표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일을 깨끗하게 해결하게 된다면 레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그것은 자신과의 차이를 더욱 벌려 놓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젠장…… 나에게도 기회만 준다면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데…….’
하지만 역시 모든 기회는 레언에게 주어질 뿐이고, 세르피어는 언제나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 둘의 운명이고 숙명인 것이다.
“괜찮은가?”
세르피어가 속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머리인 토란트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예? 무슨……?”
갑작스런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짓자, 토란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뭐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있나?”
세르피어는 순간 뜨끔하여 ‘내가 표정 관리를 잘못했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표정은 완벽했다. 절대 남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 무슨 말입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음…… 그런가? 내가 잘못 봤나 보군.”
그러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는 토란트.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세르피어의 눈빛 깊은 곳에는 살기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놈…… 날 의심하는 것인가? 그래서 한 번 떠본 건가?’
그럴 수 있었다. 레언을 지지하는 인물들 중 가장 의심이 많은 여우같은 인물이니까. 그렇기에 레언을 끌어내리기 전에 가장 먼저 제거돼야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와장창!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세르피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가구를 쓰러트리고 물건들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철한 그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과격한 행동인지라, 모든 시녀와 하인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이에 리노가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선 진정하시지요. 그리고 새로 온 사람도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성을 완전히 잃지 않았는지 리노의 말을 들은 세르피어는 막 작은 항아리를 내던지려던 손을 멈췄다. 그리곤 시선도 주지 않은 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나가라.”
그 말에 시녀와 하인들은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도망치듯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데려온 헬슨과 바테스 노인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에 리노가 자리를 피해 달라는 눈짓을 보내자 헬슨은 세르피어에게 경멸의 눈빛을 한 차례 보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모두 나가고 아무도 없자 아직 분이 덜 풀려 씩씩거리는 세르피어가 리노에게 물었다.
“소문 들었나?”
“마하마야의 출현에 관한 것이라면 들었습니다.”
“그것들을 척살하기 위해 레언이 나서기로 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나?”
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레언의 명성이 더욱 올라갈 것이고, 그의 위치는 더욱 단단해지겠지요. 무너트릴 수 없는 철옹성처럼…….”
와장창!
세르피어는 기어코 손에 들려 있던 작은 항아리를 바닥에 내던져 깨트리고야 말았다.
“맘에 안 들어! 왜 모든 기회는 무조건 그에게만 가는 거지? 나에게도 기사만 내준다면 가서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릴 수 있어! 하지만 언제나 레언에게만 기회가 가지! 마치 놈의 명성 쌓기를 도와주는 것처럼 말이야!”
그 말에 리노가 싱긋 웃었다.
“잘 보셨습니다. 지금 모두들 그의 명성 쌓기를 돕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맞습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다.”
“농담 아닙니다. 영주의 명성이 영지의 명성으로 이어집니다. 즉, 뛰어난 명성을 가진 자가 영주가 된다면 그 영지의 명성 또한 올라가는 것이지요.”
“젠장!”
세르피어의 욕설에도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은 리노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마하마야가 몇 마리쯤 됩니까?”
“약 오십 마리로 추정된다.”
“레언 님은 얼마의 병력을 이끌고 가실 예정입니까?”
“빠른 이동이 관건이라, 병사는 빼고 기사들만 이끌고 갈 계획이더군. 아마 서른 명 정도가 될 거야.”
“그렇다면 머릿수로는 마족들이 우위에 있군요.”
리노의 천연덕스런 말에 세르피어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말을 타고 방패를 들고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상대로, 그것들의 조잡한 활과 몽둥이 따위가 통할 것 같나? 그 수가 세 배에 달한다 하여도 위협거리도 안 돼.”
그의 말은 정확했다. 마하마야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숲 속을 떠돌아다니는 관계로, 스스로의 문명도 발전시키지 못한 미개한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불을 피우고 철을 다루는 기술 등이 없어, 강한 전투력을 지녔음에도 기사들만 나타나면 도망 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저도 마하마야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그러던 중 재미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활과 몽둥이만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기록돼 있더군요. 그 때문에 마을을 습격하여도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창이나 칼은 가져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잠시 말을 끊은 리노는 자리를 옮겨 의자에 앉은 후, 설명을 계속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들에게 제대로 된 무기가 제공된다면 어떨까요?”
“제대로 된 무기?”
“예. 제대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 철로 만들어진 철퇴.”
세르피어의 머릿속은 급하게 돌아갔다. 만약, 마족들이 제대로 된 활과 철퇴로 무장을 한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쫓아간 레언 일행은 무참하게 패하고 말리라. 아니, 승리를 거둔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테니, 그 명성에는 큰 흠집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무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지?”
이미 결정을 내려 버린 세르피어가 방법을 묻자, 리노는 씩 웃었다.
“이럴 때를 위해 상단을 만든 것입니다.”
“상단?”
“예. 상단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레언의 출병을 좀 늦춰야 합니다.”
이번에는 세르피어가 씩 웃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
“방법이 있으십니까?”
“후후, 말이 아프면 어디에도 못 가는 법이지. 그리고 말이 병에 걸려 설사를 하는 경우는 좀 드물지만 아주 없지 않거든. 하하하!”

* * *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마부의 곁에 앉아 이동하는 헬슨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지금 그냥 뛰어내리면…….’
그러면 그는 자유를 얻으리라. 하지만 그는 돼지새끼를 죽이러 가기도 전에 잡히고 말 것이 분명했다. 세르피어가 내준 허가증으로는 멀리 갈 수도 없고 혼자서는 숲 속에서 생활하며 추적자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엘렌의 복수를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왜냐하면 그 돼지새끼는 가네사 영지의 2인자로서, 노예 신분인 헬슨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엄청난 신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젠장.’
리노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너무나도 큰 절망만을 안겨 줬다. 그리고 그 돼지새끼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도 의심케 만들었다. 아마도 평소에 마음속으로 조금이나마 존경하는 바테스 노인의 충고만 없었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바테스 영감은 대체 뭘 보고 우선은 리노의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것이지?’
헬슨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테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믿음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작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지.”
상행의 통솔자이자 세르피어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비샬바란 키 작은 중년의 외침에 세 대의 화물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일꾼들은 마차를 둥그렇게 원을 그리듯 세운 다음 멍에를 풀어 말을 쉴 수 있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중심에 야영 준비를 하였다.
“어이, 헬슨이라 했나? 자넨 여기로 좀 와 보게.”
비샬바는 노예 주제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는 헬슨을 원 밖으로 불러냈다.
“왜 불렀습니까?”
“아무래도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 세르피어 님이 알려 준 대로라면 그 저주받은 것들이 이 근처에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도망칠 때, 말들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놔.”
그 말에 헬슨은 야영지 한쪽에 모여 있는 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무에 묶어 둔 긴 고삐를 바라봤다.
“걱정 마십시오. 저 정도면 한 번에 끊어 버릴 수 있으니까.”
“뭐, 그것은 알아서 해. 그런데 너, 말은 탈 줄 아냐?”
비샬바의 질문에 헬슨은 쓴 미소를 지었다. 어찌 말을 탈 줄 모르겠는가. 여섯 번 탈출을 시도하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 승마술이거늘. 타고난 운동신경 덕분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예, 조금은…….”
“노예 놈이 별것을 다하네. 하기야 모르면 안 되겠지만…….”
말꼬리를 흐린 비샬바가 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꼭 기억해라. 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의 신변을 가장 먼저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헬슨이 빨리 대답하지 않자 비샬바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세르피어 님의 선택을 받았다지만, 아직 신임을 받은 것은 아니지. 네가 이번 일을 완벽히 완수하지 못한다면, 세르피어 님은 너를 중용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럼, 네가 어떻게 될지는 잘 알겠지?”
비샬바의 협박에 헬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승자의 미소를 띠었다. 자신보다 덩치도 더 크고 힘도 좋은 헬슨을 굴복시켰다는 쾌감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리라, 등 뒤에 숨겨진 헬슨의 주먹이 당장 바위라도 때려 부술 듯 꿈틀대고 있었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비샬바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화물 마차에 다가가 고깃덩이와 향신료 그리고 술을 잔뜩 꺼내 가져왔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으니, 고기가 상하기 전에 오늘 다 구워 먹자고.”
그의 말에 일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상행에 호위무사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이 좀 불안했지만, 높은 보수와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고용주의 인심만큼은 최고였다. 그리고 이렇게 돈을 잘 쓰는 사람이 호위무사를 더 고용하지 않은 것은, 저 한 명의 호위가 그만큼 대단한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그렇기에 일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음에 또다시 일을 하자고 한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승낙하리라 다짐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야영지는 갑작스럽게 음식 잔치가 벌어졌다. 일꾼들은 기름진 고기로 배를 채우고 술로 목을 축이니,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콧노래가 흘러나오며 어깨도 덩실덩실 춤이 춰졌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먹고 마시며 흥겨워할 때, 비샬바는 잘 구워진 고기를 입에 오물오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헬슨의 곁으로 다가갔다. 언제 꺼내 왔는지 잘 버려진 도끼를 옆에 세워 두고 끝에 돌멩이가 달려 있는 노끈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헬슨의 모습은 먹이를 노리는 매와도 같았다.
“어때? 뭔가 보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비샬바는 살집으로 인해 둥그런 얼굴을 갸웃거렸다.
“지금쯤 나와야 맞는데. 혹시 그놈들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은 아닐까?”
“모릅니다. 하지만 이틀 동안 향이 강한 향신료를 잔뜩 뿌린 고기를 구웠으니, 그것들이 근처에 있다면 알아서 나타나겠죠.”
“쩝…… 이렇게 마냥 기다리니 너무 힘이 드는군. 특히 정신적으로 말이야.”
스슥.
사사삭.
바로 그때, 수풀 소리가 헬슨의 귓가에 들려왔다.
‘왔다!’
지금 불고 있는 바람의 세기에 비해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컸기에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물론 그 존재가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동물이거나 재수 없으면 괴수일 수 있었다. 하지만 헬슨은 지금 다가오는 존재가 마족인 마하마야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주위를 포위하듯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